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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 3월 6일, 한국 이라크반전평화팀 4진으로 출국하여 이라크에서 활동하다 5월 말 귀국, 다시 한달 후 출국하여, 8월 초에 한국에 들어왔습니다. 미국의 전투병 파병 요구와 관련된 기사를 듣고 떠오른, 미군과 관련한 기억들을 가능한 사실 그대로 썼습니다. '국익에 도움이 된다면 해야 한다.' '위험해서 안된다'라는 단순한 논리로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것 같진 않습니다.

저는 그저 이라크에서 미군이 하고 있는 일과, 만일 한국군이 파병된다면, 이보다 더 심한 장면들을 보고 겪을 거라는 것. 한 두 명의 인명 살상으로는 비교할 수 없는 커다란 정신적 상처를 안게 될 것임을 말씀드리고 싶었습니다. 힘으로 타자를 누르려고 할 때, 가장 상처받는 사람은 바로 당사자입니다... 기자 주



4월 8일(화)

점심을 먹으려고 알 파나르 호텔 식당에 앉았는데, 갑자기 큰 폭발음과 함께 깨질 듯 유리창이 크게 진동했다. 너무 가까운 곳이라, 어딘지 나가보기도 겁났다. 몇 시간 뒤 텔레비전을 통해 그게 바로 맞은 편 팔레스타인 호텔 15층이 대포에 맞아 불이 나고, 기자 3명이 죽었다는 걸 알았다. 그 중 한 명은 우리가 본국으로 이메일 보내는 것을 도와주던 스페인 기자였다.

미군은 자기들이 쏘았다고 말했고, 그 호텔에서 저격병을 보았다고 했다. 같은 시간 알 파나르 호텔 2층에 있던 웨이드 아저씨는 마침 팔레스타인 호텔을 보고 있었는데, 기자들의 비명 소리뿐 아무 것도 본 게 없다고 했다. 미군은 참 눈도 좋아라. 이후 팔레스타인 호텔엔 백기(白旗)들이 내걸렸다.

▲ 팔레스타인 호텔에 내걸린 백기
ⓒ 유은하

4월 9일(수)

이메일을 보내려고 쉐라톤 호텔 12층에 왔는데, 갑자기 이상한 소리가 나서 내려다보니, 팔레스타인 호텔 앞 광장으로 탱크들이 줄지어 들어오고 있었다. 너무 놀라서 숙소로 뛰어갔다.

'미군이 들어와 미국 평화운동가들이 다 잡혀가면 나는 어떻게 될까, 혹시 한국군과 마주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하는 고민이 다 끝나지도 않았는데, 이렇게 밀어닥치다니….

2층에서 IPT(이라크평화팀) 사람들이 현수막을 들고 내려오고 있었다. 바로 앞에 온 탱크가 호텔 옆길로 대포를 쏘았다. ‘전쟁을 위한 용기가 아니라 평화를 위한 용기를 내라’는 현수막을 들고 2층에 서 있었다. 손이 떨렸다.

▲ 알 파나르 호텔 2층에서 IPT 회원들이 미군과 대치하고 있다.
ⓒ 유은하

시간이 좀 흐른 후 사람들과 호텔 앞으로 내려가서 군인들을 만났다. 22살짜리 월터는 “이번 전쟁은 무척 쉽더라. 이라크 사람들은 우리를 환영하던걸. 집에 가고 싶다”고 했다. 몇 명의 미군을 만나면서 흥미로운 사실. 그들은 한국에 대해 ‘너무 잘 안다.’ 두 명 중 한 명은 한국에 있었던 사람들이고(포항, 용산 등) 그 반은 한국에 친구(물론 군인이다)가 있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내가 너희 나라를 지켜줬는데, 넌 여기서 뭐하고 있니?”라고 되묻는다. 내일부터 IPT 사람들과 함께 차도에 ‘야만의 둥지’를 깔고 연좌시위를 하기로 했다.

4월 10일(목)

숙소 앞길에 걸개그림을 깔고 앉았다. 걸개그림에는 “누가 이 아이들을 보호할 것인가?”라고 적힌 현수막을 달았다. 한 미군이 와서 말한다.

“난 당신들이 우리를 싫어한다는 거 잘 알아. 하지만, 이 전쟁은 우리가 일으킨 게 아냐. 후세인이 자초한 거라고. 남쪽 바스라에서는 아이들조차 총을 들고 있다고. 우리가, 이제 우리가 이라크 아이들을 보호할 거야. 가서 당신네 팀 사람들에게 말 좀 해줘. 우리를 너무 미워하지 말라고….”

▲ '야만의 둥지' 걸개그림 위에서의 침묵시위
ⓒ 유은하

캐시 브린 할머니는, 어떤 군인과 한참을 이야기하다가 돌아오더니 편지를 쓴단다.

“누구한테요?”

“해리스한테. 아까 이야기하던 그 흑인병사는 일찍 결혼했고 어린 장애인 딸이 있어. 이곳에 돈이 필요해서 온 거야. 한참 이야기했는데, ‘나는 여기 잘못 온 거 같아요. 미국으로 돌아가서 군복을 벗을 거예요. 저를 위해서 기도해주겠어요?”했다고.

▲ IPT 회원들이 야만의 둥지 그림 위에서 침묵시위 중이다.
ⓒ 유은하

4월 11일(금)

베티조와 모하메드가 거리 상황을 보러 나갔다가 울고 들어온다. 왜냐고 물었더니 “미군이 관청 건물들에 대포를 쏘아 문을 열면 시민들이 들어가서 약탈을 한다. 선량한 사람들이 도둑으로 변해가고 있다. 전쟁은 나쁘지만 지금 상황은 끔찍하다”고 했다. 그녀는 전쟁이 시작된 이후 자기 눈물 외에는 아무 것도 먹지 못하고 있다.

4월 12일(토)

오전 오후로 '미셔너리 오브 채리티'에 아이들과 수녀님을 만나러 가는데, 오늘은 가다가 길에서 총소리와 싸움 소리가 나서 더 이상 가지 못해 되돌아 왔다. 곳곳에 철조망, 불심 검문하는 장소가 많이 생겨서 어딜 다니는 게 정말 힘들다. 15분이면 충분히 걸어갈 거리를 3, 40분 걸려 돌아와야 한다. 내 호텔 방으로 돌아오는데도 신분을 밝히라고 윽박지르는데 뭐라고 할 말이 없었다. 군인과 기자들이 바글대는 바그다드에서, 나는 누굴까.

4월 13일(일)

9시에 장로교회로 예배를 드리러 갔는데, 9시 반이 되어도 예배가 시작되지 않는다. 궁금해하던 사이, 담임목사님이 문을 빼꼼 여시고 “미군이 예배드리러 올지 모르니, 10시에 예배 시작합니다. 혹시 총을 들고 들어오더라도 무서워하지 마세요”라고 광고한다.

함께 왔던 호주 휴먼쉴드 로즈메리는 “다른 때라면 기쁘게 예배드리겠는데, 지금은 안 되겠어”하며 나가버린다. 마틴 아저씨는 “그래도, 군인들이 교회에 온다는 건, 그나마 다행스런 일 아냐?”며 기다리자고 한다.

나는 예배당에서 나가 교회 문 앞에 멍하니 앉아 있었다. 예배를 다 마치고 나서야 몇 사람이 도착했다. 총을 들고 들어와 예배당 앞에서 기도했다. 기도 후 성도들과 이야기하다가, 교회 앞 스웨덴 대사관 쪽에서 총 소리가 나자 총알같이 튀어갔다.

▲ 바그다드 교회에서 기도하는 미군
ⓒ 유은하

오늘은 예수님이 예루살렘으로 들어간 것을 기념하는 종려주일이다. 교회에서 평화를 상징한다는 올리브 나뭇가지를 나눠주었다. 그걸 들고 돌아오는데, 어떤 사람이 말을 건넨다. “누구를 위한 평화야? 미국을 위한?”

방으로 돌아와, 미국 어린이들이 접어 보낸 종이학을 베란다에 내어 걸고, 타흐리르 광장에서 춤출 때 썼던 흰 천에다 "No Occupation"이라고 적어 내걸면서 왜 평화를 상징하는 것들은 이렇게 약한가 생각하면서 울었다.

▲ 미국의 이라크 점령에 반대합니다.
ⓒ 유은하

4월 14일(월)

거리가, 말 그대로 쓰레기통으로 변해가고 있다. 정부가 사라지고, 모든 통신시설이 망가지고, 이라크 사람들은 자신의 생사에 대해 친지들에게 알리지도 못해, 기자들이 묵는 호텔 앞에 몰려와 ‘전화 한 통’을 구걸한다. 곳곳에 체크포인트가 있으므로 자기 집으로 돌아가지 못하는 사람도 있다. 가족이 죽고 자신은 팔을 다친 소년이 미군에게 뭔가를 호소하다가 아무 것도 얻지 못하고 되돌아가는 걸 바라만 보고 있었다. 나는 무력하다.

▲ 당신들이 나를 위해 무얼 해줄 수 있나요
ⓒ 유은하

4월 14일(월)

숙소 방으로 올라가려는데, 로비에서 텔레비전을 보던 이라크 분들이 손짓을 한다. 뭔가 했더니 한국 소식이 나온다는 것이다. 언제 화면인지는 모르겠는데, 많은 사람들이 반전시위를 하고 있고, 그 중 ‘파병 반대’ 피켓을 보였다. 함께 있는 사람들은 “코리아, 사우쓰 코리아”를 말하며 엄지손가락을 올리고 박수를 보내 주었다. 순간, 눈물이 왈칵.

4월 16일(수)

처음 장애아동시설인 다르 알 하난에 갈 때 만난 쌀람과 함께 일하게 되었다. 그가 갑자기 팔레스타인 호텔과 쉐라톤 호텔 사이 정원에 가 보잖다. 그곳에서 미군과 이라크 여인들이 어울려 히히덕거리고 있더란다. 부리나케 가 보았는데, 낮이라 아무 것도 볼 수가 없었다. 후세인 정권은 매매춘을 법으로 금지해 놨고, 이슬람 문화에서도 거부감이 크다. “한국도 그래요. 미군 주둔지 주변에 기지촌이 형성되었죠”라고 말하곤 둘 다 깊은 한숨.

4월 25일(금)

다르 알 하난 아이들을 위해서 뭘 할까 하다가, IPT 사람들이 전해 준, 종이학이랑 풍선으로 이곳을 꾸며보기로 했다. 좀 걸어다닐 수 있는 아이들은 풍선 가지고 잘 논다. 직원인 옴 제이납은 내게 “우린 미국으로부터 온 어떤 것도 필요 없으니, 치워버려요!”라고 했다. 미안했다.

5월 1일(목)

쌀람 친구가 길에 차를 몰고 가고 있는데, 바로 뒤엔 이라크 사람, 그 뒤엔 탱크가 오고 있었단다. 마주 오던 차가 노선을 바꾸려고 빵빵거려서 자신은 피했는데, 뒤의 차는 그 소리를 못 들어서 머뭇거렸다고 한다. 그 순간 탱크에 있던 군인이 총을 쏴서 그 사람은 즉사했고, 군인들은 유유히 탱크에서 내려, 그 차를 도로 옆에 미뤄놓고 갈 길을 갔다는 것이었다. 그 쌀람 친구는 충격과 공포에 사로잡혀서 말하지 못할 지경이었다. 하지만, 이 사실을 호소할 만한 데가 없다.

5월 6일(화)

알 누르 시각장애인 학교는 통째로 약탈당해 남아 있는 게 없어서 유리 공사와 전기 공사를 먼저 시작했다. 2-3주 정도 지나면 기초 공사는 어느 정도 될 것 같은데, 여전히 주변에 위험이 있어서 미군을 찾아가 보기로 했는데, 마틴 아저씨가 한 마디 한다.

“가봐. 좀 힘들 걸? 내가 전에 미군 지휘관을 만나 대학의 치안 유지를 부탁했더니 ‘우린 여기 치안유지를 하러 온 게 아니라, 이라크 사람들을 죽이러 왔다’고 하던 걸.”

5월 12일(월)

함께 일하는 아드난이 오늘 알 누르 스쿨에 미군들이 왔다고 한다. “왜요?”라고 물었더니, 기자들을 잔뜩 데리고 들어와서 미군이 학교 청소를 하는 모습을 보여주더란다. “그래요? 수고했네. 그 군인들 계속 청소하라고 하지. 내가 월급 줄 텐데”라고 하고 오랜만에 웃었다.

5월 14일(수)

프리랜서 PD 한 분과 이라크 박물관을 방문했다. 꽤 고상해 보이는 장교 한 사람이 나와서 우리를 안내했다. “이곳의 문화재들을 이라크 사람들이 약탈해 갔는데, 우리가 와서 모스크 등을 다니며 되돌려달라고 부탁했고, 사람들이 조금씩 가져오고 있다”고 자랑스럽게 이야기했다. ‘네, 그러세요. 참 훌륭한 일을 하시네요’하고 돌아 나오는데, 쌀람이 살짝 한 마디 한다.

“거짓말이야. 내가 며칠 전에 마리낼라랑 여길 왔는데, 우리들 보고는 총을 겨누고 ‘꼼짝 마’하고는 여기 있는 물건들을 차로 어디론가 실어나르던걸.”

5월 20일(화)

라디오를 통해 ‘바트당 소속 이라크인들은 자기 직장을 떠나라’는 공지가 전달되었다. 이라크 국민의 3분의 2가 바트당 소속이다. 미국은 전후 이라크 통치에 대한 대책을 갖고 있는 건지 심히 궁금해지다.

6월 24일(화)

지쳤고, 한국에 갔다 한 달만에 다시 이곳으로 왔다. 이라크 국경은 비자 없이도 통과되어 오히려 서글펐다. 이라크의 사막에 뚫린 고속도로에는 아직 불탄 차들이 남아 있고, 길가에 거뭇한 것이 고양이 시체처럼 보여 흠칫거린다. 반전평화팀을 다시 만나 가장 처음 들은 이야기는 어제 이라크 군이 임금 지불을 요구하는 시위에서 미 여자 군인에 의해 3명이 사살 당했다는 소리였다.

6월 27일(금)

미군이 주둔해 있는 관청 앞길을 지나는데, 사람들이 어떤 사람 얼굴을 들고 침묵시위 중이다. 무슨 일인가 했더니, 시아파 지도자인데, 어느 날 미군이 와서 끌고 갔다는 거다. 미군 탱크에 폭발물을 설치하려고 했다나. 그 사람 집에서 폭탄이 발견되었냐고 물었더니, 아니라고 했다. 그 사람은 열흘째 소식이 없단다.

7월 1일(화)

쌀람이 길에서 받아온 전단지 한 장을 내민다. “최후공지”라고 써 있었다.

"이라크 안의 모든 무슬림과 비무슬림, 선량한 주민들, 특히 어린 아이들은 제발, 제발, 제발 미군 탱크와 차, 미군으로부터 떨어지십시오. 왜냐하면, 그것은 언제든 폭파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만일 누구든지 다치면, 그것은 우리의 책임이 아닙니다. 우리는 이렇게 미리 알렸기 때문입니다. -이슬람 지하드-”

전쟁은 이제부터 시작인가.

▲ 이슬람 무장단체들의 최종공고. 길에서 종종 볼 수 있다.
ⓒ 유은하

7월 2일(수)

자주 가는 알 만수르 PC방 앞 길에서 7명의 민간인이 죽었다. 후세인 정부에 협조했던 사람을 추격하던 중이었으며, 죽은 7명 중 한 명은 어린아이였다.

7월 7일(월)

다르 알 하난에 가끔 미군들이 들어온다. 물론 총을 들고 들어와 쓱 훑고 간다. 한 번은 아이들을 위한 인형을 나눠주고 갔다. 고마운 일이다. 이곳 아이들은 몸도 못 가누긴 하지만.

7월 10일(목)

일하다 점심식사를 하고 있는데, 미군 몇 명이 사무실로 찾아왔다. 그 중 하나는 이 지역을 담당한 캡틴 심슨이라는 흑인이었다. 그는 나름대로 여기 아이들을 신경 써 주려고 한다. 우리에게 “당신들이 이곳에서 아이들을 위해 일해주는 게 고맙다”고 한다. ‘나는 당신들을 위해 일하는 게 아니므로 고마워 할 필요가 없다’는 말이 입안에서만 맴돈다.

엊그제는 아이들 방을 돌면서 보모들이 숨겨놓은 몽둥이-말 안 듣는 장애아를 때릴 때 쓰는-를 수거해 가고, 직원들에게 “이 곳에서 어떤 폭력도 쓰지 말라”고 충고한다. 폭력을 쓰면 직업을 잃게 될 거라고. 그를 다른 곳에서 만났다면 우리는 좋은 친구가 되었을지도 모르겠다.

7월 22일(화)

밤 10시 반부터 30분 동안 이 근처에는 총격전을 방불케 하는 소리가 들렸다. 기관총에 폭탄 소리까지, 우리 집 옥상에서 불빛이 보이자 총을 쏘면서 달려오더란다. 팀원들 모두 잠을 자려 옥상에 올라갔다가 황급히 1층으로 내려와 침실 구석에 쭈그려 앉아 숨죽이고 있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우다이와 꾸사이가 잡힌 것에 대한 축포였다지만, 믿을 수 없었다. 내일 한국엔 이렇게 보도되겠지.

“후세인 두 아들이 잡혔다. 그리고 혼란 속에 30명이 죽었다”

7월 28일(월)

알 누르 스쿨이 가을 학기에는 제대로 개강할 수 있도록 기숙사를 복구하고 있는데, 학교에 갔더니 직원들이 달려온다. 뭔 일인가 했더니, 미군들이 와서 창문에 총을 쏘았단다. 테러범들이 학교에 숨어 있었다나. 몇 명을 잡아갔단다. “그런데, 창문은 군인들이 갈아 끼워 준대요?” 대답이 없다.

8월 5일(화)

가끔 한국뉴스에서 미군 1명이 죽었다고 나오면, 그 열 배 이상의 이라크 사람들이 소리 없이 죽어가고 있다는 소리라고 믿으면 된다.

9월 6일(토)

한국에 돌아온 지 한 달이 지났다. 길 가다 라디오에서 들은 이야기. 미군이 이라크군과 함께 일을 하다가 ‘실수로’ 12명을 죽였단다. 테러범으로 오인했다나.

9월 8일(월)

가끔, 이해할 수 없는 울음이 찾아든다. 꿈속에선 군대와 맞부닥치곤 한다. 길을 가다 조금만 큰 소리만 들어도, 춘천 하늘의 헬리콥터를 봐도 깜짝깜짝 놀라고, 액션이 나오는 영화를 볼 수도 없다. 이라크에서 만났던 사람들이 기억의 수면에 떠오르기만 해도 마음이 무거워져, 일상적인 대화가 불가능하다.

▲ 이라크에서 보던 헬리콥터를 한국에서도 어렵지 않게 본다.
ⓒ 유은하

9월 9일(수)

아직도 나는 그곳의 군인들에 대한 생각을 정리하지 못했다. 처음 미군을 눈앞에 두었을 때, 평화팀 안에서의 갈등을 기억한다.

“저 사람들은 ‘돈’ 때문에 사람들을 죽이기로 결정하고 온 사람들이에요! 왜 잘 대해주죠?”

“아녜요…. 저들도 이 전쟁의 피해자예요.”

우리는 결론을 내지 못했다. 내가 만난 미군들도 몸과 마음이 엄청난 고통과 갈등에 휩싸여 있을 거라고 확신한다. 본국으로 후송된 6000명 중 상당수는 정신적 상처 때문이라지. 남아 있는 사람들은 어떤 충격에도 무감각해지는 법을 훈련받은 거겠지. 그건 또 다른 죽음 아닌가.

9월 10일(수)

추석 연휴, 터미널 가판대 신문 헤드라인. 미국이 이라크에 전투병 파병을 한국에 요청했다고.

▲ 나는 누구, 당신은 누구?
ⓒ 유은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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