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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6년 5월17일 남방한계선 안쪽 장단역 부근의 녹슨 철마.
ⓒ 한국철도공사
도라산역 북쪽 통문 앞에는 선로건설당시 통일과 평화를 기원하는 뜻에서 침목을 기증한 기증자의 명패들이 나란히 깔려 있었다. ‘통일이여 하루 빨리, 서울에서 나의 고향 신의주까지, 통일호 타고 평양까지’ 등의 문구가 가슴을 뭉클하게 했다.

쨍쨍한 햇살을 받으며 멀티풀(선로점검 작업차량)을 앞세우고 선로의 이음새와 궤간을 점검하며 도라산 북쪽을 향해 갔다. 멀리 육중한 통문이 우리 일행을 가로막고 있었다. 반세기 동안 닫혀졌던 통문을 보는 순간 왠지 마음이 아려왔다.

북쪽의 눈보라가 남쪽으로 몰려오고 남쪽의 진달래가 북으로 진군하는데 하늘과 땅 사이에서 왜 사람만이 오고가지 못하는 것일까.

통문 안쪽 나지막한 능선 저 너머가 북녘 땅이라 생각하니 마음이 먼저 달음질쳐 갔다. 도시락 싸들고 저 쑥국길을 따라 걸어서도 반나절인데 반세기 동안 생사를 모르고 살아가는 실향민의 마음은 어떠했을까.

통문 너머로 '훅' 불어오는 진한 황토 흙 냄새를 맡으며 나는 눈가는 곳까지 멀리 북녘 땅을 바라보았다. 아쉽게도 북방한계선까지 들어가지는 못했지만 귀하게 찍어온 녹슨 철마를 보는 순간 왠지 마음 한쪽이 찡해왔다.

이 철마의 주인공(한준기 기관사)과 얽힌, 전쟁당시의 사연을 익히 알고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나 역시 철마의 주인공으로서 오랜 세월동안 철길을 달려왔기 때문이다. 한 번쯤은 통일호 열차를 끌고 북녘 땅을 씽씽 달려보는 것이 나의 오랜 꿈이기도 했기에 이날 녹슨 철마를 보는 나의 마음은 남달랐다.

50년 12월 31일 장단역에서 무차별 기관단총 난사로 절명한 증기기관차. 외마디 단말마와 함께 풀밭에 털썩 주저앉은 지 반세기, 그날 녹슨 기관차는 나에게 마치 무슨 말인가를 건네는 것 같았다. 철마가 나에게 했던 무언의 독백을 받아 적어 보았다.

▲ 남북철도연결 궤간검측 모습.
ⓒ 한국철도공사
1천 440마력
최대 시속 80㎞ 마터형 증기기관차,
이것이 내 빛나던 이력이었다

검푸른 산맥 흔들어 깨우며
평강고원으로 신의주로 격동의 땅 휘몰아쳐 가던,
이것이 내 열렬했던 삶이었다

포연 자욱한 전선 우렁차게 달리다가
빗발치던 총탄에 한순간 거꾸러지던
1950년 12월 장단역 졸(卒), 이것이 내 슬픈 임종이었다

딱딱하게 굳은 외마디 비명,
굳어진 채로 반. 세. 기

잡초 수북한 장단 벌에 누워
뼈마디 짓무르도록 한 하늘만 바라보았다
하얗게 탈골된 기다림,
녹물 뚝뚝 흘리며 한 생각만 붉혀왔다

한 떼의 새들이 남진하던 하늘
한 무리의 진달래 북상하던 능선

망초 꽃 하얗게 피고 지던 산하
사무치게 바라보다 이 봄도 흐득 흐득
산화된 관절 꺾으며 서럽게 운다

세찬 물살 가르며 연어 떼 돌아가던 모천(母川)
골짝마다 눈보라 휘몰아치던 머나 먼 북관 땅
끝내 내가 닿아야 할 산맥이다

불모의 경계지에 꽃물 흥건히 젖어들게 하라 오늘은
지상의 모든 그리움들 장단 벌로 집결시키라

이제 나를 일어서게 하라
끊어진 소식 성성한 백발 단숨에 들쳐업고
이 산하를 질주하게 하라

녹슨 은륜 푸르게 갈아
이 강산을 우렁우렁 달리게 하라
두 줄기 혈맥(血脈) 미친 듯이 부둥켜안고 오늘은
목 놓아 울게 하라

막혔던 눈물길 이제는 흐르게 하라
(자작시 '철마는 달리고 싶다, 2006 -녹슨 철마의 꿈-)


이제 통일은 꿈이 아니라 우리시대에 반드시 이루어야할 현실이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남북 철도 연결 시험운행은 통일의 첫 신호탄임이 분명하다고 생각한다. 또한 혈맥을 잇는 일은 우리민족의 아픈 이산(離散)의 한을 풀어주는 것이기도 하다.

무엇보다 가슴 뛰는 일은 우리민족의 애환이 서린 잃어버린 땅, 대륙 저 너머로 우리 철마가 우렁차게 달릴 수 있다는 것이다. 협소한 반도를 벗어나 시베리아 설원을 가로지르고, 외몽고 초원지대를 횡단해 마침내 유라시아 대륙 너머 베를린, 파리, 런던까지의 꿈의 기차여행을 할 수 있다는 것은 분명 가슴 벅찬 상상이다.

시베리아 원자재가 남진하고 부산항의 물자가 북진하는 국운상승의 그 첫 단초가 바로 남북철도연결 사업이다. 남북철도가 성공적으로 연결되기 위해서 아직 넘어야 할 산은 많다. 그러나 시작이 반이라는 말을 나는 믿는다.

머잖아 아이들 손을 잡고 평양으로, 대동강변으로 툭툭, 꽃망울 터지는 기쁨으로 나들이 갈 날 오리라는 것을 믿는다. 지도책을 펼치고 아슴아슴 손가락을 짚으며 성급한 통일여행을 떠나본다.

덧붙이는 글 | 김만년 기자는 한국철도공사 홍보실에 근무하고 있으며 월간문학(시와 수필)으로 등단했습니다. 

지난 5월 17일 남북철도연결 시험운행 사전점검차 한국철도공사 이철 사장과 관계자, 내외신 기자단 30여명과 함께 도라산역 북쪽 남방 한계선 부근을 다녀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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