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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계천전태일기념관건립추진위원회와 <오마이뉴스>는 7월 21일부터 <전태일 거리, 시민의 힘으로 만들자> 캠페인(기사 하단 참조)을 진행합니다. 오는 9월 15일까지 진행될 이번 행사 기간 동안 고 전태일 열사에 대한 릴레이 기고 및 인터뷰 등이 이어질 예정입니다. 그 여섯번째로 홍양표 경북대 명예교수의 기고글을 싣습니다. 이 글은 민주화를위한전국교수협의회(민교협) 내부적으로 회원 교수들에게 발송되었던 글이며, 민교협과 홍 교수의 양해를 구해 오마이뉴스에 싣습니다. <편집자주>

 


청계천 맑은 냇물이 서울 한복판을 다시 흐르게 되었고 그 옆 평화시장 주변에 '전태일 거리'가 펼쳐진다고 합니다. 앞의 사건은 환경사업으로 재정만 있으면 누구나 할 수 있는 큰 역사(役事)지만 뒤의 사업은 세상이 달라져야 할 수 있는 혁명적·역사적(歷史的) 사건입니다.

청계천 복귀는 덮었다 다시 뜯어내는 되돌아감이지만 전태일 거리는 오랜 동안 끈질기게 버티며 억압해 온 권위와 독재의 정권을 시민과 너무도 소외되어 온 노동자의 힘으로 무너뜨린 진정한 민주혁명의 산물입니다.

많은 피도 흘렸고 많은 생명이 희생되었습니다. 세월이 흘러 이제는 민주화와 함께 노동자의 자유, 평등이 크게 향상된 오늘을 맞이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사회혁명과 정치혁명을 이루어 내기 위해 생명까지 희생한 선구자들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됩니다.

▲ '평화시장 피복제품상 종업원 근로개선 진정서'에서 전태일 열사가 써놓은 글.
ⓒ 전태일 기념사업회

전태일 거리까지 흐른 피, 잊어서는 안 됩니다

정말 민주화와 노동자의 인권회복, 특히 후자는 민주화 후에도 지속적인 희생과 노력이 있을 때만 진전되는 너무도 어려운 과제였습니다. 한국의 노동운동은 '공산당', '빨갱이'와 관련시키는 그릇된 레드 콤플렉스, '왜곡된 반공'으로 억압되어 왔기에 신변의 위협을 각오하면서 참여해야 할 공포의 영역에 속하기도 했습니다. 위대한 민족주의자 김구, 사회민주주의자 여운형 등이 이런 희생자들입니다.

전태일 열사! 그는 남대문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남대문 시장 재단사 보조인 이른바 '시다'로 노동에 뛰어들어 1960~70년대 권위주의 체제하에서 생존의 위기마저 느낄 정도로 열악한 노동조건을 개선하고 노동자의 지위를 향상하기 위해 생명을 바쳐 헌신하다가 산화한 선구자 중 선구자입니다.

그는 '바보회'와 '삼동친목회'를 조직하여 근로자들 간의 친목과 근로조건 개선을 위해, '근로기준법'의 제정과 실현을 위해 관계기관에 호소하며 시위를 기도하다가 끝내는 1970년 11월 '근로기준법 화형식'과 함께 분신 산화했습니다.

당시 그의 운동은 정말 '계란으로 바위치기'였으며 그의 선구자적 위대함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소위 민주화 이후에 정치 사회 노동계에서 많은 잘못을 봅니다. 그러나 민주화와 노동자의 인권 및 지위 향상은 인간의 본성이며 자연의 법칙이며, 신이 부여한 기본권이며, 역사가 가는 길입니다.

그러므로 부분적 잘못이 있다고 노동의 민주화를 포함한 민주화 자체를 부정할 수는 없습니다. 민주주의 기본 체제와 자유 평등의 역사 방향을 격하하거나 부정할 수는 없습니다. 이는 마치 의사가 잘못을 저질렀다고 병원무용론을 주장한다든가, 운동을 과하게 하여 병이 악화되었다고 운동무용을 외쳐서는 안 되는 것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편파적 독선이나 진짜 바보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자유 평등과 함께 박애, 아니 더 우리에게 친근하게 다가오는 사랑은 민주주의 나아가 인생과 세계의 영원한 최고 이념이며 원리이고 도덕입니다. 좌와 우, 진보와 보수, 자유민주주의와 사회민주주의, 정의와 사랑은 양자택일이나 흑백논리적 배타가 아닙니다.

우리는 편파적 독선이나 진짜 바보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저는 사랑의 철학과 실천을 가장 사랑하는 자, 구태여 편을 말하라면 '진리의 편에 서는 사람'이 되려 합니다. 상황에 따라 어느 한 편을 택할 수는 있으나 어느 한편에 갇힐 수는 없습니다. 그 기준이라 할 현상은 고정적일 수 없고 항상 변합니다.

▲ 전태일 열사 1주기 추도식.
ⓒ 전태일 기념사업회

그러나 그 어떤 상황에서도 선구자를 잊지 맙시다.

노동조합이 곳곳에 설립되었고 노동자의 지위는 크게 향상되었습니다. 그가 생명을 던져 성취하려 한 근로기준법은 2003년 9월에야 제정되어 노동계약은 근로자와 사용자가 "동등한 지위에서 자유의사에 의하여" 체결하게 되었고, 주44시간 근로가 보장되었고, 그래서 결국은 "국가경제, 사회의 균형발전"을 가져올 수 있게 되었습니다.

역사를 바꾼 희생자, '전태일 거리'를 아름답고 의미 있게 만드는 일에 참여합시다. 정부나 재벌에 의존하여 불편한 부담을 지기보다는 민주교수, 노동자 등 약한 서민들의 힘을 모아서 아름답게 만들어 봅시다. 동판 블록 6천개가 깔린 '전태일 거리'를 걸어보는 그 환희와 감격은 생각만 해도 가슴이 벅차오릅니다.

2005년 8월 8일
경북대학교 명예교수 홍양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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