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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완다 키갈리 풍경
 르완다 키갈리 풍경
ⓒ 이준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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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같이 50~60대의 나이에 장기간의 해외봉사를 꿈꾸지만, 한편으로 여러 상황으로 인해 고민하는 분들에게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으로 이 글을 적어 본다. 나는 지난 1년간 아프리카 르완다 고등학교에서 미디어교육 봉사자로서의 역할을 다하고 최근 다시 한국으로 돌아왔다. 

먼저 50대 중반의 가장으로서 자녀와 아내를 두고 단신으로 외국에 나가는 것 자체가 결코 쉬운 결단은 아니었다. 양가 어른들을 돌봐야 하는 책임도 있고 자녀를 양육해야 하는 부담이 동시에 존재했지만, 한편으로 지금 이때가 아니면 어려운 사람들을 향해 관심과 사랑을 실천하는 삶은 더욱 요원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간접적으로 후원하는 등 돕고는 있었지만, 직접 몸으로 행하는 것을 미루면 안 되겠다는 결단을 내렸다. 개인적으로 마음을 정하고 나서 아내와 아이들의 이해를 구했다. 다행히 아내가 직장생활을 하고 있어서 나의 수입이 궁하더라도 생활에는 지장이 없는 게 그나마 감사한 상황이었다. 가족 모두가 흔쾌히 받아들인 것은 아니었지만 나의 열망을 이해하는 쪽으로 받아들여주었다. 

그렇게 어렵게 떠나간 아프리카 르완다의 생활은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사명 또는 소명에 붙들려 왔지만, 낯선 타국에서 홀로 밥을 해 먹고 생활하면서 가르치고 사람들과 관계 맺는 것엔 어려움이 따랐다. 일주일에 한 번 한인교회에서 사람들을 만나 교제하는 것이 그나마 후련하게 한국말을 사용할 수 있는 하나의 낙이었다. 하루 일을 마치고 집에 돌아와 함께 밥을 먹으며 대화 나누고 고충을 토로할 수 있었던 가족과 아내가 없는 일상은 고독하고 힘겨운 시간일 수밖에 없었다.

이전까지는 국이나 찌개를 스스로 만들어 먹은 경험이 별로 없던 사람이었으니, 가져간 김치와 깍두기가 떨어지자 먹는 게 말이 아니었다. 서바이벌을 위해서라도 음식 재료만 생기면 이런저런 요리에 도전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해발 고도가 높은 키갈리에서는 걷는 것만으로도 체력 소모가 심했고 학교수업이 많은 날엔 더위와 에너지의 고갈로 뭐든 잘 먹어야만 했다. 

그렇게 버티기 위해 이것저것 음식을 만들어 먹기 시작하니, 미역국과 콩나물국, 된장국은 물론이고 나중엔 김치와 깍두기, 파김치까지 담아보면서 다른 단원들에게까지 반찬을 나누는 수준에 이르게 되었다. 

삶의 자리에서 쌓아온 각자의 경험, 누군가엔 빛이 되기도

파견 나온 단원들은 대부분이 청년들이지만 나와 비슷한 또래이거나 조금 더 높은 연배도 있어서 그분들과의 교제도 내겐 큰 힘이 되었다. 각기 40대, 50대, 60대 나이에 홀로 외국에 나오신 분들은 그 존재 자체가 대단한 결단과 각오로 무장된 분이어서 배울 점이 많았다. 

그중에는 결혼을 안 한 채여서 나오기까지의 결단이 쉬운 분도 계셨지만, 대게는 남편과 아내, 자녀를 두고도 어려운 결단을 내리신 것이라 의미심장했다. 대체로 자신이 일해왔던 분야의 연장선상에서 가르치고 봉사하며 섬기는 일을 맡아서 하셨는데, IT분야로 나오신 60대 봉사단원은 50대 초반엔 몽골과 남미로 파견되었다가 이번에 세 번째로 르완다로 나오신 것이다. 

자녀를 다 키웠으니 보람된 60대를 보내기 위해 봉사자로 오셨고, 아내를 초대해 한 달간 함께 생활하는 기쁨을 맛보고 계셨다. 코이카 단원은 임지에서 6개월이 지나야 가족 방문이 허락되고 1달 이내로 같이 지낼 수 있다. KCOC(국제개발협력민간협의회)는 가족에 관한 제한을 두지 않기에, 나 또한 아들과 함께 6개월간 함께 지낼 수 있었다.

르완다에서 나는 주로 학교에서 학생들을 만나면서 영상제작에 관한 지식을 나누는 데 초점을 맞췄다.

캠코더와 카메라 작동법을 가르치고 영상편집의 이론과 실습을 하는 즐겁고 보람된 시간을 가졌다. 물자와 장비, 전력이 부족한 곳에서 학생들이 영상기자재를 만지면서 실습하고 배운다는 것은  실질적이며 매력적인 과정이었다.

영어로 수업하고 가르치면서 스스로 준비도 많이 했고, 학생뿐 아니라 다른 선생님들과의 끈끈한 인간관계를 맺는 데에도 노력을 기울였다. 돌아보면 외롭고 힘든 시간도 많았지만, 소명에 붙들려 나눔의 가치를 실현하려 애쓴 시기였다.

청년이건 장년이건 그 멀고 험한 아프리카까지 와서 봉사하는 것은 종교적 소명에 이끌렸거나 인도주의적 사랑에 충실하지 않았다면 올 이유가 없는 곳이다. 커리어를 쌓거나 돈을 벌기 위해 이곳까지 오는 사람은 극히 드물어 보였다. 그런 숭고함이 깃들어 있기에 대체로 멋졌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우리에게는 넘쳐나는 것이 그곳에선 부족하고 귀하다. 여기서는 학식 있고 배운 사람들이 많아서 나의 존재가 유의미하지 않게 느껴질 수 있지만 그곳에서는 그런 경험치가 너무도 소중하게 쓰인다. 배움의 기회가 많지 않은 현지인들에게 귀중한 지혜와 기술을 전수해 줄 수가 있다.

그들은 선진국에 도달한 우리의 경제 문화적 수준을 자신들의 국가 모델 삼아 닮고 싶어 했다. 우리 국민과 국가가 가난을 딛고 성장한 오늘날의 번영을 이뤄낸 경험을 배우고 싶어 했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50~60대들은 가난했던 과거의 50~70년대를 경험했던 터라 현재 그들이 겪는 가난에 익숙하고 나아갈 방향도 잘 안다.     

그러한 이유로, 과감한 용기를 내서 그 가치 있는 시간에 도전해 보시라 권하고 싶다. 나 역시 가족이 함께 살아갈 여건이 만들어진다면 다시 어려운 나라로 나가고 싶다. 

이곳에서의 오천 원은 커피값 한잔에 불과하지만, 그곳에서는 일주일의 식량이 될 수 있으며 이곳에서의 흔한 지식이 그곳에선 값진 등불이 될 수 있으니 말이다.      
50~60대가 되기까지 삶의 자리에서 쌓아온 각자의 귀한 경험들이 사장되지 않고
또 한 번 빛을 발하는 기회를 잃지 않길 바라는 마음이다.      

태그:#자원봉사, #해외, #대기만성온달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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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여 년 간 영상물을 제작하고 있는 피딥니다. 사회학과 미디어를 공부했고 그간의 경험을 토대로 사유하고 성찰하는 글을 남기는 중입니다. 해외 프로그램을 제작하면서 아프리카와 어려운 나라를 다니는 중이며 자원봉사로 르완다에서 1년간 미디어를 가르치고 돌아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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