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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 세계대전이 9부 능선을 숨 가쁘게 넘어가던 1944년, 아름답기로 소문난 인도네시아 자바섬도 전쟁의 소용돌이에 휩싸여 신음할 수밖에 없었다. 섬 가득하게 피었던 아름다운 꽃들이 군화에 짓밟혔고, 평화롭던 섬마을도 생지옥으로 변했다.

그게 어디 꽃뿐이겠는가. 한국을 비롯한 여러 식민지에서 끌려온 꽃다운 여성들이 성에 굶주린 일본군들에 의해서 무참하게 유린됐다. 전쟁범죄였다. 전쟁범죄 중에서도 가장 끔찍한 범죄가 남태평양과 동남아 전선 곳곳에서 저질러졌다.

그 희생자 중에는 자바섬에서 출생한 얀(Jan)이라는 이름의 네덜란드계 21살짜리 처녀도 있었다. 서슬 시퍼런 사무라이 칼로 위협하는 일본군 장교한테 순결을 유린당한 그녀는 그후 약 3개월 동안 밤낮없이 일본군 장교와 사병들의 '성적 노리개'로 죽음보다 더 끔찍한 시달림을 당했다.

▲ 끔찍했던 위안부 경험을 털어놓고 있는 얀 오헤른 할머니.
ⓒ 송애나
50년의 깊은 침묵을 깨고

그녀는 엄청난 충격과 씻을 수 없는 수치심 때문에 그후 50년 동안 침묵의 세월을 보냈다. 그러던 1992년 호주TV보도를 통해서 한국계 위안부 출신 할머니들이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악몽의 세월을 증언하는 모습을 시청했다. 그 당시 보스니아에서 전쟁이 발생했고 여자들이 강간을 당했다는 뉴스가 연일 보도되는 상황이었다.

한국 할머니들은 다른 무엇보다도 일본정부 차원의 사죄를 원했다. 그러나 그들은 그 어디에서도 사과를 받아내지 못했다. 그때 얀 오헤른 할머니는 일생일대의 결단을 내렸다. "저들을 도와야 한다. 마침내 내 인생의 암흑기를 털어놓을 시간이 됐다"고 결심한 것이다.

오헤른 할머니는 그때까지 아무것도 몰랐던 두 딸에게 자신의 참혹했던 시절의 얘기를 들려준 다음 세상을 향해서 일본의 만행을 고발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자신이 위안부(comfort woman) 출신이라는 사실을 밝힌 최초의 백인여성(the first Caucasian)이다.

그후 오헤른 할머니는 두 차례의 도쿄방문을 비롯해서 호주, 북아일랜드, 영국, 네덜란드 등 전 세계에서 열리는 종군위안부 관련 행사에 참석했다. 그렇게 하기를 15년, 올해 84세가 된 오헤른 할머니는 2월 15일 오후 1시(미국현지시간)에 열린 미국 하원 아시아-태평양 소위원회 청문회에 증언하는 최초의 여성 3명 중의 한명으로 선정되어 역사적인 증인이 됐다. 나머지 두 분은 한국의 이용수, 김군자 할머니다.

다음에 소개될 내용은 오헤른 할머니가 기자에게 전화로 들려준 내용을 중심으로, 시드니에 거주하는 한인동포 박은덕 변호사와 멜버른에 거주하는 송애나씨가 전해준 많은 자료를 요약한 것이다.

박은덕, 송애나 두 사람은 호주에서 결성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과 함께하는 호주친구들(FCWA, Friends of Japanese Military 'Comfort Woman' in Australia)>의 코디네이터로 일하고 있다. 특히 송애나씨는 오헤른 할머니와 함께 워싱턴으로 가서 청문회 증인을 위한 코디네이터와 공식통역으로 활동하는 중이다.

수녀가 되고 싶었던 네덜란드 소녀

▲ 오헤른 할머니 소녀 시절
그동안 오헤른 할머니의 비극적 생애를 전해 들으면서 무슨 이야기를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될지 막막해지곤 했다. 그러나 슬픔은 극복되어야 하는 것, 극복되고 승화되어서 미래적 전망까지 담아내야하는 것이다. 무릇 '슬픔만한 거름'이 없기 때문이다.

그럼, 호주를 펑펑 울게 만든 호주국영 abc-TV 다큐멘터리 <오스트레일리안 스토리>의 '잊혀진 사람들(The Forgotten Ones)' 편의 가장 비극적인 대목부터 글로 옮겨본다. 이 다큐멘터리는 마가렛 파커가 자료를 조사하고 제작한 작품이다. 2001년 8월 30일 방영.

자바섬에서 목가적인 성장기를 보낸 얀 소녀의 어린 시절은 1942년 3월, 일본군 점령으로 인해서 급작스럽게 끝났다. 얀과 그녀의 가족은 일본군이 만든 수용소에 억류되었고, 억류 2년째인 1944년 그녀에게는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일이 발생했다.

인도네시아를 포함한 동남아지역에서 최후의 결전을 앞두고 있었던 일본군의 만행은 절정을 치닫고 있었다. 전쟁물자는 바닥나고, 언제 죽을지 모르는 전쟁터에서 지칠 대로 지친 병사들의 사기 또한 바닥을 기고 있었다.

일본군 지휘부는 병사들의 사기를 돋운다는 명목으로 식민지 국가에서 강제로 끌고 온 여성들을 위안부로 안겨주었다. 전쟁범죄였다. 그 전쟁범죄에 희생된 한국여성의 숫자가 어림잡아 20만 명을 넘었다. 포로수용소에 수감되었던 백인여성들도 예외가 될 수 없었다.

전쟁이 막바지로 치닫던 1944년 어느 날, 일본군은 자바섬에 갇혀있던 17세 이상의 모든 젊은 여자들은 수용소 건물에 줄 서 있으라는 명령을 내렸다. 장교들이 여성들에게 가더니 아래위로 쳐다보기 시작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위안부를 선발하는 과정이었다.

21살의 과년한 처녀였던 얀은 그 때까지 성에 대해서 아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 초등학교를 졸업한 다음 수녀가 되기 위해서 프란시스코 수녀회에서 양육되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다큐멘터리에 출연해서 "나는 그것에 대해 전혀 아는 게 없었습니다, 우리의 어머니들(생모와 수녀들)이 아무것도 말해주지 않았거든요(I knew nothing about it. Our mothers never told us anything)"라고 증언했다.

다음은 오헤른 할머니가 3개월 동안 밤낮없이 겪어야 했던 치욕스런 밤들을 울면서 증언한 다큐멘터리 내용 중에서 일부를 발췌하여 요약한 것이다.

▲ 2월 14일자 호주신문 <디 에이지> 1면에 보도된 오헤른 할머니 스토리
사무라이 칼에 순결을 유린당한 밤

"내 말은, 그때서야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깨달았다는 겁니다. 우리는 일본식 꽃 이름이 들어간 각자의 이름을 부여받았고, 문 입구마다 그 이름들이 핀으로 박혀 있었습니다. 제 일본식의 꽃 이름은 기억하지 못합니다. 그것을 알고 싶지도 않습니다. 그들은 우리를 하나씩 끌고 가기 시작했습니다. 잠시 후 나는 침대에서 들리는 비명을 들었습니다.

내 차례를 기다렸던 거죠. 그리고 커다랗고 뚱뚱한 대머리의 일본군 장교가 딱 버티고 서서 나를 쳐다보고 있었습니다. 히죽거리기까지 했지요. 나는 대항하려 했지만 그 일본군은 강압적으로 나를 끌고 침대로 갔습니다. 나는 말했죠. "절대 이런 짓은 할 수 없어요." 그러자 그가 "그래, 순순히 말을 듣지 않으면 죽여주마. 정말 죽이겠어!"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더니 그는 갑자기 칼을 뽑았습니다. 나는 무릎을 꿇었고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하느님을 아주 가까이에서 느꼈습니다. 나는 죽는 것이 두렵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나는 계속 기도를 했고 물론 그는 나를 죽일 의도가 없었습니다. 그는 나를 침대에 던지고 꼭 잡았습니다. 그리고 내 옷을 모두 찢어 버리고 가장 잔인하게 나를 강간했습니다. 나는 그가 멈추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 일은 정말로 너무나 끔찍한 일이었어요. 나는 고통이 그렇게 심하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습니다. 그러고 나서 그가 방을 나갔고 나는 완전히 충격에 빠졌습니다. 욕실에 가서 씻고 싶었습니다. 다 씻어 버리고 싶었어요. 그 부끄러움과 모든 더러운 것들을 말이죠. 그저 다 씻어 버리고 싶었을 뿐입니다.

내가 욕실에 갔을 때, 모든 다른 소녀들이 거기 있었습니다. 짐작하겠지만 완전히 히스테리 상태가 되어서 울부짖으며 그 더럽고 부끄러운 것들을 씻어 버리려 했습니다. 하루 밤 사이에, 우리는 젊음을 잃었습니다. 우리의 순결과 젊음을 잃은 것이지요.

우리는 정말로 불쌍한 젊은 소녀들이었을 뿐입니다. 그렇게 서로서로 껴안고 있었습니다. 그날 밤에 각자 몇 번이나 강간을 당했을까요? 물론 나는 그날 밤을 절대 잊을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무기력함을 느꼈습니다. 이런 일들이 그때부터 매일 밤 시작되려는 일들이었지요."

종전과 결혼, 그리고 침묵의 세월 50년

@BRI@더 이상 그 생지옥에서의 악몽을 재현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이쯤에서 오헤른 할머니의 남편 톰과 두 딸 아일린과 캐롤에게 어떤 방식으로 그 비극의 시간을 털어놓았는지 들어보자.

"리즈, 헤어티, 베르타, 마리, 알리와 그레이스 등은 함께 치욕을 당했던 친구들의 이름입니다. 우린 수용소로 다시 돌아가서 가족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어머니들에게 모든 걸 털어놓았습니다. 딱 한 번, 그후로는 아무도 그 얘기를 하지 않았습니다. 50년 동안의 침묵이 시작된 겁니다"

얀 처녀는 3개월 동안 치욕을 당하고 수용소로 돌아갔을 때도 수녀가 되겠다는 꿈을 버리지 않았다. 그래서 수용소를 방문한 신부에게 수녀가 될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부탁했다. 그러나 신부는 "얘야, 그런 상황을 겪었다면 내 생각엔 수녀가 되지 않는 것이 좋겠구나"라고 조언해주어 끝내 수녀의 꿈을 접어야 했다.

전쟁 후에 일본군 수용소에 있었던 모든 네덜란드 사람들은 본국으로 귀환했다. 그러나 얀 처녀는 영국군이었던 톰을 만나서 결혼하기 위해 영국으로 이주했고, 1960년에 가족 모두가 호주로 이민을 왔다.

이제 84세가 된 얀 오헤른 할머니는 5년 전에 세상을 떠난 남편 톰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회상한다. "하느님이 나에게 주신 최고의 은총은 바로 톰을 주신 것입니다. 그것은 전쟁 속의 아름다운 로맨스였습니다. 아주 멋진 경험이었지요"라고.

그녀의 회상은 다음과 같이 이어진다. "톰은 사랑스럽고 예의 바른 남자였습니다. 내가 톰에게 자바섬에서 겪은 일을 말했을 때, 톰에게는 그런 것이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는 나를 있는 그대로 사랑했습니다. 나는 더럽지도 않고 타락하지도 않았고 다른 사람과 다르지도 않았습니다. 적어도 톰의 눈에는 아니었어요."

그녀는 이어서 "내가 톰이랑 결혼했을 때 나는 집을 원했고, 남편을 원했으며 가족을 원했지만 섹스는 아니었어요. 그건 내가 하고 싶었던 마지막 일이었고 톰은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려야 했어요. 결혼 첫해는 정말 힘들었습니다. 나는 무려 4명의 아기를 유산했습니다. 결국 두 명의 아름다운 딸들을 얻었는데 바로 아일린과 캐롤입니다."

너무 힘들었던 딸들에게의 고백

▲ 호주전쟁기년관에 전시 중인 오헤른 할머니의 손수건. 1944년 2월 26일 함께 위안부가 됐던 네덜란드 출신 친구들의 이름을 수놓았다.
1992년 12월, 도쿄에서 일본 전쟁 범죄에 관한 국제 청문회가 열릴 예정이었다. 오헤른 할머니도 증인으로서 참석을 요청받았다. 하지만 그 이전에 가족에게 털어놓는 게 먼저였다. 도저히 말로는 할 수가 없어 오헤른 할머니는 편지를 활용했다. 다음은 그 편지를 전해 받은 딸들의 증언이다. 먼저 아일린의 얘기를 들어보자.

"어느날, 어머니가 제 남편의 가게에 와서 편지봉투를 하나 놓고 가셨습니다. 나중에 봉투를 열었는데 전쟁 동안 성노예로서 괴롭힘 당한 네덜란드 여인들의 충격적인 폭로를 다룬 헤드라인의 네덜란드 신문 기사 2개였습니다. 도무지 아무런 예상도 할 수 없었습니다. 왜 내게 이 기사를 읽으라고 주셨을까? 이게 다 무엇인가? 그러나 기사를 읽어감에 따라 내면에서부터의 분노를 느끼게 되었습니다. 그 느낌은 아직도 느낄 수 있습니다. 마음속에서 분노가 솟구쳐 올라왔습니다."

어머니가 쓴 30페이지 정도 분량의 수기를 읽은 캐롤의 증언도 가슴 아프긴 마찬가지다.

"어머니의 수기 노트 속에 모든 것이 다 있었습니다. 그 노트의 제목은 '강간 당한 자의 절규'였습니다. 그때 내가 느낀 것은 공포와 충격이었습니다. 어머니처럼 아름다운 분들에게도 이와 같은 끔찍한 일이 일어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아일린의 얘기를 조금 더 들어보자.

"어머니의 이야기를 읽은 후, 나는 어머니의 집으로 차를 몰았습니다. 그리고 내 팔로 어머니를 감싸 안고 울고 또 울었습니다. 나는 한마디 말도 할 수가 없었습니다. 하지 않았습니다. 아무 말도 안 했지만 그걸로 충분했어요. 그저 팔을 어머니에게 감싸 안고 있었을 뿐이었습니다."

어머니와 꽃에 얽힌 캐롤의 회상은 더욱 처연하다. 꽃을 좋아하지 않았던 어머니의 이상한 습성이 일본군들이 지어준 꽃 이름 때문이라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이 세상의 제아무리 아름다운 꽃도 오헤른 할머니에겐 불에 데인 자국(火印)일 뿐이었다.

"그 일은 철저하게 비밀로 간직되었어요. 몇 가지 이상한 것들이 있었는데 이를 테면 생일날이나 어머니의 날에 생일 선물로 무엇이 좋으냐고 물으면 어머니는 항상 꽃은 돈 낭비일 뿐이니, 꽃은 주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참 이해할 수가 없었지요. 모두가 꽃 선물 받기를 좋아하기 때문입니다."

"나는 죽지 않고 투쟁을 계속 할 것"

▲ 얀 오헤른 할머니가 15일(미국시간) 미 하원 외교위원회에서 증언하고 있다.
ⓒ AP=연합뉴스
송애나씨와 함께 유나이트 에어라인을 타고 미국으로 떠나던 지난 13일, 이미 비행기에 탑승한 오헤른 할머니와 전화가 연결됐다. 할머니는 이번이 첫 번째여서 파급효과가 클 것으로 예상되는 미 하원 청문회에 큰 기대를 걸고 있었다. 다음은 전화로 나눈 일문일답의 요약이다.

- 먼 길이고 고령이신데 건강상태는 어떠신지요?
"그동안 잘 준비해왔기 때문에 별다른 어려움이 없을 겁니다. 더욱이 일본에 영향력이 큰 미국에서, 그것도 의회 청문회에서 증언한다는 기대감에 아주 기분이 고조된 상태입니다. 지금 일본도 나만큼이나 긴장하고 있겠지요."

- 주로 어떤 증언을 하실 예정인지요?
"내가 겪고 들은 얘기를 총망라할 것입니다. 청문회장의 여건이 어떤지 모르지만 최선을 다해서 증언할 생각입니다. 미국 국회의원들과 국민들이 깜짝 놀랄 겁니다."

- 이번 청문회에 대해 일본의 반응과 대응은 어떻게 예상하시나요?
"일본은 치욕을 안고 살아가는 나라입니다. 마땅히 부끄러워해야 합니다. 그들은 우리를 위안부라고 불렀지만 사실은 '성적 노리개'였습니다. 정말 끔찍했지요.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잃어버린 겁니다. 일본정부의 공식적인 사과를 통해서 우리의 인간존엄성을 회복하고 일본의 도덕성도 회복해야 합니다. 거듭 일본에 촉구합니다. 이젠 가면을 벗어야 할 시간입니다. 시간이 없습니다. 할머니들이 자꾸 돌아가시기 때문입니다."

- 일본이 그런 측면에서 세월 가기만 기다리는 것 같습니다.
"맞는 얘기입니다. 그러나 나는 계속해서 싸울 것입니다. 일본인들은 우리 모두가 죽기를 기다리고 있지만, 나는 죽지 않을 것이며 아시아의 종군위안부들이 사과와 보상을 받을 때까지 투쟁을 계속할 것입니다. 일본은 정의의 심판을 받고 거듭 태어나야 합니다."

- 청문회에 임하면서 한국을 비롯한 위안부 출신 할머니들께 하고 싶은 말씀은 없는지요?
"왜 없겠습니까? 아직도 수치심 때문에 침묵하고 있는 할머니들은 하루 빨리 밖으로 나와야 합니다. 생생하게 다 증언해야 합니다. 그래야 전쟁의 참상이 반복되지 않습니다. 아울러 용기를 내신 위안부 출신 할머니들에게 감사한 마음이고 부디 건강하시기를 빕니다. 그래야 일본을 굴복시킬 수 있습니다."

- 이번에 청문회를 갖는 미국을 포함해서 국제사회에 하고 싶은 말씀이 있다면 해주십시오.
"60년도 넘는 세월이 흘렀습니다. 우리는 이미 용서했습니다. 다만 잊을 수 없을 뿐입니다. 그런데 일본정부의 태도를 보십시오. 국제사회가 나서서 규탄해야 합니다. 특히 일본과 친밀한 국가들인 미국과 호주 등이 적극적으로 개입해야 합니다. 그건 내정간섭이 아닙니다. 잘못된 역사를 청산하는 겁니다."

호주에서 열리는 '수요 집회'

▲ 오헤른 할머니와 함께 미 하원에서 증언한 이용수 할머니가 작년 7월외교통상부 앞에서 1인 시위를 벌이고 있다.
ⓒ 이철우
오는 3월 7일 오후 1시부터,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과 함께하는 호주친구들의 모임이 호주에서는 처음으로 한국, 대만, 호주 출신의 위안부 출신 할머니 세 분을 초청하여 시드니 시내 일본총영사관 앞에서 '수요집회'를 열 예정이다.

이 수요집회는 세계여성의 날 99주년(3월 8일)을 맞이하여 한국의 수요시위에 동참한다는 차원에서 FCWA가 주축이 되어 마련됐다. 이날 행사에서는 호주위안부 피해자 얀 오헤른 할머니와 한국의 길원옥 할머니, 대만의 수이 메이유 할머니 세 분이 연사로 나선다.

호주연방 상하원 의원들과 노조지도자 등도 연사로 동참할 계획인데, 이날 행사에서는 낸시 펠로시 미 하원 의장에게 보내는 서한 서명운동과 일본정부에게 공식사과와 정당한 배상을 요구하는 서한을 일본 총영사관 측에 전달할 예정이다.

한편 3월 7일 저녁 7시 한인회관에서는 한국에서 호주한인동포사회를 위해 특별히 제작한 동영상도 함께 관람한 후에 피해자 할머니들의 증언도 듣고 시낭송 등의 문화행사도 펼쳐진다고 한다.

행사준비를 위해서 동서분주하는 FCWA 박은덕 변호사는 이번 수요집회가 부끄러운 과거를 청산하는 일뿐만 아니라 현재도 계속되고 있는 성매매와 성적 유린 행위에 대한 경고일 수 있다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과거사에 얼룩진 일본의 만행을 엄정하게 규탄하면서, 현대사회에 만연하고 있는 성적 왜곡사태도 함께 바로잡아야 합니다. 역사는 단절되지 않고 끊임없이 반복되면서 흘러가기 때문입니다."

태그:#오헤른, #인터뷰, #위안부, #네덜란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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