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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한국 외교부가 한일협정 관련 문서를 공개하면서 한일간 과거사 청산에 대한 문제가 본격 제기되고 있습니다. 이런 가운데 국제법 전문가인 이장희 한국외대 법학과 교수가 관련 글을 보내왔습니다. 이 교수는 이 글에서 "역사를 바로세운다는 차원에서 개인피해자 추가배상은 물론이고 추가 외교문서 공개를 통해 한일협정의 전면개정을 일본정부에 제기해야 할 것"이라고 역설했습니다... 편집자 주

▲ 1965년 '한일협정'에 서명하는 박정희 대통령. 왼쪽부터 정일권 총리, 박 대통령, 이동원 외무장관, 김동조 주일대사.

1965년 한일협정 외교문서가 40년만에 공개됐다. 보통 외교문서는 30년이 지나면 공개되는 것이 관례인데 너무 늦은 감이 있다. 공개시점이 태평양전쟁과 일제식민지 피해자가 거의 생존하지 않은 상황이라 더욱 그러하다. 그리고 공개도 자발적으로 한 것이 아니다. 서울행정법원에 정보청구공개소송을 한 시민단체가 1심에서 승소하자 2심 소송에서 승산이 없다고 판단한 외교부가 한일협정 외교문서를 전격적으로 17일 공개한 것이다.

그러나 공개의 파장이 한국과 일본 양국에 모두 간단치 않다. 한일 양정부는 서로 불똥이 더 많이 튈까 신경전이다. 공개된 외교문서의 내용조차도 요구의 핵심대상인 개인청구권의 근거가 모두 빠졌다. 다시 말해 공개된 외교문서의 내용은 매우 부실하고 부도덕하고 불투명하기 짝이 없다.

연합군 최고사령관의 주선으로 개최된 한일회담은 1951년 10월 20일 예비회담을 필두로 8번의 회담과 14년의 긴협상 끝에 타결되었다. 5차까지는 역사인식과 국제법적 논리에 따라 진행되었지만 6차에서 8차까지는 정치적 흥정으로 타결되었다. 군사정변으로 집권한 박정희는 미국측의 지지와 정권유지비로 경제개발을 위한 정치적 자금이 필요했고, 그래서 일본의 과거사 범죄를 면죄하는 문서에 합의하고 말았다.

당시 일본의 이께다 등 패전 이전의 군국주의와 국수주의 맥을 이어온 일본의 자민당세력은 까다로운 이승만보다는 친일정권인 박정희를 선호했다. 게다가 당시 일본의 외환보유고가 너무 많아 해외투자할 필요성을 절감한 데다가 국내임금이 너무 비싸 일본의 사양기업과 공해기업의 해외진출은 불가피한 상황이었다. 한편 미국은 월남전에 한국군 파병을 위해 한일간 조기 국교정상화를 통해 동북아에서 반공유대전선의 구축을 절실하게 필요로 했다.

당시 한국과 일본의 배경

이러한 체결배경을 기초로 한국정부는 미국의 압력과 한일협정 성사라는 정치적 목적달성에 집착해 과거사인식과 일제피해자 개인청구권문제를 소홀하게 다루었다. 한국은 징용으로 끌러간 사람들이 받지 못한 노임의 미수금과 받지 못한 연금부분을 적극적으로 처리하지 못했다.

특히 한일협정협상 제7차 회의록에 따르면, 일본이 "향후 청구권문제 분쟁예방을 위해 연구가 필요하다"고 했음에도 한국정부는 "협상타결로 개인청구권이 소멸되었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6차 회담 자료에 따르면 정부는 징병, 징용 피해자 103만 2684명(생존 93만81명, 사망 7만7603명, 부상 2만5000명)에 대해 총3억6400만 달러의 피해보상을 일본에 요구했다.

그러나 실제보상에선 사망자 8522명의 유족에게 30만원(쌀값기준: 현재 가치로 321만원/ 80kg 쌀 한가마 당시 2만원/ 현재 1가마 21만원)씩을 주었을 뿐이다. 이것은 무상청구권자금 중 단지 9.7%에 불과했다. 뿐만 아니라 한일협상에서 일제과거사 청산에 대한 불법시인을 명백하게 문서로 받아내지 못한 전체협정과, 독도영유권과 관련하여 평화선을 철폐한 한일어업협정 등은 일제과거사청산 및 독도분쟁의 불씨를 현재까지 남겼다.

한편 일본은 피징용자 명단, 숫자 등 강제동원에 대한 피해자 자료를 제대로 제시하지도 않고, 피해자 생사확인, 사망자 유해 발굴 문제, 위안부 및 원폭피해자, 징용사할린 동포문제도 언급하지 않았다. 나아가 일제식민지침탈에 대한 공식사과와 손해배상을 회피했다. 일본은 한국에 남겨둔 일본인재산권을 근거로 오히려 역손해보상을 요구하고, '청구권'이라는 용어 대신에 한국에 대한 '경제협력자금' 및 '독립 축하금'의 규정을 삽입하려고 했다.

다시 말해 피해보상과 식민지지배를 연결하는 것을 철저하게 거부한 것이다. 1965년 일본 외무성에서 열린 청구권 및 경제협력위원회 제6차 회의에서 니시야마 대표는 "우리측의 제공은 배상과 같이 의무적으로 주는 것이 아니라 경제협력이라는 기본적 사고를 갖고 있다"고 말했다. 특히 일본은 청구권협정에 대한 협상조건으로 독도문제를 걸고 넘어졌다. 그래서 김-오희라 메모에서 독도 폭파론까지 나온 것이다.

이 한일협정으로 우리 정부는 이듬해인 1966년부터 10년에 걸쳐 무상자금 3억 달러와 유상자금 2억 달러, 상업차관 3억 달러 등 도합 8억달러를 받았다. 이번 공개된 문서는 이 때 받은 자금이 애초부터 일제 개인 피해자 보상이 아닌 경제개발에 집중 투자할 계획이었음을 보여준다.

또 정부가 받은 자금의 대부분은 원자재와 자본재였다. 그러나 유상, 무상 등의 대부분의 자금이 포항제철 및 고속도로 건설 등 경제개발에 사용된 것을 반드시 부정적으로만 볼 수는 없다. 다만 이 무상 청구권자금의 성격이 개인피해 희생에 대한 보상액이니 만큼 정부가 추후라도 반드시 이에 대한 적절한 보상은 있어야 한다고 본다.

부실과 불투명, 부도덕의 혼재

▲ 6.3사태 당시 거리로 나와 한일협정 조인 반대를 외치는 시민과 대학생들.
이번 공개된 외교문서는 부실과 불투명과 부도덕한 면이 혼재되어 있고, 이에 대한 책임은 한일 양정부에 모두 있다 하겠다. 문제는 향후 이 개인청구권문제에 대한 법리적 논쟁과 현실적 해결 방안이라는 문제가 현안문제로 대두된다.

우선 법리적으로는 한-일 청구권협정에 의해 최종적으로 소멸한 것은 국가의 외교적 보호권일 뿐, 국가가 개인의 청구권까지 포기할 수는 없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개인의 청구권은 유효하다.

한일 청구권협정 제2조 3항에 한일양국이 국가 및 국민의 권리를 포기한다는 의미의 명백한 어구가 있다고 하더라도 국가의 권리에 관해서는 자신의 권리이므로 포기할 수 있으나 국민의 권리까지 국가가 포기할 수는 없다. 그러므로 개인청구권에 대한 일본정부의 책임에는 큰 영향을 줄 수 없다고 본다.

둘째, 군위안부문제는 협정 체결 당시 협상문서에서 협정의 본질을 이루었으면서도 일본 측은 그 사실 존재 자체를 부인했고, 그 해결을 시도하지도 않았다. 그 후 군위안부문제의 새로운 발견은 1969년 비엔나 조약법상 '사정변경의 원칙'에 의해 중대한 사정에 해당되는 조약의 종료사유에 해당한다. 따라서 군위안부문제가 한일청구권 협정의 최종타결조항에 포함된 것으로 볼수 없는 이상 정부는 추가 배상을 요구할 수 있다.

셋째, 한일청구권에 재산권침해에 대한 민사 손해배상은 포함되었어도, 군위안부문제 및 강제징용자 등 인권침해에 대한 형사배상책임은 전혀 포함되지 않았다. 그리고 이번 공개문서에서도 증거가 될 만한 핵심자료는 전혀 공개되지 않았다.

넷째, 1960년 독·불간 포괄협상 협정에서 독·불은 모든 청구권에 대한 완전타결규정을 두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추후 프랑스가 강제징집자 등에 대해 추가보상을 요구하자, 독일은 1981년 3월 독·불 이해증진명목으로 '독불이해증진재단에 대한 출연조약'을 만들어 2억5천만 마르크를 출연한 국제선례가 있다.

다섯째, 권위있는 국제법률가협회(ICJ:International Commission of Jurist) 및 UN 인권위원회도 일본의 종군위안부 인권침해책임이 한일청구권협정에 관계없이 이직도 유효함을 주장하고 있다. 특히 국제법률가 협회는 일본정부가 전쟁범인도에 반하는 범죄를 처벌하지 않은 책임에 대해 배상의무가 있음을 지적했다.

설사 이번 불투명한 문서가 개인청구권에 대한 한국정부의 책임을 부분 인정한다 하더라도, 그 한일기본조약의 청구권협정은 재산적 가치침해에 대한 국제민사책임을 규정한 것이고, 인권침해에 대한 손해배상 책임과 국제범죄행위에 대한 형사책임은 전혀 포함되지 않은 것이다. 그러므로 일본이 전쟁기간중 대표적으로 저지른 반인권적 범죄 중의 하나인 일본군위안부의 인권침해에 대한 민사배상책임과 그 국제형사책임은 여전히 유효하다고 본다.

65년 한일협정에 위안부 문제는 포함되지 않았다

이제 한국정부는 늦지만 한일협상과 그후에 피해자에게 저지른 부도덕성에 사과하고, 피해자 추가배상을 위한 국내법을 제정하는 등 범정부차원에서 문서공개에 따른 민관 합동 대책회의를 구성해야 한다. 정부는 부실한 문서는 더욱 투명하게 추가공개하고 국내외적인 입법대책을 강구해야 할 것이다.

정부는 국제법과 국제선례에 따라 1965년 한일청구권협정은 일본군 위안부의 인권침해문제는 포함되지 않았고, 전쟁범죄와 같은 형사 책임은 포함되지 않았음을 공식적으로 당당히 밝히고 일본정부에 문제제기를 해야 한다. 그리고 이문제를 일본의 UN 상임이사국 가입과도 연계시켜 국제여론을 환기시킴으로써 '한일협정의 전면개정'을 추진해야 할 것이다. 필요한 경우 한국정부는 북한, 대만, 필리핀, 중국, 베트남과 같은 아시아 피해국가들간 연대 대책회의도 소집할 수 있을 것이다.

▲ 이장희 교수
결론적으로 한일협정은 일본의 전범세력과 한국의 친일세력이라는 부도덕한 두 세력이 역사의 지배세력으로 등장, 야합하여 만든 합작품이다. 그래서 한일협정은 몇푼의 돈에 혈안이 되어 일제식민지 과거사 인식을 전면 외면함으로써, 그에 부응한 손해배상 청구권에 대해 매우 불명확하게 규정하였다.

더우기 일본은 현재 전범국가로서 가해국가로서 독일처럼 과거를 철저하게 반성하기는 커녕 북한핵을 빌미로 평화헌법을 개정하여 군사대국화를 다시 기도하고 있다는 것은 매우 안타까운 일이다. 향후 참여정부는 해방 60주년을 계기로 역사를 바로세운다는 차원에서 개인피해자 추가배상은 물론이고 추가 외교문서공개를 통하여 한일협정의 전면개정을 일본정부에 제기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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