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합리적인 해법을 지향하고자 합니다. 타인을 존중하고 차이를 인정하고자 합니다. 모두들 잘 사는 세상을 바라지만 그런 세상은 이제까지 없었습니다. 그래도 그것을 만들어보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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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8년의 고됨 뒤에 읽는 이른 글은 최고다. 기자의 말처럼 2019년 또 다시 비참한 일상이 계속된다고 해도 잃는 중에 얻어지는 것이 있다.
  2. 쥐구멍에 볕들날이 영원히 없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고 이 생각은 얼마 후에 확신으로 굳어질 듯하다. 댓글 보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눈 앞에서 기적이 일어나도 잘 믿지 않는다. 아니 믿지 않는다. 몰라서 그렇다는 데에 그 심각성이 있고 반면 희망도 있다. 듣고 싶은 것만 들으면 어느 미래에 후회하게 되어 있다. 타자에 대한 인식이 가장 큰 문제다. 여자라는 이유로 또 남자라는 이유로 가족끼리 싸운다. 우리는 이미 지난 촛불거리에서 정와 반정의의 깊은 갈등과 그 골의 깊이를 충분히 경험했다. 그 이후로 어느 쪽을 정의라고 하든 반대를 다루는 기술연마에만 힘쓰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편가르기는 싸움을 위한 기본 전제임에는 분명하지만 가르지 않아야 할 선에 이젠 왜곡까지 더해졌다. 선동으로 이미 곪았다.
  3. 유도될 수 밖에 없는 기자의 상식 넘는 허점은 처음부터 제했어야 했다. 인간의 존엄이 이런 일을 하는 근본 목적이라면 인간과 생명에 대해 좀 더 진지해지기를 권한다. 짓밟혀온 여성의 인권, 서열화된 한국의 가부장적 문화, 숨막히는 남녀불평등의 기치가 너무 눈부시게 밝거나 도리어 기자의 생각과는 달리 너무 희미한 것은 아닌지 고민해 볼 일이다. 아래 위 그리고 사방 전체를 보지 못하면 제대로 된 형상을 보지 못한다. 더구나 분노하면 정의는 그 색을 주인의 눈색에 맞춘다. 무엇을 위해서? 더 둘러봐야 하지 않을까.
  4. 언어학적인 것에서 파생되는 관습, 정서를 유도하는 유전 혹은 생물학적 문제 등 많은 것들을 고려해서 좀 더 강한 지원군을 꾸리고 싸움에 임해야 했다. 서열과 평등의 문제를 야기하는 원인을 너무 단순하게 본 나머지 애궂은 피해자가 몇몇 생길 것으로 보인다. 기자가 의도하지 않았다하더라도, 선동은 정치적으로는 때로 큰 효과를 발휘하겠지만 너무 단순하게 보고 있거나 서열과 평등의식에 사로 잡혀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그 둘 다 악이 아니라 가치중립적인 도구에 가깝거나 누군가가 만들어 낼 명제 생산에 유용할 뿐이다. 학문도 전문성도 예술이나 문학, 종교까지도 이러한 류의 문제를 깨끗하게 해결한 적이 없다. 그래서 지혜를 우선 구했어야 했다. 남편 어머니에게 “숙자님”(가칭)이라고 부를 수도 있다는 무모함으로
  5. 그런데, 이미 언급한 것처럼 과연 지혜로운가는 별개로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한다. 시기, 공간, 과정 등을 고려해야 한다. 지난한 싸움에서 이기고 목적을 달성했다고 가정하자. 빠뜨린 것은 여전히 빠뜨린 채로 미완성의 찝찝함을 남기고 한구석에는 가슴 뻥 뚫린 남편 어머니가 공허한 눈물을 흘리고 있을지고 모른다. 아들 아내(기자의 표현을 빌리면 아들의 아내는 며느리가 아니라 아들의 아내, 아들 아내가 맞다)의 분노와 파괴성에 주눅들어 있으면서도 자발적인 동의를 하고 있음을 보이느라 두 배의 힘든 여생을 살고 있을지도 모른다. 독자를 끌거나 흥미를 위한 것이 아닌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데 그렇다면 남편 어머니가 기자에게 “영희님”(가칭)이라고 부르게 되는 결론의 방향은 처음부터 없었어야 했다. 관습도 있지만
  6. 좋은 시도이지만 시기상조다. 그래서 좋은 시도가 아니다. 특히 공간적으로 한국 남녀평등사의 한 과정에 기준을 두고 프로젝션을 하더라도 메울 수 없는 큰 간극이 있다. 근데 기자는 한가지 목적에 전념한 나머지 그 자신의 인식이 전체를 조망하는 빛을 잃었다. 정의는 목적을 만들고 목적은 수단을 합리화해서 또 다른 정의를 정의하는 차원이 복잡화된다. 합리화가 나쁘다는 의미가 아니다. 더구나 평등과 서열타파는 분명하고 실질적인 정의로운 명분이다. 선동에는 큰 효과가 있을 것으로 보이고 기자의 의도대로 욕하는 댓글러가 증가할 것이며 남편과 남편 아버지, 남편 어머니는 고민과 심지어는 눈물로 힘든 시간을 보내야 할 것이다. 주위의 자원을 죄다 흡수해서 무기로 활용할 능력이 있으니 해 봄직한 싸움이라고 생각된다.
  7. 거나 너무 단순하거나, 또는 너무 지나치거나 여전히 모자라거나, 또는 서포터즈의 응원에 너무 성급하게 기댄 것은 아닌지. 나는 나 외에 세상 모든 사람들 10억이 아니라고 해도 내가 맞으면 그 길을 가겠다. 민주적 방식의 지지나 연대성에서의 인정이라도 진실을 보장해 주지는 않는다. 기자는 10억이 아니라고 해도 꿋꿋이 예스를 할 것으로 보인다.
  8. 역사상 남성과 여성이 평등했던 적이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역사에 등장하는 주류사회는 항상 남성이 서열상 우위에 있었고 호칭 이전에 이러한 인식이 많은 불평등을 야기해 온 것이 사실이다. 그래서 호칭에서 생기는 불평등과 서열에서 비롯되는 불편을 해소하고자 하는 기자의 시각은 신선함을 넘어 분쟁의 도화선에 제대로 불을 붙였다. 남성 위주의 서열을 타파하고 이상적인 평등환경이 구현되기까지는 요원해 보인다는 것이 솔직한 심정이지만 좋은 시도라는 점만은 개인적으로 인정한다. 나는 4회, 3회를 거쳐 거슬러 올라가며 댓글을 쓰고 있다. 응원한다는 말이다. 근데 정말 핵심은 이것일까? 나야말로 뭔가를 못보고 있지 않은가, 나라면 어차피 한 고민 어차피 들어선 길 좀 더 고민하며 사고도 해 보겠다. 너무 복잡하
  9. 서열이나 호칭과 같은 가시적인 것에서 단편적 해결방법을 끌어내기 보다는 인간자체에 대한 인식을 새로이 하도록 호의의 손을 내밀어 본다. 나는 기자 편이다.
  10. 한마디 하고 싶다. 호칭은 서열을 유도하거나 역으로 서열로 인해 생긴 호칭이 그 서열인식을 강화하기도 한다. 한국의 서열명칭에 문제가 있다는 것에도 동의한다. 바꿔야 한다는 주장과 그 인식에도 동의하고 지지를 보낸다. 그런데 왜 마음에 뭐가 걸릴까. 내가 생물학적 남성이라서 걸리는 것도 아니고 남성위주 역사와 사회, 은연중 교육을 통한 사고의 고착이 정서적 고착까지 유도하거나 강화해서 이러한 부조리한 느낌을 이 글에서 갖게 하는 건... 아닌 것 같다. 혹, 내가 모르는 뭔가가 있을 수도 있다. 인간의 인식과 여기에서 비롯되는 판단은 한계를 넘지 못한다는 것을 말하고 싶다. 주린 사람은 먹을 것만 참는다. 배고픔이 해결되면 더 이상 신경 쓰지 않는다. 문제는 배고픔의 원인이 단순치 않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