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초고령화로 달려가는 이 시대의 노인 문제를 알기 쉽게 이해하고 생각해보기 위해 다양한 노년 관련 영화를 통해 이야기를 풀어갑니다.[기자말]
* 영화의 주요 내용이 포함돼 있습니다. 
 
  영화 <땅에 쓰는 시> 포스터
  영화 <땅에 쓰는 시> 포스터
ⓒ 영화사 진진

관련사진보기

 
바라만 봐도 가슴 시원한 2시간의 명상

최근 다양한 소재를 다룬 노인 관련 영화가 많아져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면서도 공통적으로 노년기에 대한 부정적인 시선을 다루는 경우가 많아 보다 보면 우울해진다. 오늘 소개할 영화는 그런 노인 영화들과는 결이 많이 다른, 마음이 여유로워지는 명상 같은 작품이다.

최근 개봉한 다큐멘터리 <땅에 쓰는 시>는 대한민국 1세대 조경가인 정영선 선생의 철학과 그간의 작품을 다뤘다. 아시아선수촌 아파트, 아시아 공원, 여의도 샛강 생태공원, 선유도 공원, 예술의 전당, 서울 아산병원, 경춘선 숲길, 호암 미술관 희원, 아모레 퍼시픽 신사옥, 디올 사옥 등 다양한 조경 작품을 일구어낸 그의 '포트폴리오'를 보면 '아, 내가 갔던 저 곳도!'라며 아는 체를 하게 된다. 언젠가 한 번쯤 지나치며 자연 풍경에 감탄했던 대한민국의 이곳저곳에 그의 손길이 닿아있다.

영화는 그가 작업한 다양한 조경 현장 곳곳을 스크린 가득 담아내며 장면 하나하나를 한 폭의 풍경화로 치환한다. 관객들은 그 풍경 속 벤치 한 켠에 앉은 듯한 여유를 느낄 수 있으며, 나무와 풀을 매만지는 바람마저 스크린을 뚫고 불어와 코를 간질이는 듯 하다.

카메라는 또한 정영선 선생에 대해 논하는 많은 사람들과 마주한다. 조경실무 회사 대표, 도시 계획 전문가, 건축가, 그리고 정 선생에게 일을 맡긴 '땅'의 주인들. 그들이 말하는 정 선생은 대략 이렇다.

"여성으로서 처음 조경기술사가 되셨고 늘 새로운 길을 개척해 오신 것 같아요."

"고집이 너무 세죠. 그런데 말씀을 듣고 난 뒤 생각해 보면 결국 그 방식으로 해야 조경이 주변환경과 가장 잘 어우러진다는 것을 알 수 있죠. 결국 수긍할 수 밖에 없습니다."

"지금 당장보다 먼 미래를 생각해서 조경을 해야 한다고 항상 말씀하십니다."


연결자를 자처하는 82세 시인
 
  영화 <땅에 쓰는 시> 중
  영화 <땅에 쓰는 시> 중
ⓒ 영화사 진진

관련사진보기

  
어린 시절 할아버지와 아버지로부터 자연을 아끼고 존중하는 태도를 배웠다는 그는 학문적인 체계 속에서의 조경을 접한 다음에도 그 태도를 유지하고 있다.

"프로젝트가 시작되면 먼저 작업할 땅을 여러 번 가보고 주변 환경을 살핍니다. 나는 원래 그 자리에 있던 자연과, 사람을 연결하는 역할을 하는 거예요."

그런 '연결자'로서의 그의 역할이 가장 빛을 발한 작품 중 하나가 바로 아산병원의 지하 주차장 위 정원이다.

"처음에는 이 땅을 다 주차장으로 만들겠다는 것에 제가 반대하며 말했어요. 병원이라는 곳이 어떤 곳인지 생각해 보라고요. 몸도 마음도 아픈 사람이 많은 곳이지요. 환자고, 보호자고, 의사나 간호사고 남몰래 울고 싶은 사람이 마음 편히 흐느끼다가 갈 수도 있는 그런 나무 그늘을 만들어 주어야 해요. 그게 바로 자연이 사람에게 주는 배려일 테니까요."

그가 자연에 대해 가지는 경외심과 존중은 결국 사람을 향한 애정과 연대 의식으로 발현되고 있었다. 어릴 때부터 시를 읽고 썼으며 지금도 조경을 함에 있어 시를 참고한다는 그는 이제는 종이가 아닌 땅에 '가장 자연적이어서 가장 인간적인' 시들을 써내려가고 있었다.

존재 자체로 귀한 이 시대의 '선배 시민'
 
  영화 <땅에 쓰는 시> 중
  영화 <땅에 쓰는 시> 중
ⓒ 영화사 진진

관련사진보기

 
흔히 노인을 부르는 말 '늙은이'는 '늘 그런 이'의 준말이다. 최근 몇 년 전부터 노인복지학에서는 이 '늙은이'라는 말 대신 '선배 시민'이라는 단어를 쓰기 시작했다. 선배 시민이란 '시민으로서 권리와 의무를 인식하고 후배 시민과 함께 공동체를 변화시키려는 노인'이라는 뜻으로 주도적이고 주체적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삶을 살아간다는 점에서 늙은이와는 매우 상반된 개념이다.

영화를 보면 정영선 선생이야말로 '선배 시민'의 대표 인물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노령의 나이에도 현역으로 일하며 굳건한 철학대로 자신의 일을 주도해가는 직업 정신도 물론 그 이유가 될 것이다. 언제나 새로운 길을 개척해 나간다는 그를 아무도 '늘 그런 이'라고 부를 수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지금까지의 결과에 만족하지 않고 앞으로도 더 많은 일을 꿈꾼다. 이 나라와 사회를 위해서. 좋은 조경이 창조되기 위해서는 공무를 담당하는 행정가들의 인식이 바뀌어야 한다며 그들에게 자연과 인간을 배려하는 조경에 대한 인식을 어떻게 심어줄 수 있을지 고민한다. 또한 다음 세대를 위해 이 나라의 자연을 보존하고 아름답게 가꾸는 데 목소리를 내고 기여하겠다는 의지를 내비친다. 이런 모습이야 말로 그가 귀한 '선배 시민'으로 불릴 수 있는 진정한 태도다. 

조경은 혼자서는 할 수 없다. 대단히 많은 이들이 만나 머리를 맞대고 말을 섞으며 조율을 해가며 손을 보태야 하는 일이다. 아마도 정영선 선생은 평생 조경 일을 해 오며 자연스럽게 그 협업의 의미와 가치를 깨달았을 것이다. 혼자서는 의미 없음을, 그리고 기존의 자연과 동떨어진 조경은 가치가 없음을, 그래서 모든 것은 함께 조화를 이루어야 함을 아마 그는 인생 전체를 통해 후배들에게 알려주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땅에 쓰는 시>는 시적인 풍경과 함께 우리가 지향해야 할 나이듦, 닮고 싶은 노년의 모습을 2시간에 걸쳐 오롯이 담아낸 아름답고도 서정적인 영화로 기억에 남을 것이다.

덧붙이는 글 | 플랫폼 alookso와 브런치에도 게재됩니다.


태그:#노인, #정영선, #땅에쓰는시, #조경, #영화
댓글1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그런 엄마가 있었다> 작가. 문화, 육아, 교육 분야의 잡지에서 기자로 일했다. 결혼 후 힘든 육아와 부모의 질병을 겪으며 돌봄과 나이듦에 관심 갖고 사회복지를 공부한다. 소중한 일상, 인생, 나이듦을 이야기한다.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