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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0년 11월 5일 서울 영등포구 문래동 문래공원에 세워진 박정희 흉상을 철거한 김용삼씨(왼쪽)와 2001년 11월 23일 서울 종로구 탑골공원 입구에 박정희 친필로 만들어진 '삼일문' 현판을 철거한 곽태영씨.
ⓒ 오마이뉴스 권우성

"사식 넣어주고 가겠다."(김용삼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사업회 이사·55)
"넣지 말라. 편하게 지내기 위해 여기 온 게 아니다. 유치장 밥을 먹겠다."(양수철 전 민족문제연구소 충남지부장·46)


지난 11일 오전 10시경, 충남 예산경찰서 유치장에서 박정희 전 대통령(이하 박정희) 친필 현판과 동상을 강제 철거했던 세 사람이 만나 나눈 대화이다.

윤봉길 의사 사당인 충의사에 걸린 박정희 전 대통령의 친필 현판을 떼어내 구속된 양수철씨를 지난 2000년 서울 영등포 문래공원의 박정희 동상을 강제 철거한 김용삼씨와 지난 2001년 종로 탑골공원의 박정희 친필 현판을 떼어낸 곽태영씨가 면회한 것이다.

김용삼씨는 이날 "박정희 현판을 떼어낸 것은 민족정기를 높인 거사"라고 양씨를 격려했다고 한다. 또 김씨는 "(영장 실질심사 도중 판사가 양수철씨에게) '당신 집안의 현판을 떼어냈다면 분노하지 않겠는가'라고 묻자 양씨는 '내 집안 사람일지라도 친일 반역자가 쓴 현판이라면 내 손으로 떼어냈을 것'이라고 말했다고 나에게 들려주었다"고 전했다.

곽씨는 "윤봉길 의사 사당에 붙어있는 박정희의 현판을 떼어낸 양수철 동지를 구속하라고 요구한 문화재청장과 정부당국에 항의한다"며 "독립운동가의 뜻을 기리고 민족정기를 바로세우기 위한 박정희 청산작업은 계속될 것이며, 훗날 역사는 정부와 사법당국의 반역사적 태도를 평가할 것"이라고 양씨에 대한 구속영장 발부 사실을 비판했다.

칠순의 민족운동가 곽태영 "충의사 현판은 김구 선생 글로"

▲ 2001년 11월 23일 새벽 일본군 장교 출신인 박정희가 쓴 '삼일문' 현판이 곽태영씨 일행에 의해 철거 된 뒤 '독립선언문'의 글씨를 모아 만들어진 새로운 현판이 붙어있는 탑골공원 입구 '삼일문'.
ⓒ 오마이뉴스 권우성
"탑골공원에서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다 일본 헌병에 의해 죽은 후손 10여명이 나를 찾아왔다. 유족들은 왜군장교 박정희의 현판을 떼어내라고 김영삼·김대중 등 역대정권에 탄원서와 진정서를 냈지만 묵살 당했다면서 '박정희 현판을 떼어내주어서 눈을 감고 죽게 됐다'고 눈물을 흘렸다."

양씨를 면회한 다음날인 지난 토요일(12일), 탑골공원을 찾은 곽태영씨가 들려준 일화 한토막이다. 그는 탑골공원의 박정희 친필 현판 '삼일문'을 떼어낸 뒤 광화문의 박정희 친필 현판을 떼어내기 위해 10여 차례 현장 답사했다고 밝히면서 "정부가 현판을 바꾸겠다고 해 기다리고 있다"고 말했다.

그가 떼어낸 탑골공원 현판 자리에는 '3.1 독립선언문'에서 채자(採字)한 '삼일문'이 붙어 있다. 그는 이 또한 못마땅하다. 당시 독립선언문을 작성한 육당 최남선이 후일 변절해 총독부 중추원 참의를 지내는 등 친일에 앞장섰기 때문이다. 그는 "세상 온 천지가 친일잔재로 얼룩져 민족정기가 뿌리내릴 수 없는 형국"이라며 노기(老氣)를 터트렸다.

열 아홉 청년 시절, 백범 묘소에서 암살범 처단을 다짐했던 그는 백범독서회 회장을 지내던 1965년 안두희를 없애려고 시도했지만 실패했다. 안두희가 비참한 최후를 맞고 사라지자 박정희기념관건립반대 국민연대 상임대표와 사월혁명회 공동의장을 맡아 박정희의 친일잔재와 유신독재 청산운동에 전념했다.

그는 지난 2002년 4월 19일 혈서를 썼다. 김대중 정부의 박정희 기념관 건립추진 중단을 요구하며 "독립군 학살범의 기념관을 지어주는 것은 매국노 이완용의 후계자가 되는 것"이라며 규탄했다. 이러한 노력에 의해 상암동의 박정희기념관 건립추진이 무산됐다.

남은 여생을 박정희 잔재청산에 바쁜 칠순의 민족운동가. 그는 박정희가 남긴 구호처럼 친일 및 유신독재 잔재 청산에 '중단 없이 전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고양 시민들이 권율 장군의 사당인 '충장사'에 걸린 박정희의 친필 현판을 철거하라고 시에 요구한 것은 당연한 일"이라며 "독립군을 때려잡고 군사쿠데타를 일으킨 왜군장교가 남긴 잔재를 문화재라며 양수철 동지를 구속하라고 요청한 문화재청의 한심한 태도를 규탄한다"고 항의했다.

그는 "양수철 동지의 박정희 현판 철거는 겨레의 정의로운 정신을 앙양한 것이며 민족정기를 드높인 일"이라며 조속한 석방을 촉구했다. 특히 "박정희 대신 김구 선생의 글을 채자해 충의사 현판에 붙이는 것이 윤봉길 의사의 뜻을 더욱 살리는 일이며 일부 유족들도 동의하고 있다"고 말했다.

해병대 출신 김용삼 "5.16혁명 시발지 아닌 군사쿠데타 발생지로 바꿔야"

▲ 2000년 11월 5일 서울 영등포구 문래동 문래공원에 세워진 박정희 흉상을 철거한 김용삼씨가 끌어내려졌다가 다시 세워진 흉상을 바라보고 있다.
ⓒ 오마이뉴스 권우성
"뿌리깊은 나무는 바람에 아니 흔들리나니 차마 부정, 불의, 무능의 천지를 볼 수 없었다. 나라를 구하라는 일편단심, 침착, 용단, 과감, 결연히 이곳에 칼을 뽑아 창공을 향하여 성화를 높이 들다. 1966. 7. 7"

5.16쿠데타의 지휘부였던 6관구사령부 터인 서울 영등포 문래공원에는 군인 박정희의 동상이 그대로 서 있다. 동상 앞면에는 '5.16혁명의 발상지'라는 한자가, 뒷면에는 월탄 박종화가 박정희를 극찬한 내용이 새겨 있다. 영등포구청이 일장기에 싸여 끌어내려졌던 박정희의 동상을 원래 자리로 복원한 것이다.

영등포구청은 박정희 동상의 접근을 막기 위해 센서 장치를 하고 1m40cm∼1m50cm 높이의 스테인리스 울타리를 한 겹 더 쳤다. 달라진 게 있다면 철거 당시 망치가 내려쳐 흠이 간 콧잔등뿐이다.

12일 문래공원을 다시 찾은 김용삼씨는 동상을 완전히 부수지 못한 것을 후회했다. 당시 철거된 박정희 동상은 홍익대박물관에 전시하기로 하고 이 대학에 넘겼으나 약속이 지켜지지 않았다. 박정희 동상은 이 대학 최기원 교수가 만들었다.

그는 동상을 철거하지 않고 그대로 두어도 좋다고 말했다. 단 명칭은 '박정희 군사쿠데타 시발지'로 명칭을 바꾸고, 군사쿠데타로 인한 민족의 비극에 대한 안내문을 부착해 후세들이 교훈을 얻도록 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그는 "박정희가 남긴 것은 문화재가 아니라 민족반역자의 표식일 뿐"이라고 규정했다.

▲ 김용삼씨(오른쪽)와 곽태영씨가 문래공원에 설치된 박정희 흉상을 살펴보고 있다.
ⓒ 오마이뉴스 권우성
그는 박정희는 정권유지를 위해 인혁당 사건 등을 일으킨 반인륜 범죄자라고 규정했다. 특히 민족반역행위는 공소시효가 배제되어야 한다며 다음과 같은 프랑스의 사례를 강조했다.

"팡테옹 묘역은 프랑스의 국립묘지로 미라보 백작은 프랑스 대혁명을 이끈 업적이 인정돼 1791년 이곳에 최초로 안장됐다. 그러나 그가 묻힌지 2년 뒤, 혁명이 실패할 경우를 대비해 루이 왕정과 결탁한 비밀문서가 발견되면서 그의 유골은 사형수 공동묘지로 가차없이 추방됐다. 프랑스의 자유와 희망, 자존심이 어디서 나오는지 알게 하는 대목이다."

해병대 출신의 파월 장병으로 반공의식이 투철했던 김용삼씨가 민족운동에 뛰어든 것은 역사의 진실 때문이었다. 그는 "역사의 진실이 가려져 있기 때문에 김완섭, 한승조, 조갑제, 지만원 등 친일 극우 세력이 날뛰는 것"이라며 "만주군 하급 장교 출신인 박정희를 존경하는 풍토가 청산되지 않는 한 일본의 한국에 대한 업신여김과 망언은 끊이지 않을 것"이라고 진단했다.

한편 양수철씨의 무료 변론을 맡은 남현우(45·민변 대전·충청지부 부회장) 변호사는 "토요일(12일)은 법원이 쉬기 때문에 14일 오전에 구속적부심을 접수시킬 계획"이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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