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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7일(현지시간) 미국 캠프데이비드에서 기자회견에 앞서 악수를 나누고 있는 부시 미 대통령과 토니 블레어 영 총리.
ⓒ Whitehouse
이라크전이 생각했던 것만큼 순조롭게 진행되지 않자, 조지 부시 미대통령과 토니 블레어 영국총리가 3월26일과 27일 이틀간 캠프 데이비스에서 긴급 정상회담을 가졌습니다.

회담에서는 무슨 말이 오갔는지 누가 알겠습니까마는 회담이 끝난 뒤 두 사람은 서로의 우애를 확인하면서 기자회견을 시작했습니다.

모두연설에서 부시는 블레어를 "약속을 지키는 사람"이며, "용기 있는 사람"이고, "비전이 있는 사람"이라고 치켜세웠고 블레어는 그에 화답해서 부시의 "힘과 지도력"에 감사해하며 "미국과 영국 사이의 협력은 어느 때보다 양호하고 강력하다"고 덧붙였습니다.

그런데 백악관이 발표한 기자 회견문을 보니까 두 사람이 겉으로 보이는 것만큼 그렇게 화기애애한 것만은 아니었던 모양입니다. 우선 전황에 대한 설전이 있지 않았나 짐작하게 하는 대목이 있습니다.

부시는 모두연설에서 "코울리션군은 적에 대응해 매일 매일 착실하게 진군 중"이라고만 개괄적이고 간단히 전황을 요약했지만, 블레어는 비교적 길게 전황을 설명했습니다.

그는 "개전 1주일도 안 돼서 남부 유전 지대와 시설들을 확보했다"고 했고 "이라크가 서쪽에서 공격해올 가능성을 차단했다"고 덧붙였습니다. 그는 또 "바스라를 포위했고 움카스라의 주항을 확보했다"고도 전했습니다.

블레어가 전하는 전황은 주로 남부와 서부에 대한 것이지요. 영국군 담당지역입니다. 영군이 제 역할을 못하고 있어서 미군이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다는 세간과, 미군사 전문가들과, 그리고 아마도 부시의 비난에 대한 변명으로 보입니다.

▲ 30일 바스라 인근에서 이라크군의 로켓포 공격을 받은 영국군 제 40 특공대 소속 군인들이 밀란 대전차 로켓포를 발사하고 있다.
ⓒ 로이터 뉴시스
그러나 어떤 표현을 쓰더라도 영국군이 바스라와 움카스라를 점령하지 못한 것은 사실이고, 어떤 변명에도 불구하고 미국의 찌푸려진 눈총을 받아야 하는 것은 사실인 모양입니다.

전후 복구 문제에 대해서도 이견이 나타났습니다. 모두연설에서 부시는 전후 문제를 개괄적으로, 그것도 후세인 이후의 이라크 통치 기구 문제에 대해서만 간략히 언급했습니다. 부시 발언으로만 보면 이라크 전후 복구에 유엔이 참여할 가능성은 전혀 없어 보입니다. 당장 구호품이나 보내라는 언급이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블레어의 시각은 다릅니다. 그는 "전후 문제에 대해서도 논의했다"고 밝히면서, "설왕설래가 많지만 우리 입장은 아조레스에서 부시 대통령과 내가 천명한 것, 즉 유엔과 우리 연합국들과 협력국들과 쌍무적 지원국들과 함께 일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블레어는 전후 복구 문제의 주도권을 유엔이 가져야 한다고 강조한 것입니다. 그는 또 "우리는 유엔안보리에 이라크 영토 보존을 확인하고 신속하게 인도주의적 원조를 전달하고, 전후 적절한 이라크 정부를 수립하고 인준하기 위한 새 결의안을 요청할 것"이라고 덧붙였습니다.

또 블레어는 기자의 질문에 답하면서도 "전후 이라크 정부 구성에는 유엔이 개입해야 하며, 이라크 신정부가 유엔의 승인을 받아야 한다는 점이 중요하다"고 강조까지 했습니다.

유엔안보리가 이라크침공 결의안을 마련해주지 않은 것에 단단히 토라진 부시는 전후 복구에 유엔이 발붙일 기회를 주고 싶지 않은 거겠지요. 그러나 블레어는 전후 이라크의 정치와 경제 복구 주도권을 유엔에 주어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블레어가 비록 그게 '부시와의 합의 사항'이라고 강조하기는 했지만, 글쎄요, 부시는 별로 내키지 않는 것 같은 눈치입니다.

유엔에 대한 부시와 블레어의 입장이 다르다는 것은 중요한 차이입니다. 미국은 이제 세계 질서를 유지하는 데에 더 이상 유엔이 필요 없다는 입장인 듯합니다. 개전 직전 럼스펠드 미국방장관은 "유엔은 20세기 패러다임"이라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그건 통과 가능성이 없는 이라크 침공 결의안을 철회하면서 그냥 홧김에 해본 말은 아니라고 봅니다. 혼자 세계질서를 유지할 수 있다고 믿는 사람들에게는 유엔은 이제 걸리적거리는 방해물로만 보이는 거겠지요.

그러나 블레어로서는 비록 지금은 미국과 행동 통일을 하고 있지만 이후 미국의 독보적 주도권을 인정하고 싶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따라서 날로 무력해져가는 유엔에 힘을 실어주어 미국을 견제해야 한다는 심산이 아닌가 싶습니다.

말하자면 영국은 스스로를 프랑스-독일과 차별화하면서 실리는 챙기되, 21세기 세계 질서 주도권을 완전히 미국에 넘겨주지는 않는 방안을 모색 중이며, 그 해결책을 유엔에서 찾는 것 같습니다. 그때가 되면 영국은 다시 유럽의 오랜 '연합국'들과 제휴해 미국에 대항할 생각이겠지요.

세계 질서 주도권을 둘러싼 유엔에 대한 부시와 블레어의 상반된 입장은 그들이 사용한 용어에도 드러나 있습니다.

그 동안 세계는 유엔을 중심으로 한 협력을 '연합(alliance)'라는 말로 표현해 왔습니다. 2차대전의 '연합국(Allies)'와 '연합군(Allied Forces)'이 바로 그런 것입니다. 이런 뜻의 '연합'은 1950년의 한국전과 1991년 걸프전 때까지만 해도 유효했습니다. 유엔 결의안에 따른 '연합군'이 결성될 수 있었으니까요.

그러나 이번 이라크전은 유엔 결의안이 없는 미국과 영국의 단독결행입니다. 따라서 유엔의 주도권을 인정하는 '연합(ally, allies, alliance)'이라는 말이 부적절해진 것이지요.

그래서 미국은 새로운 말을 쓰기로 결정했습니다. 그게 바로 '코울리션(coalition)'입니다. 이 말은 원래 부시가 '코울리션 오브 윌링(Coalition of the Willing)'을 제시하면서 처음 쓴말인데, 주로 '미국의 의지를 지지하는 나라들'을 가리키는 뜻이겠습니다.

'미국의 의지'란 '테러 근절 의지'로 처음 천명된 것이지만 날이 갈수록 확대되고 있습니다. 이젠 '세계 질서 재편 의지'로까지 발전한 것으로 보입니다. 미국은 지금 자기 엄지손가락을 내밀면서 '코울리션 할 나라는 여기 붙어라'면서 세를 결집 중입니다. 유엔 '연합'을 왕따시키려는 것이지요.

이날 회견에서도 부시는 이라크 침공 지지국과 그 군대를 가리켜 '코울리션(coalition)'이라는 말을 썼습니다. 모두연설에서만 부시는 그 말을 다섯 번이나 썼더군요.

"영국, 미국, 호주, 폴란드 및 기타 코울리션 군(coalition forces)은 전쟁의 의무와 희생을 함께 나누고 있다." "코울리션 군(coalition forces)은 적과 대항하며 하루하루 꾸준하게 진격하고 있다." "우리는 영국군과 다른 모든 코울리션 군(coalition forces)의 용감한 프로페셔널리즘에 감사를 드린다." "우리 코울리션(coalition)은 다가올 난관을 이라크 국민들과 함께 견뎌낼 것이다." "역사는 가공스런 위험의 격퇴보다 우리의 코울리션(coalition)을 더 요구한다."

부시가 '앨리'보다 '코울리션'을 선호한다는 점은 기자와의 문답에도 잘 나타나 있습니다. 한 기자가 "어째서 전통적으로 확고한 연합국(firm allies), 즉 프랑스나 독일이나 터키 같은 연합국의 지원을 받지 못했느냐?"고 물었습니다. 부시의 대답입니다.

"우리는 커다란 '코울리션'을 갖고 있다. 사실 지금의 '코울리션'은 참가국 규모로 볼 때 1991년의 '연합'보다 훨씬 더 크다. 코울리션의 크기에 나는 대단히 만족한다."

'연합'을 물었는데 '코울리션'으로 대답했습니다. '연합' 개념을 축소시키고 대신 '코울리션' 개념을 부각시키려는 부시의 의도를 읽을 수 있습니다.

기자가 재차 "서방 '앨리'가 다 빠지지 않았냐?"고 묻자 부시는 다소 신경질적으로 "(코울리션에는) 서방 '앨리'도 많다. 리스트를 제시할 수 있다. 앨리와 앨리와 앨리들이 줄지어 우리와 함께 해왔고 지금도 우리 편"이라고 대꾸했습니다. '연합(ally)'이라는 말을 희화시키는 느낌까지 주는 답변입니다.

'코울리션'에 집착하는 부시와는 반대로, 블레어는 그의 연설에서 '코울리션'이라는 말을 단 한 번 썼을 뿐입니다. 그는 "코울리션 앨리(coalition allies)인 영국군과 미국군의 프로페셔널리즘과 성실성을 치하하고자 한다"고 했지요. '코울리션'이라는 말을 쓰면서도 '앨리'라는 말과 나란히 쓴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코울리션'을 마지못해 쓰고 있다는 인상을 주는 대목입니다.

반면에 블레어는 기자들에게 답하면서 '앨리'라는 말을 다섯 번이나 썼습니다. 그 중에서도 블레어가 전후 복구 문제를 유엔이 주도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덧붙인 말을 한번 보십시오.

"그 작업(유엔 주도의 이라크 복구)의 구체적인 실행방안에 대해서는 아직 연합국들(allies)과 상의해야 할 것이 많다. ... 우리는 그 문제들을 유엔과 다른 연합국(allies)들과 논의해나갈 것이다."

블레어는 '유엔과 연합국'의 중요성을 계속 강조하고 있습니다. 옆에서 듣고 있는 부시에게는 여간 귀에 거슬리는 일이 아니었을 겝니다.

물론 영국과 미국의 당면 문제는 일단 후세인 저항군을 패퇴시키고 바그다드를 비롯한 이라크 전역을 '접수'하는 일입니다. 따라서 부시와 블레어 사이의 이견은 당분간 물밑에 가라앉아 있겠지요.

하지만 전쟁이 끝나고, 미-영 '코울리션' 군이 후세인을 몰아내면, 그 이견은 표면화될 것입니다. 그때쯤 블레어는 새 '코울리션'을 수립하려는 미국의 의도를 잘 알면서도 자꾸 '유엔과 앨리'를 들먹거린 대가를 단단히 치러야 할지도 모릅니다. 전후 이라크 복구 사업에서 영국 기업들이 왕따 당하는 것을 포함해서 말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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