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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동
▲ 제초제 뿌리지 않아 풀이 무성한 과수원 상동
ⓒ 김보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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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대 중반이던 2016년 말, 나고 자란 수도권을 벗어나 비슷한 고민을 하던 친한 언니와 제주도 서귀포로 이주했고, 곧장 생애최초 자영업자가 됐다. 코로나 팬데믹이 한창이던 2021년 2월에 과수원을 빌려서 귤 농사를 시작했다. 이듬해에 지인들의 소개로 작은 과수원과 중산간에 있는 밭을 하나씩 더 빌렸다.

2023년 가을에 텃밭이 있는 집으로 이사하고 보니 농사를 시작하고서 해마다 농지가 늘었다. 우리에게 주신 하늘의 뜻이 농사에 있는 건가? 올해로 제주도 입도 8년차이고 농사를 시작한 지도 4년 차다. 내가 농사를 짓고 스스로 농민이라 일컬을 줄 꿈이나 꾸었을까, 마는 어느새 농민이 되었다. 생각해 보면 삶에 전조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20대에는 논이 갖고 싶었다. 쌀이 나는 논이 있으면 밥은 굶지 않겠지. 밥을 굶지 않으려고 직장도 아니고 돈도 아니고 논을 갖고 싶어 하다니. 직장도 돈도 의미가 없어지는 전쟁에 대한 두려움이 있었던 모양이다. 같이 산에 다니던 언니들과 얘기를 하다가 '논이 갖고 싶다'고 했더니 언니 하나가 '잘 됐다. 우리 아버지가 태안에 논이 있는데 인건비가 안 나와서 논을 놀리고 있단다. 너가 내려가서 농사를 지어라.'고 했다. 1990년대였다. 농사는 천하에 부지런한 사람들만 하는 일인 줄 알던 때라 내가 농사지을 생각은 하지 못했다.

30대에 친구들과 경기도의 땅을 빌려서 같이 고구마 농사를 지었다. 다같이 농사 지식이 없어서 물기가 많은 땅에 고구마를 심었다가 수확할 때 삽으로 파내느라 고생이 말도 못했다. 허리가 아파서 다닌 병원비를 생각하면 고구마는 평생 사먹는 게 이익인데 고구마 농사가 제일 쉽다고 다음 해에도 고구마 농사를 지었다.

제주도에 오기 직전인 2016년에 김포에 있는 밭에서 감자와 고구마 농사를 지었다. 하지 즈음에 감자를 캐서 며칠을 말렸다가 집에 두고 먹었는데 가을이 올 때까지 싹이 나지 않았다. 이상했다. 사먹는 감자는 1~2주만 지나도 싹이 나기 시작하는데 무슨 차이가 있어서 내가 키운 감자는 싹이 나지 않는 걸까?(내가 농사를 너무 잘해서일 리는 없지 않나.)

그때까지도 친환경 농산물이나 유기농에 큰 관심이 없었다. 제철에 나는 값이 싼 농산물이면 만족했다. 귤 농사를 시작하고 직접 농약을 뿌리게 됐다. 농약과 화학비료를 뿌리는 관행농을 했지만 제초제와 요소비료는 사용하지 않았다. 우리를 농사로 이끌어준 서귀포여성농민회 강문신 회장이 제초제를 뿌리지 않으면 귤의 당도가 올라간다고 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농사에 아무런 노하우가 없으니 제초제라도 뿌리지 말자고 결심했다.

농부 4년차에 풍월이 늘어서 이제는 비료와 농약과 수확의 관계를 조금 이해하게 됐다. 농사를 가르쳐 주신 선생님이 하라는 대로 한 첫해에는 과수원에 농약을 9~10번 정도 줬다. 이듬해에는 6번 주었고 작년에는 3번만 줬다. 신념이 있어서가 아니라 초여름에는 비가 너무 와서 농약 줄 시기를 잡지 못했고, 한여름에는 풋귤을 파느라 두달 반 동안 농약을 주지 않았고, 풋귤을 팔고 났더니 몇 그루 없는 극조생 귤이 잘 익었길래 연이어 파느라 농약을 줄 수 없었다.

아니, 신념이 있었다. 농약을 남들만큼 주지 않아도 맛있는 귤이 날 것이라는 믿음이. 수확량이 줄고 껍질이 못나지긴 하겠지만. 병충해에 시달린 귤 껍질은 못나져도 귤 알맹이는 멀쩡하다. 다만 껍질이 못나면 시장에서 좋은 값을 받기는 어렵다. 농약을 10번 줘서 (맛있고/없고) 예쁜 귤이 농약을 3번만 줘서 (달고) 못생긴 귤보다 좋은 값을 받는다. 못생긴 귤은 비상품(파치) 취급을 받기 때문에 개인 판매가 아니면 시장진입 자체가 불가하다. 일반 소비자가 맛있는 친환경 귤을 접하기 어려운 까닭이다.
 
노지 감귤 과수원은 제초제 외에 농약만 1년에 10-12회 친다. 비가 많으면 더 치고 가물면 덜 친다. 수확량 감소와 못난 껍질을 감수하면 그보다 적게 쳐도 맛있는 귤을 만들 수 있다. 2023년에 농약을 세 번 친 귤 중 특히 못생긴 귤이다.
▲ 못생긴 귤1 노지 감귤 과수원은 제초제 외에 농약만 1년에 10-12회 친다. 비가 많으면 더 치고 가물면 덜 친다. 수확량 감소와 못난 껍질을 감수하면 그보다 적게 쳐도 맛있는 귤을 만들 수 있다. 2023년에 농약을 세 번 친 귤 중 특히 못생긴 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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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지 감귤 과수원은 제초제 외에 농약만 1년에 10-12회 친다. 비가 많으면 더 치고 가물면 덜 친다. 수확량 감소와 못난 껍질을 감수하면 그보다 적게 쳐도 맛있는 귤을 만들 수 있다. 2023년에 농약을 세 번 친 귤 중 특히 못생긴 귤2이다.
▲ 못생긴 귤2 노지 감귤 과수원은 제초제 외에 농약만 1년에 10-12회 친다. 비가 많으면 더 치고 가물면 덜 친다. 수확량 감소와 못난 껍질을 감수하면 그보다 적게 쳐도 맛있는 귤을 만들 수 있다. 2023년에 농약을 세 번 친 귤 중 특히 못생긴 귤2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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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도에 살기 시작하면서 지방에 사는 사람의 감각이 생겼다. 농사를 지으면서는 농민으로서의 감각이 생겼다.

- 사무실로 출근해서 컴퓨터를 붙잡고 일할 때도 노동자, 기층민인데 그때는 그렇게 생각지 않았다. 농민은 빼박 기층민. 경찰의 물대포에 조준사격 당하지 않게 조심조심 살자.

- 농사는 대기 중 탄소를 지하에 저장하는 미래 지향적인 산업(인데 왜 아무도 그런 얘기 안 하는지?). 미래세대를 위해 가능한 오래오래 농사짓자. 그러려면 꾸준히 운동해야 한다.

- 우리 대통령이 1호 거부권을 발동한 사안은 양곡관리법이다. 세계에 식량위기가 여러 차례 왔어도 우리가 별일 없이 잘 사는 이유는 주식이 쌀이고 쌀 자급율이 98%에 이르기 때문이다. 우리 대통령의 거부권으로 향후 쌀 자급율이 떨어지면 우리도 세계식량위기에 고스란히 노출될 것이다. 역시 쌀농사 지어야겠다.

 
노지 감귤 과수원은 제초제 외에 농약만 1년에 10-12회 친다. 비가 많으면 더 치고 가물면 덜 친다. 수확량 감소와 못난 껍질을 감수하면 그보다 적게 쳐도 맛있는 귤을 만들 수 있다. 2023년에 농약을 세 번 친 귤 택배포장사진이다.
▲ 친환경 귤 노지 감귤 과수원은 제초제 외에 농약만 1년에 10-12회 친다. 비가 많으면 더 치고 가물면 덜 친다. 수확량 감소와 못난 껍질을 감수하면 그보다 적게 쳐도 맛있는 귤을 만들 수 있다. 2023년에 농약을 세 번 친 귤 택배포장사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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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에 농민은 우리나라 인구의 4.1%라고 한다. 우리나라 인구는 절벽 소리를 들으며 줄어들고 있지만 농민 인구 감소는 전체 인구 감소보다 더 빨리 진행되고 있다.

당연하다. 열심히 농사지어 가르친 자식에게 대이어 농사 지으라고 하는 부모가 있겠나, 도시에서 나고 자란 어느 초중고등학생이 농부를 꿈꾸겠나? 하지만 왜 당연한가? 나처럼 농사의 니은 자도 모르다가 이 좋은 일을 왜 더 많은 사람들이 하지 않는지 궁금해하는 사람도 있다. 왜 내 꿈 목록에는 농사가 없었을까? 지금은 교육과정에 '친환경 농사'라는 과목이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인데. 그러니 이 좋은 일을 더 많은 사람들이 할 수 있는 정책이 필요하다.

농사 지어서 먹고 살 수 있는 구조가 나와야 한다. 열심히 일해도 자기 앞가림을 할 수 없으면 자부심을 느끼기 어렵다. 우리는 모두 '입에 풀칠을 해야' 살 수 있는 유한한 존재인데 왜 내 입에 들어가는 것에 대해서 이토록 쿨할까? 국산 농산물이 비싸면 수입하면 된다는 식이다. '수확 후 처리'라는 것이 있다. 수확한 농산물이 오래 신선함을 유지할 수 있도록 수확 후에 농약을 치는 과정이다. 국산 농산물 중에도 수확 후 처리를 하는 것이 있고, 수입 농산물은 당연히 수확 후 처리를 한다. 그래야 컨테이너에 실려 배를 타고 이동해서 소분, 가공을 거쳐 내 앞에 놓일 때까지 견딜 수 있다. 국산 밀, 우리밀을 먹어야 하는 이유다. 친환경 농산물을 먹고, 가까운 곳에서 난 신선식품을 먹어야 하는 이유다.

22대 국회의원 후보 중에 농민 후보는 녹색정의당 비례대표 5번 김옥임 딱 한 명이다. 여럿이어도 부족한데 딱 한 명이다. 농사가 자식에게 물려줄 수 있는 자랑스러운 업이 될 수 있도록, 지구 환경과 미래 세대를 위한 농사를 지속할 수 있도록, 농사가 적성에 맞는 사람들이 농사를 더 많이 더 잘 지을 수 있도록, 그래서 건강한 먹거리와 건강한 몸, 건강한 환경으로 우리 모두 회복될 수 있기를. 농민 국회의원을 바라는 이유다.
 
2023년 12월 귤 수확하는 모습
▲ 귤 수확 2023년 12월 귤 수확하는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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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22대총선, #국회의원, #여성농민, #녹색정의당, #김옥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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