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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MF라는 괴물은 다시는 생각조차도 하기 싫은 '고난의 유령'이다. 그렇지만 그 놈은 내게 있어 더욱 세상을 단단하게 살아가는 노하우를 익혀 주었다. 사진은 지난 2005년 3월 서울 남대문 시장.
ⓒ 오마이뉴스 남소연

사람은 불과 한 치 앞도 보지 못하는 '청맹과니(눈은 떠있어도 실제로는 앞을 보지 못하는 사람)'에 다름없다. 고로 10년 전만 하더라도 나는 지금의 내 처지를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물론 그때까지도 번듯한 내 집은 없었으되, 아무튼 당시의 나는 직장에서도 소득이 가장 많은 영업부장으로 잘 나가고 있던 때문이었다. 예나 지금이나 나는 나 자신의 판매실적에 따라 소득이 정해지는 철저한 능력급의 세일즈맨으로 생활하고 있다.

작년 국회에서 비정규직에 대한 어떤 개선 법안이 민주노동당의 반대에도 강제로 처리됐다. 하지만 기실 나 같은 처지의 입장에서 보자면 나에겐 하나도 해당이 되지 않는 속 빈 강정이기에 마치 빈집의 벽에 페인트칠만한 허울뿐이라는 생각이다.

@BRI@즉 나와 같은 '특수고용직'이란 형태의 비정규직 세일즈맨에겐 나를 고용하고 있는 직장에서조차도 그 '하찮은' 건강보험료마저도 수혜의 대상이 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어떤 때 우리 직원들끼리는 "우린 4대 보험의 수혜대상이 되는 외국인 노동자들보다도 못한 가시 부평초와도 같은 신세"라는 자조감을 씹곤 한다.

하여간 10년 전의 나는 비교적 돈을 잘 버는 영업사원이었던 까닭으로 승용차도 당시론 비교적 좋은 차에 멋들어진 양복으로 몸을 감싸며 꽤 잘 나갔던 부류 중의 하나였다.

그런데 지나고 나서야 후회지만 당시에 그같은 현실에 만족하고 더는 욕심을 내지 말았어야만 했었다. 하지만 나도 세속의 치부(致富) 관념이란 검은 물이 든 속인이었던 때문으로 그만 욕심을 내는 바람에 화를 자초하고야 말았다.

하루는 장모님이 찾아오시어 "집 앞의 슈퍼가 났는데 해 볼 생각이 없느냐"고 물으셨다. 순간 아이들이 더 크기 전에 집도 장만하자는 욕심이 발동하여 단숨에 달려가 계약을 체결하곤 문을 열었다.

슈퍼 운영한 지 얼마 되지 않아 급습한 IMF... 처참한 실패, 그리고 자살 결심

나는 밖에서 세일즈를 하여 벌고, 아내는 안에서 그같이 슈퍼를 하여 부창부수(夫唱婦隨)로서 돈을 버니 머지않아 우리 집에도 '불행 끝 행복 시작'의 화풍난양(和風暖陽 : 솔솔 부는 화창한 바람과 따스한 햇볕)한 좋은 날만이 만발할 줄 알았다. 하지만 그건 착각이었다. 그것도 너무나 큰….

슈퍼를 운영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아 급습한 IMF라는 '쓰나미'는 불과 1년도 지나지 않아 나를 빚쟁이들의 공격대상과 심각한 우울증 환자로 만들고야 말았다. 하루도 빠짐없이 새벽길을 열며 성실히 출근했고 비록 상품을 파는 세일즈맨이되 항상 정도(正道)의 길만을 가고자 노력했다.

더불어 이익만을 좇기보다는 내가 조금 손해를 보는 쪽으로 가닥을 잡는 순응과 수렴의 자세까지도 견지하고자 애쓴 나날이었다. 그렇지만 장사에서의 처참한 실패는 그 모든 걸 잃게 하고 까먹게 하는 단초에 부족함이 없었다.

몇 년을 지지부진으로 끌어갔지만 그러한 지속은 빚을 더 늘리는 구실밖에는 안 되었다. 전셋집까지 팔아 빚을 변제하고자 했지만 산 위에서 굴러 내려오는 듯한 신용카드와 사채 등의 이자 부담은 견딜 재간이 없었다. 빚 갚음에도 한계가 있었다.

'고생 끝에 하지만 반드시 낙은 있다'는 고진감래(苦盡甘來)의 교훈을 신봉하며 살았던 나의 믿음과 신앙도 깨졌다.

세 번의 자살 시도... '사즉생'의 계기로 신청한 '개인파산'

'나같이 무능한 놈은 죽어야 해!' 나는 자살을 결심했다.

하루는 만취하여 왼쪽 가슴을 과도로 찔렀다. 하지만 그 자살 기도는 실패했고 다음엔 대청호로 가서 물에 뛰어들었다. 하지만 그마저도 미수로 그쳤는데 자살의 망령은 여전히 내 주위를 맴돌았다.

당시의 내 상념은 참으로 한심하게도 온통 '어찌하면 고통 없이 빨리 죽을 것인가?!'에 대한 천착이었다. 누구처럼 인터넷에 들어가 약을 사 먹고 동반자살을 할까? 아님 부산에 가면 러시아제 소총을 살 수 있다던데 거길 가 볼까? 빌딩에 올라가 눈 딱 감고 아래로 뛰어내려? 등의 별별 조잡한 상상이 지배하면서 나는 서서히 무너지고 있었다.

설상가상으로 그즈음 직장을 그만두게 되자, 전(前) 직장의 사장은 자신의 창업공신이자 오늘날 자신의 부(富)를 축적하게 해 준 일등공신이었던 나를 음해하고 헐뜯는 작태까지 벌어졌다. 감탄고토(甘呑苦吐 :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다)의 비정하고 더러운 인간들이 싫었다. 아울러 가족도, 친구도 지인들도 매한가지로.

그렇게 여전히 자살의 음모를 모색하던 어느 날 문뜩 떠오른 또 하나의 어리석은 망상은 바로 보험을 들고 죽자는 결론이었다. 보험 영업사원인 후배를 불러 생명보험에 가입했다. '못난 나는 죽지만 나를 만난 죄로 지금껏 고생만한 당신은 이 돈으로 자식들하고 잘 살구려….'

며칠 뒤엔 승용차를 몰고 고향으로 가 선친의 산소에 성묘를 했다. '아버지, 저도 오늘은 아버지 곁으로 갑니다….' 눈물이 분수처럼 솟았지만 미리 준비해 간 소주 세 병과 맥주 두 병은 맹물처럼 술술 잘 넘어갔다.

그렇게 만취한 상태임에도 가드레일을 들이박고 죽을 요량으로 경부고속도로에 진입했다. 하지만 술에 취한 나와 덩달아 함께 지그재그로 춤을 추는 내 차를 뒤에서 본 운전자들의 신고로 적발되었다. 그래서 어설픈 자살은 또 실패했다.

하여 난생 처음으로 법원에까지 출석하여 벌금 300만원과 1년간 운전면허 정지의 부끄러운 처분까지도 받았음은 물론이다.

당시에도 빚쟁이들의 아갈잡이(소리를 지르지 못하도록 입을 헝겊이나 솜 따위로 틀어막는 짓)는 여전했는데, 아무튼 그같이 법원에 가게 됨에 따라 나는 개인파산을 고려하게 되는 어떤 사즉생(死則生)의 계기를 만나게 되었다. 처, 자식과 다시 살려면 그 길밖에는 달리 선택의 여지도 없었다.

'고난의 강' 건너온 지금의 나 '이젠 살아야겠다!'

지루한 심문과 심사 끝에 3년 전 가을에 나는 마침내 법원으로부터 개인파산과 면책을 받아낼 수 있었다. 이어 딸이 수시모집에서 대학에 합격하는 쾌거까지 일궈내면서 나는 비로소 '이젠 살아야겠다!'는 강렬한 삶의 의지가 활화산처럼 용솟음쳤다.

IMF라는 괴물은 나를 처참하게 할퀴었고, 세 번씩이나 자살을 결심하게 한 요물이었다. 하지만 IMF라는 십 년의 고난의 강을 건너온 지금, 나는 그 누구보다도 강인하며 더 열심히 사는 필부가 되었다.

일전 뉴스에서 우리 국민의 상당수가 미래에 대한 희망이 보이지 않기 때문에 자살하고 싶은 충동을 느끼는 경우도 많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런데 내가 실제 경험해 보니 사는 것보다 스스로 죽는다는 게 더 힘이 들더라는 사실이다.

부처님께서 이르시길 우리네 인생은 어차피 고해(苦海)라고 하셨다. 그런데도 인간은 누구라도 자신이 처한 고생과 역경이 가장 큰 줄 착각하게 마련이다. 하지만 역시나 사노라면 반드시 좋은 날은 다시 온다는 것이다.

나는 지금도 여전히 어려운 처지다. 그러나 나의 현재의 삶은 명실상부한 '보너스'란 생각으로 오늘도 열심히, 그리고 강력한 추진력을 바탕으로 성실하게 살고 있다.

IMF라는 괴물은 다시는 생각조차도 하기 싫은 '고난의 유령'이다. 그렇지만 그 놈은 내게 있어 더욱 세상을 단단하게 살아가는 노하우를 익혀 주었다. 아울러 가족을 더 튼실하게 사랑하라는 어떤 교훈까지도 전해준 반면교사와도 같은 놈이기에 마냥 거부만 할 수도 없는 그런 존재다.

나의 아군이자 버팀목 '아내와 아이들', 내 가족을 위하여...

내가 겪은 지난 IMF 십 년은 구절양장(九折羊腸 : 아홉 번 꼬부라진 양의 창자)의 처참한 형극이자 가시밭길의 연속이었다. 그렇지만 나는 지금도 살아 있다. 그런데 지금의 나를 살아 있게 만든 요체는 바로 여전히 나의 아군이자 버팀목이 돼주고 있는 '아내와 아이들'이다.

작년에 뜻깊은 은혼식을 맞았으되 돈이 없어 여행조차도 함께 못 한 아내에겐 지금 역시도 큼직한 미안함이 어깨까지 짓누른다. 하지만 주식도 바닥까지 내려오면 반드시 반등(反騰)한다고 한다. 지금의 내 처지가 그러하다고 생각한다.

올해는 또한 59년생 돼지해인 나의 연도이다. 고로 올해는 반드시 현재의 빈곤의 벽을 부술 참이다. 그래서 오늘도 나는 새벽부터 출근했다. 더욱 부지런을 떨어 돈을 더 벌고 더불어 사랑하는 내 가족에게 더 잘 먹이고 더 잘 입히고자 한껏 노력할 작정이다.

덧붙이는 글 | <내가 겪은 IMF 10년> 응모글입니다.


태그:#IMF, #IMF 괴물, #특수고용직, #슈퍼, #고난의 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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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서: [초경서반]&[사자성어는 인생 플랫폼]&[사자성어를 알면 성공이 보인다]&[경비원 홍키호테] 저자 / ▣ 대전자원봉사센터 기자단 단장 ▣ 月刊 [청풍] 편집위원 ▣ 대전시청 명예기자 ▣ [중도일보] 칼럼니스트 ▣ 한국해외문화협회 감사 / ▣ 한남대학교 경영대학원 최고경영자과정(CEO) 수강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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