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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댁본가가 경상북도 문경인 남편과 결혼해서 처음으로 맞았던 추석명절, 평소 집에서 부모님의 찌개를 끓여드리고 반찬 몇가지와 밥은 할 줄 알았지만 친정이 큰 집도 아니고 제대로 명절음식 만드는 법을 특별히 배우지 못했던 나로서는 시집와서 처음 명절을 맞이하게 되자 명절 며칠 전부터 긴장이 되었다.

잔뜩 움츠린 나에게 '긴장하지 말고 그냥 어머님이 하라는 대로만 하면 야단은 맞지 않을 것'이라며 협박반 위로반 넌지시 던진 남편의 충고를 머릿속에 새겨둔 채 어머님댁에 가서 먼저 일을 찾아서 하기 보다는 무조건 어머님이 시키시는 일만 했다.

왠만한 남자보다도 더 크고 쩌렁쩌렁한 어머님의 목소리만으로도 일단 마음이 긴장되지만 어떤 지시가 떨어지면 5초도 안 돼 "다 됐나"하고 확인하시는 번개같은 성격에 낮지만 높낮이가 분명한 투박하면서도 가끔은 해석하기 힘든 경상도 사투리에 말뜻을 해석하느라 머릿 속은 늘 복잡했다.

가끔은 어머님을 도와드리려고 너무 앞서가다가 실수를 하기도 하고 또는 서울식과 경상도식이라는 오랜 생활의 차이와 오빠와 나 이렇게 두 남매뿐인 단촐한 식구에서 모이고 나면 모두 이십명에 가까운 대가족이라는 부담감과 낯설음 때문에 어머님과 좌충우돌하면서 시행착오를 거듭한 끝에 주부생활 6년차인 지금은 칭찬에 인색하기만 하신 어머님께 '약빠르다(아마도 부지런하고 눈치빠르다는 뜻쯤으로 해석되는, 어머님이 내게 주신 최고의 칭찬)'까지 들으며 어머님의 손발을 제법 잘 맞추는 막내 며느리로 거듭날 수 있었다.

그런데 모든 일을 전두지휘하시는 어머님 옆에서 어머님이 부침개를 부치실라치면 얼른 식용유와 후라이팬을 찾고, 나물을 씻으시려고 하면 큰 그릇을 내드리고 하면서 결혼 후 처음 맞는 명절을 그럭저럭 '무사히' 보내고 있던 중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것이 있었는데, 겉절이로 쓱쓱 버무려서 먹으면 좋을 시퍼런 잎이 보기좋은 배추잎을 하나씩 뜯어다가 씻어놓으시더니 밀가루를 물에 묽게 반죽하곤 척 빠뜨리시는 거였다.

도대체 무엇을 하시려는 걸까 의문스러웠지만 이번엔 도저히 무엇이 필요한지 어머님의 '의도'를 가늠할 수 없어 그냥 바라만 보고 있으니 어머님께선 "후라이팬 가와라(가져와라)" 하고 말씀하셨다.

그리고는 우리 네 며느리 중 전을 가장 잘 부치신다는 둘째 형님을 부르시더니 자글자글 식용유가 끓기 시작하는 후라이팬에 밀가루 반죽이 묻은 배추잎을 손으로 죽 훑어내린 후 올려놓으셨다. 차라리 그냥 고추장에 찍어먹으면 아삭아삭하고 개운할 배추를 왜 굳이 밀가루옷을 입혀 후라이팬에 지지는 것인지, 또한 도대체 이 음식의 정체가 무엇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나마 아무 양념도 하지 않은 생배추에 입힌 밀가루 반죽에 들어간 약간의 소금과 인공조미료(다시다)가 양념의 전부였다.

그래도 밀가루 반죽을 입은 배추가 피지직 경쾌한 소리를 내며 익어가고 전혀 음식이라고 느낄 수 없었던 '배추 부침개'가 제법 고소한 내음을 풍기자 그때까지 TV앞에 몰려 앉아 계셨던 아주버님들과 식구들 은 후라이팬 근처로 조금씩 다가오고 얼마 부치지도 않은 배추 부침개를 한 귀퉁이씩 야금야금 뜯어먹는 바람에 채반 가득했던 배추부침개가 순식간에 동이나 버렸다.

그리고 이번엔 가지런히 고른 키의 배추로 아까보다 더 정성스럽게 만들어진 듯한 배추부침개는 제삿상에 올릴 것이라며 따로 채반에 담아두셨다. 음식이라는 것만으로도 낯설기만 했는데 제삿상에까지 오를 정도라니, 태어나서 처음으로 마주하는 배추부침개는 그야말로 나에게 놀라움만 주었다.

태어나서 처음 본, 이 기상천외한 음식을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신기하니 이번에는 아무리 '약빠른' 막내며느리라도 어머님을 도와 드릴 방법이 없었다.

그래도 눈치껏 어머님을 도와드리고자 밀가루 반죽에 배추를 담가 묻히자 형님은 "그거 아무나 하는거 아니야. 앞으로 이거할려면 자네 시집생활 몇 년 더 되어야 하니까 오늘은 그냥 먹기만 해"라고 나를 말리셨다. 어머님도 옆에서 "이거 제대로 부칠 줄 알아야 이 집 며느리 되는 기다"하면서 막내며느리의 서투른 도움을 거절하셨다.

그리고 형님이 입에 넣어주신 배추부침개 한 조각. 처음엔 아무 맛도 나지 않고 비릿한 것 같은, 하지만 좀더 씹어보니 배추의 고소함과 밀가루 반죽의 부드러움이 어우러진 뭐라고 특별히 표현할 만한 맛이 없는 단순한, 그러나 담백한 맛이었다.

그날따라 명절 음식을 준비하느라 실상 제때 끼니도 못 챙겨먹느라 몹시 배가 고팠던 나는 '배추부침개때문에 명절이 기다려진다'는 아주버님들보다 더 배추부침개를 맛있게 먹었다. 그리고 일곱 차례의 추석과 여섯 차례의 설을 맞으면서도 아직은 며느리 경력이 부족하다고 여기셨는지 어머님의 '배추부침개 비법 전수'는 받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두 아이를 낳고 키우면서 아이들 간식을 위해 제법 부침개를 자주 하게 되면서 가끔 어머님이 하시던 배추부침개를 떠올렸지만 돼지고기나 소고기에 각종 야채를 다져서 하는 빛깔 고운 고기야채전 등에만 익숙한 나로서는 아무래도 알록달록한 야채빛깔과 고기가 어우러진 전에 비해 밍숭밍숭하고 무색무취한 느낌이 드는 배추부침개가 좀처럼 맛있는 음식으로 여겨지질 않았다.

그러다가 며칠 전 배추를 사다가 어머님이 하시던 기억을 떠올리며 어머님처럼 밀가루 반죽을 풀어 배추부침개를 해보았다.

ⓒ 임선미
ⓒ 임선미


ⓒ 임선미
ⓒ 임선미
전처럼 둥근 모양이 되도록 하기 위해 밀가루옷을 입은 배추 잎파리를 포개어 후라이팬에 부치니 마치 사이좋은 형제마냥 나란히 누워있는 배추잎들의 모습이 정겹기만 하다.

노릇하게 익은 배추부침개가 제법 서너장 채반에 올려졌을 무렵 마침 그날따라 일찍 퇴근한 남편이 들어서자마자 킁킁 냄새를 맡더니 "이거 혹시 배추부침개 아니야?"하고 반색을 한다. 겉옷만 벗은 채 대강 손만 씻고 나와 젓가락을 급하게 찾는 폼이 그동안 배추부침개가 몹시도 먹고 싶었던 눈치다.

배추부침개를 손으로 주욱 찢어 한 입 가득 입에 넣는 남편을 따라 나도 식탁에 앉아 어머님 등 뒤에서 배운 배추부침개 '첫 작품'을 시식해본다.

배추 특유의 아삭함은 사라졌지만 밀가루옷에 '기'를 누그러뜨린 부드러운 배추의 향엔 씹으면 씹을수록 담백한 고소함이 묻어나오고 푸르른 잎파리의 생명력을 피워낸 원천인 흙의 냄새마저 전해지는 듯 하다. 그리고 전에는 알지 못했던 맛 한가지를 더 발견한다. 바로 어머니같은 고향의 맛이다.

눈깜짝할 사이에 채반 가득했던 서너장의 배추부침개를 다 비우고 오늘 정말 잘 먹었다는 인사와 함께 덧붙인 남편의 한마디 "이젠 승혁엄마도 경상도 며느리 다 됐네. 배추 부침개를 다 할 줄 알고."

배추부침개 만들기

1) 싱싱하고 푸른 잎이 많은 배추를 골라 하나씩 뜯어내어 깨끗이 물에 씻는다

2) 밀가루와 물을 2 : 1 정도의 비율로 섞어 잘 풀은 다음 약간의 소금, 다시다 등으로
양념한다(어느 정도의 간이 필요하기 때문에 하는 것이므로 인공조미료가 싫다면 안해
도 된다)

3) 한 장씩 뜯어낸 배추를 2)의 밀가루 반죽에 적신 후 밀가루 반죽에 배추 골고루
적당히 묻어나도록 손으로 위에서 훑어내린 후 배추의 크기가 비슷한 것끼리 세 장을
잎파리가 서로 겹치게 후라이팬이 놓는다

4) 배추 맨 윗부분이 누그러져 누릇하게 익을 정도로 익으면 완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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