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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월 13일 세종문화회관 콘퍼런스홀에서 열린 '홍암 나철 선생의 독립운동 재조명' 학술대회
ⓒ 오마이뉴스 공희정
"여러 의사(義士)들이여, 여러 의사들이여! 금일지사(今日之事)는 실로 대한독립을 유지하기 위한 유일한 길이요, 우리 2천만 중생의 생사문제다. 여러분, 진실로 자유를 사랑할 수 있는가. 청컨대 결사의지로 이 오적을 죽이고 국내의 병폐를 소제하면 우리들 및 우리 자손들이 영원히 독립된 천지에서 숨을 쉴 수 있으니 그 성패가 오늘의 일에 달려 있으며 여러분의 생사 또한 여러분에게 달려 있습니다."

위 글은 대종교의 창설자이자 독립운동가인 홍암 나철(1863-1916)선생이 1907년 3월 21일 발표한 〈간신을 목베는 글〉의 일부로 이 글에는 을사5적을 처단해야 할 이유가 담겨있다.

지난 13일 오후 세종문화회관 콘퍼런스 홀에서는 홍암 나철선생의 독립운동을 재조명하는 학술회의가 우리역사바로알기시민연대(대표 박성수) 주최로 개최됐다.

홍암 나철 선생은 정신적인 독립운동을 주도한 독립운동가로 안중근·윤봉길 의사가 극단적인 방법으로 독립운동을 실천한 의사라면 나철 선생은 민족정신을 일깨움으로써 일제에 맞서고자 한 사상가라고 할 수 있다.

이날 학술회의는 윤병석 인하대 명예교수의 사회로 진행됐으며 3가지 주제를 놓고 토론하는 방식으로 이뤄졌다.

▲ 홍암 나철 선생
김창수 동국대 명예교수는 '항일외교와 을사오적의 처단의거'란 주제로 나철 선생의 항일 운동을 조사해 발표했고, 김호일 중앙대 교수(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장)은 '민족종교의 창시와 항일독립운동'이란 주제로 홍암의 종교운동과 항일독립운동을 조명했다.

이어 박성수 한국정신문화연구원 명예교수는 '항일독립운동과 민족사관'이란 발표문에서 홍암 항일운동의 사상적 배경을 추적했다. 또한 유준기 총신대학교 부총장, 윤병석 인하대학교 명예교수, 김동환 국학연구소 연구위원 등이 각각 주제별 토론을 맡았다.

이날 사회를 본 새천년평화재단 유영구 사무총장은 "지금까지 단순히 대종교 창시자로 일반에게 알려져 있었지만 이번 학술회의를 통해 그의 다양한 항일 투쟁 운동을 재조명하게 됐다"고 말했다.

또 우리역사바로알기시민연대 박성수 공동대표는 "홍암선생은 우리에게 민족정신을 일깨워 세계역사상 유례가 없는 반세기 한국 독립운동사를 가능하게 한 정신적 지도자였다"면서 "선생이 돌아가신 지 86년 만에서야 비로소 선생의 고귀한 뜻을 기리고 흠모하는 학술회의를 갖게 되어 송그스러울 따름"이라고 말했다.

한편 이날 행사를 주최한 우리역사바로알기시민연대는 "이번 학술회의를 시작으로 잘 알려지지 않은 역사속의 위인을 재조명하는 학술회의를 지속적으로 개최할 것"이라고 밝혔다.

또 나철선생 '독립운동의 아버지' 추대위원회 위원장을 맡은 김희선 의원은 선언문을 통해 "홍암 나철선생은 독립운동의 효시이며 독립운동의 아버지"라면서 "그동안 역사에 가려져 나철 선생의 깊고 뜨거운 민족혼이 드러나지 못했음을 자성하며 이와같이 민족정기를 세우는 작업은 특히 이 시대의 젊은이들을 위한 정신교육의 바탕이 될 것"이라고 밝혔다.

다음은 이날 학술회의에서 있었던 각 주제별 논문을 요약한 것이다.

항일외교와 을미오적의 처단의거

홍암 나철(1863-1916)은 국조(國祖) 단군을 신앙하는 대종교(大倧敎)를 창시한 종교사상가로 또는 일제의 침략에 저항한 항일 민족운동가로, 그리고 구한말 민족이 위기에 처했을 때 민족의식을 고취시킨 애국계몽운동가로 너무나 널리 알려져 있다. 또한 그는 한국 근현대사의 인물 중 특히 사상과 행동을 일치시킨 보기 드문 선구자이기도 하였다.

▲ '홍암 나철 선생의 독립운동 재조명' 학술회의 사회를 맡은 윤병석 인하대 교수
ⓒ 오마이뉴스 공희정
그가 1909년 단군교를 창시하고 1910년 이를 대종교로 개창한 것도 단군신앙이라는 민족종교를 사상적 기반으로 삼아 항일 민족운동을 전개하기 위한 것이었다. 따라서 그가 창시한 대종교는 단순한 종교단체가 아니라 애국계몽단체이며 항일민족운동단체였다고 할 수 있다.

그는 구한말 일제에 의한 한국침략이 본격화하면서 국권회복을 위한 가장 선결문제가 되는 것은 민족의식의 고취에 있다고 보고 애국계몽운동에 참여했으며 러일전쟁 이후에는 민간차원의 항일외교와 乙巳五賊 처단을 위한 의열투쟁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이 좌절되자 항일민족운동을 사상적으로 뒷받침하고 지속적인 운동으로 전개하기 위하여 대종교를 창시하여 민족의식을 고취시켜 항일민족운동의 지도이념으로 삼았던 것이다.

그가 호남의 한미한 가문에서 태어나 성장한 무렵은 국내외적으로 위기의 시대였다. 그는 원래 漢學의 교양을 쌓았으나 20세 중반을 넘어서면서 당시의 고급관료인 김윤식의 지도를 받으면서 개혁사상에 눈뜨게 되었다. 따라서, 그는 과거를 통해 관직에 올랐으나 이에 오래 머물지 않고 구국운동에 투신하게 된다.

그의 사상경향은 스승인 김윤식의 영향을 받아 균세외교와 내수자강의 점진적 개화를 지향하는 동도서기파에 가까운 경향을 보이고 있다. 그가 국권이 상실되어 가는 위기의 시대에 지식인의 민족운동인 애국계몽운동의 일환으로 유신회와 호남학회에서 활동한 것은 그것이 민족의식을 고취하기 위한 구국운동이라 할지라도 그가 근대문명에 대한 관심이 컸음을 보여준다.

그는 국가가 멸망의 위기에 처하자 결연히 일어나 동양평화론에 바탕을 둔 구국항일외교에 투신하여 4차례에 걸쳐 일본을 왕래하며 외교활동을 벌인다. 이의 실패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구국운동의 일환임은 물론이다. 그리고, 국권의 일부인 외교권을 상실한 을사조약 체결을 승인한 을사5적에 대한 처단의거는 강력한 일제에 저항하는데 선택의 여지가 없었을 때 단행한 최선의 방법이기도 하였다. 이는 항일민족운동사에서 1909년의 안중근 의거, 1920년대의 의열단 의거, 1930년대의 한인애국단 의거가 지니는 항일 의열투쟁의 원류를 이루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되는 것이다.

요컨대, 나철은 뛰어난 항일민족운동가로서, 또는 민족종교의 창시자로서 사상과 행동을 일치시킨 보기 드문 역사상의 인물이었다고 할 수 있다.

민족종교의 창시와 항일독립운동

대종교 교조 나철은 일제 침략으로 국운이 기울자 과감하게 관직을 버린 후 국권수호운동에 투신하였다. 그는 암울한 시대상황에 처하여 오로지 국권회복을 위한 우국적인 삶을 살았다. 1904년 비밀결사단체인 유신회를 조직한 그는 청년지사들을 규합하였다.

▲ '이날 학술회의에서 '항일독립운동과 민족사관'을 주제로 발표한 박성수 한국정신문화연구원 명예교수
ⓒ 오마이뉴스 공희정
나철은 먼저 외교적인 노력으로 국권을 수호하고자 4차례에 걸친 대일외교항쟁을 전개하였다. 그와 동지들의 노력에도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말았다. 이러한 가운데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되는 등 일제의 침략은 가중되었다. 외교활동에 한계를 느낀 그는, 친일정권 타도를 위한 자신회를 조직하였다. 곧 '을사5적' 처단이라는 의열투쟁의 방략이었지만, 역시 소기의 성과를 거둘 수 없었다. 이와 병행하여 대한자강회·호남학회·국채보상운동 등 다방면에 걸친 계몽활동도 전개하였다. 이러한 활동도 「사립학교령」·

「학회령」 등의 시행으로 침체기에 직면하고 말았다. 이에 1909년 오기호·이기 등과 함께 단군교를 중광하였다. 목적은 민족주체성 확립과 자주 독립사상 고취였다. 당대의 지사들은 단군교에 입교하는 등 교세가 확장되자, 위협을 느낀 일제는 단군교의 포교활동을 금지시켰다. 그는 1910년 교명을 대종교로 개칭하고 일제의 감시와 탄압을 피해 대종교 총본사를 중국으로 이전하였다. 중국으로 대종교 총본사를 이전하고 망명한 그는 민족교육을 통한 민족주체성을 고취시켰다. 아울러 교단조직 정비와 포교활동을 통한 항일독립운동도 활발하게 전개하였다. 1910년대 서간도 지역 항일무장투쟁은 이러한 기반 위에서 가능할 수 있었다.

그는 일제의 간악한 탄압을 견디다 못해 1916년 순국하고 말았다. 이는 '단순한'하거나 소극적인 행위는 아니다. 종교인으로 민족정신을 일깨우는 차원 높은 순교였다. 그런 만큼 나철은 우국적 삶을 실천한 행동인이요, 독립운동의 초석을 다진 종교가요, 진정한 독립운동가였다.

항일독립운동과 민족사관

홍암 나철 선생의 독립운동은 외교와 의열 투쟁으로 끝나지 않았다. 대종교를 창시함으로서 정신운동 또는 정신혁명으로까지 뻗어 나갔다. 이 점에 선생의 독립운동이 갖는 큰 특징이 있었다 하겠다. 만일 그렇지 않았다면 무단통치하의 광복단 운동(1913) 그리고 3.1운동을 촉발시킨 대동단선언(1917)과 대한(무오)독립선언(1918)으로 발전되지 않았을 것이고 나아가서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수립과 봉오동·청산리대첩이라는 큰 역사적 성과를 거두지 못했을 것이다.

선생이 창시한 대종교는 우리나라 독립사상의 정신적인 지주가 되었으며 세계 역사상 유례를 찾아 볼 수 없는 40년 한국독립운동사를 가능하게 하였다. 대종교의 민족사관은 대한사관에 그 특징이 있었다.

첫째 조선왕조의 멸망은 모화사상과 사대주의에 그 근본 원인이 있었다. 독립운동을 하는데 있어서 가장 유의하여야 할 점은 외래사상과 외래종교에 현혹되어 또 다시 사대주의 국가가 되는 것이다. 우리 것을 존중하고 잘 간직하는 정신이 없는 한 진정한 자주 독립은 바랄 수 없다.

둘째 우리 민족사는 단군조선과 부여로 시작되는데 그 갈래는 둘이었다. 하나는 고구려--발해--요--금--청으로 이어지는 북방계열의 민족사요 다른 하나는 신라--백제--고려--조선으로 이어지는 남방계열의 민족사이다. 이 중 북방계열의 민족사는 중원을 통일하는 위업을 달성하였으나 지금은 중국에 편입되어 소멸하여 버렸고 단지 남방계열의 가느다란 민족사만 현재 남아 있다.

고려 때 몽고의 침략과 조선왕조 때 임진왜란 그리고 일제침략은 모두 우리 민족이 한쪽 가닥을 잃어버린 상태에서 당한 수모였다. 이제 우리는 절름발이 민족사 시대를 지양하고 본래의 대한민족사의 새 시대를 창조하여야 할 것이다. 우리 민족은 본시 강한 민족이었다. 그럼으로 다시 강한 민족으로 거듭 태어날 수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민족고유의 단군신앙을 반드시 회복하여야 한다.
이 같은 대종교 특유의 민족사관은 박은식 신채호 중인보 등 민족사학자들에게 계승 발전되었으나 애석하게도 오늘에 이어져 오지 않고 있다.


홍암이 1907년 3월 21일 발표한 <간신을 목베는 글〉

여러 의사(義士)들이여, 여러 의사들이여! 금일지사(今日之事)는 실로 대한독립을 유지하기 위한 유일한 길이요, 우리 2천만 중생의 생사문제다.

여러분, 진실로 자유를 사랑할 수 있는가. 청컨대 결사의지로 이 오적을 죽이고 국내의 병폐를 소제하면 우리들 및 우리 자손들이 영원히 독립된 천지에서 숨을 쉴 수 있으니 그 성패가 오늘의 일에 달려 있으며 여러분의 생사 또한 여러분에게 달려 있습니다.

재주 없는 인영(寅永)이 이러한 의무를 주창함에 눈물을 흘리며 피가 스미는 참담한 마음으로 엎드려, 피가 뛰며 지혜와 용기를 갖춘 여러분들의 면전에 이 의(義)를 제출합니다.

여러분! 각자 각자 순결한 애국심을 불러 일으켜 흉악한 매국적을 빨리 처형하고 우리나라의 독립을 전 세계에 드높이 선포하면, 인영이 비록 18의 지옥에 들어가더라도, 지독한 고통을 당하더라도, 기쁘고 즐겁기 한량없겠습니다.

이완용은 러시아, 일본에 붙어서 조약체결의 선두에 섰으니 꼭 죽여야 함. 권중현은 이미 조약체결을 인정했고 농부(農部)의 일국(一局)을 외인에게 양보했으니 꼭 죽여야 함. 이하영은 조약체결이 그 손에서 나왔는데도 속으로는 옳다하고 겉으로는 그르다 하여 백성을 속였으니 꼭 죽여야 함. 민영기는 조약체결이 안으로는 옳고 밖으로는 그르다 하여 전국 재정을 모두 외인에게 주어버렸으니 꼭 죽여야 함. 이지용은 갑신년의 의정서와 을사년의 신조약이 모두 그 손에서 나왔고 매관매직하여 나라를 망하게 했으니 꼭 죽여야 함. 박제순은 외부대신으로 조약을 맺어 나라를 팔고 또 참정대신으로 정권을 양도했으니 꼭 죽여야 함. 이근택은 이미 조약체결을 허락하고 공을 세운다 하여 폐하를 위협하고 백성들에게 독을 뿌렸으니 꼭 죽여야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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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꽃같은 남자. 산소같은 미소가 아름답다. 공희정기자는 오마이뉴스 대학기자단 단장을 맡고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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