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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곡성 연동마을 전경
ⓒ 김도수
지난 1월, 임실 고향 집으로 구정 쇠러 가기 위해 새벽부터 짐 꾸러미들을 챙겨놓고 아이들이 깨어나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아이들은 일어날 기미가 없고 아내마저 깊은 잠에 빠져 있다. <오마이뉴스>를 열어 보았다. <오마이뉴스> 톱에 정동순 님의 ‘설날, 밤새 오빠를 기다리던 날의 풍경’ 기사가 삽화와 함께 올라가 있었다.

어쩌면 지난 날의 추억을 저리도 가슴 저미게 썼을까. 버스에서 기다리다 집으로 돌아가는 세 자매의 뒷모습이 한동안 지워지지 않아 기사에서 빠져나가지 못하고 있었다. 마지막 버스를 기다리다 어둔 밤길을 뚫고 종종걸음 치며 집으로 돌아가던 내 어린 시절이 떠올라 독자의견에 글을 남겼다. 가난했지만 행복했던 우리들의 삶을 뒤돌아보게 하는 너무나 좋은 글이었다고. 그렇게 해서 정동순님과 나와의 인연은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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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방 왔다 가붕게 겁나게 서운허요”


그래서 정동순씨의 고향인 곡성 연동마을에 찾게 됐다. 설날, 밤새 오빠를 기다리던 도로를 따라 물어물어 집을 찾아가니 대문이 빠끔히 열려있다. 대문을 조심스럽게 열고 집안으로 들어가니 마당에서 어머니 혼자 배추모종을 하기 위해 모종 상자에 거름과 모래를 섞어 담고 있었다.

“저기, 미국 사는 정동순 따님 댁 맞나요?”

“아이고, 어서 오싯쇼. 그라니도 동순이가 사진 찍으로 누가 갈란지 모르겄다고 힜는디 집이가 그 양반이요?”

“예, 미국 사는 딸내미가 컴퓨터로 글을 써서 올렸는디 제가 답 글을 보내서 서로 글을 주고 받고 있는 그 사람이고만요. 제가 주말에 고향 마을로 가려면 여그를 꼭 지나가야 허는디 ‘얼매나 따님이 어머니를 보고 싶겠냐’ 싶어 사진 찍어서 보내드리려고 한 번 들렸고만이라우.”

"잘 허싯소. 근디 요로케 물짠헌 옷을 입고 사진 찍어서 딸내미한테 보내면 우리 동순이가 맘이 짠헐 것인디… 다시 옷을 좋게 입고 찍어서 보낼라요.”

“아니라우. 곱게 차려 입고 찍어도 좋지만 따님이 요새 우리 엄마 뭐 하고 계실까 몹시 궁금헝게로 있는 그대로 찍어서 보내면 더 좋아라 할 것이고만이라우.”

“긍게, 일 하고 있는 모습 그대로 한 판만 찍읍시다.”

“예, 그러면 걍 찍으싯쇼.”

“혼자 농사짓고 사느라 힘드시죠? 저희 부모님도 평생 농사만 짓고 살다 가셔서 농사 짓고 사는 게 얼마나 힘 드는 일인지 저는 잘 알아요. 제일 힘들어 할 때가 무거운 짐을 들고 옮겨야 할 때죠. 지나가는 사람들을 붙들고 부탁을 하며 농사 짓고 계시는 나이 드신 부모님들 정말 고생 많지요. 그래도 가을이면 보따리 보따리 싸서 자식들 나눠주는 그 재미로 또 농사 짓게 되지요.”


마루에 앉아, 시골에서 홀로 농사 짓고 살아가는 이야기를 나누던 어머니는 수박과 엿, 사탕을 내 오고 다시 두유를 한 개 꺼내 오신다.

수박을 몇 조각 먹고 손을 놓으니 “어따, 요 놈 다 잡수고 가야 혀. 우리 딸내미한테 내 사진 찍어서 보낼라고 일부러 왔는디 집이가 그렇게 걍 서운하게 가불먼 되겄소. 근디 집이는 참으로 마음씨가 곱기도 허요. 요런 사위가 내게도 한 명 더 있으면 참 좋겄소.”

추석이 돌아와 고향 가는 길에 연동마을에 들러 추석 '잘 쇠시라'고 포도 한 상자 들고 가니 집에는 아무도 없고 개만 홀로 집을 지키고 있었다.

어느날 울린 전화벨

ⓒ 김도수
감들이 빨갛게 익어가던 어느 가을날, 퇴근해서 저녁밥을 먹고 있는데 전화벨이 울렸다.

“거기가 임실양반 집이 맞소? 나 여그 곡성이요. 다름이 아니라 뭐 줄 것은 없고 감 좀 따갔으먼 해서 전화를 했소. 언제 임실 집에 가요?”

“뭐더게 저까지 감을 주려고 그러세요. 태풍 불어서 다 떨어져 부렸을 턴디 자식들 따 주세요.”

“아니라우. 태풍 때 많이 떨어졌는디도 올해는 하도 많이 열려서 집이 줄 감은 있고만이라우. 긍게 꼭 와서 따갔쇼. 언제 올라요? 내 그 날은 들에 안 나가고 기다리고 있을라요.”


감을 따러 가지 않으면 무척 서운해 하실 것 같아 고향 가는 길에 연동마을에 들렸다. 승용차 안에는 초등학교에 다니는 애들이 자고 있어서 아내가 차 속에 남고 나 혼자 집으로 들어갔다.

옆 집에 사는 아줌마 두 분이 놀러 왔다가 내가 찾아가니 나가시며 “아이고, 어서 오싯쇼. 며칠 전부터 동순이 어메가 어찌나 집이를 기다리던지 꼭 미국 사는 딸내미가 온 것 같이 손 꼽아 지달리고 있씁디다.”

“왜 가실려고 그래요? 함께 놀다가세요. 가시려면 이 음료수나 한 개 드시고 가세요.”

옆집 아줌마들과 마루에 앉아 음료수를 마시며 시골서 사는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나누고 있는데 부엌 방으로 들어가신 어머니는 뭐를 그리 준비하는지 바쁘게 움직이고 계셨다.

“예, 방으로 들어가싯쇼. 어서 방으로 들어 가랑게요.”

“아니어라우. 그냥 마루에 있을게요.”

옆 집 아줌마들과 마루에 함께 앉아있는데 왜 나 혼자만 방으로 들어가 쉬라 하는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잠시 후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어머니는 내게 주려고 아침부터 닭을 잡아 대추와 인삼을 넣고 푹 삶아 독상을 차려 내오는 것이 아닌가.

옆에 계시던 아줌마들과 함께 먹자고 하니 그 때마다 어머니는 “어따. 혼자 드싯쇼. 우리는 나중에 찹쌀 넣어서 죽 끼리 묵을랑게 신경 쓰지 말고 어서 드싯쇼.”

“아니에요. 저 방금 밥 먹고 와서 못 다 먹어요. 그러니 함께 먹어요.”

ⓒ 김도수
나 혼자 닭 한 마리를 통째로 먹게 하려고 방안으로 계속 들어가라고 했던 것이다.

어머니와 앞에 계신 아줌마 두 분, 그리고 골목길에서 감을 따가지고 빨리 돌아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을 아내와 애들을 생각하니 맛있는 토종 닭을 나 혼자만 먹을 수는 없었다. 그래서 밥을 방금 먹고 와서 배불러 도저히 못 먹겠다며 거짓말을 했다. 오랜만에 집에서 기른 맛있는 토종 닭을 실컷 먹고 싶었지만 나는 거짓말을 할 수밖에 없었다.

핸드폰이 울려댄다. 시간이 꽤 흘렀는데도 왜 이리 남편은 안 오는 것인지 답답한 아내가 핸드폰을 친 것이다. 감은 따러 갈 생각도 하지 않고 닭만 먹고 있었으니 불안하기는 나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어머니는 언제 감을 따 놓았는지 감 한 상자를 손수레에 올려 놓고 그것도 모자라 집 안에 있는 감나무에서 몇 개 더 따서 비닐 종이에 담는다.

승용차가 주차되어 있는 골목길까지 따라오신 어머니는 아내와 아이들이 차 밖에서 기다리고 있자 깜짝 놀라시며 “아니, 애들이랑 같이왔으면 함께 데리고 들어와서 닭을 먹을 건인디….”

어머니는 무척 서운해 하신다.

애들이 자고 있어서 함께 들어가지 못했다고 말씀 드리니 닭고기를 못 먹은 애들이 이내 맘에 걸리셨는지 어머니는 뒤돌아 서서 '몸뻬' 바지 속에서 꼬깃꼬깃한 천원짜리 지폐 몇 장을 꺼내 애들에게 나눠준다.

‘꼬깃꼬깃 접어진 저 돈, 여름내 뙤약볕에서 땀 흘려 얻어낸 쉰내 나는 지폐가 아니던가.’

손수레를 끌고 다시 집으로 들어가시는 어머니 뒷모습을 바라보니 가슴이 뭉클해 지며 돌아가가신 어머니 얼굴이 어른거리며 눈물이 핑 돈다.

고향집에 다다랐을 때 핸드폰이 울린다.

“여기 곡성이요. 아, 깜빡 잃어버리고 참기름을 마루에다 놔 둬 불고 그냥 가 불게 했소. 내일 몇 시에 우리 동네 앞으로 지나가요? 내가 도로가로 나갈랑게 찍힌 이 전화번호로 꼭 전화 허고 오싯쇼. 내 정신하고는….”

“아니에요. 제가 집으로 찾아 갈게요. 혹시 올해 배추 농사 잘 되었는가요?”

“배추 농사가 별로 안 되었고만이라우.”

“예, 그럼 배추하고 무시 몇 개 뽑아서 들릴게요.”

“내가 혹시 들에서 집에 늦게 들어 갈랑가 모릉게 요 번호 찍힌 대로 꼭 전화허고 오싯쇼.”


함께한 저녁식사

▲ 곡성 연동마을의 정동순씨 어머니 집.
ⓒ 김도수
어둠이 내리고 있을 즈음 전화를 거니 이제야 막 집에 들어왔다며 함께 저녁밥 지어 먹고 가란다. 혼자 먹는 저녁 밥, 얼마나 외롭고 쓸쓸했겠는가. 아내와 어머니는 부엌에서 함께 저녁밥을 준비한다.

저녁 밥 지으며 도란도란 거리는 저 사람 소리, 부엌에서 얼마 만에 들리는 소리일까. 오랜만에 옹기종기 둘러 앉아 먹는 저녁밥, 이 또한 얼마만이었겠는가. 어머니는 숟가락 소리 요란하게 들리는 저녁 밥상이 즐거웠는지 밥 숟가락을 제대로 뜨지도 못하고 홀로 시골집 지키며 사는 이야기를 풀어내고 계셨다.

“근디 집이는 어치게 고로케도 시골 사는 모습을 훤히 꽤 뚫고 있소? 참말로 자상도 해서 우리 사위였으면 참 좋겄소.”

어머니는 아내를 바라보더니 "내가 사위였으면 좋겄다고 해부렀는디 실수를 헌 것 같으요"껄껄 웃는다.

“아니에요. 장모님도 안 계시고 어머니도 안 계시니 괜찮아요. 어제 닭 한 마리 잡아서 사위 대접 했잖아요.”

아내도 덩달아 웃는다.

적막하기만 하던 시골집에 홀로 사시는 어머니께 사람 발자국 소리 들리게 한 것이 내가 드린 가장 큰 선물이었다. 여름내 뙤약볕에서 땀 흘려 짜낸 참기름, 어머니의 땀방울을 받아 들고 간다는 생각에 차마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는다. 어머니가 주신 땀방울들, 아끼고 아껴서 먹으리라. 시집간 딸내미들한테도 잘 주지 않는다는 참기름을 내가 받아 쥐었으니 이 고마움을 뭐로 갚는단 말인가.

지난 11월, 어머니 제사 지내러 시골 집에 가기 전날 밤, 연동마을에 전화를 걸었다. 제사를 지내고 밤 늦게 내려오면 새벽이 될 것 같으니 작은 정성이지만 예쁜 스웨터 하나 샀는데 죄송하지만 새벽에 집에 잠깐 들려도 되겠냐고 물으니 어머니는 “뭐더게 옷을 샀냐”며 뭐라 하신다.

집 앞에 차를 주차시키고 있는데 대문 앞에서 새벽부터 기다리고 계셨는지 자동차 불빛 사이로 어머님이 걸어오고 계셨다. 아내는 스웨터가 맘에 들어 이 옷을 샀다며 어머니 몸에 잘 맞는지 옷을 입혀드린다.

“그라니도 부산서 요런 스웨터 하나 사 입으려고 백화점에 갔었는디 너무 비싸서 안 사고 그냥 와부렀는디 집이가 내 맘에 쏙 드는 옷을 사와부렀소. 딱 맞고만이라우. 내가 요로케 좋은 선물을 받아도 될랑가 모르겄소.”

제사 지내러 가는 새벽 길, 아내가 입혀준 스웨터를 입고 안개 자욱한 골목길에 서서 ‘어서 가라고’ 손을 흔들어주던 연동마을 어머니 모습이 아직도 지워지지 않는다.

‘어머니, 저를 사위라 불러도 좋고 아들이라고 불러도 좋습니다. 겨울 내내 아들 딸내미 집에서 푹 쉬시고 내년 봄에 농사지으러 연동마을에 다시 돌아오시면 그 때 찾아 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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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정겹고 즐거워 가입 했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염증나는 정치 소식부터 시골에 염소새끼 몇 마리 낳았다는 소소한 이야기까지 모두 다뤄줘 어떤 매체보다 매력이 철철 넘칩니다. 살아가는 제 주변 사람들 이야기 쓰려고 가입하게 되었고 앞으로 가슴 적시는 따스한 기사 띄우도록 노력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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