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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곳곳에 깃든 저마다의 삶과 기억, 숨은 이야기를 찾아 기록한다. '인천에서 인천으로'는 잊고 있던 인천의 삶, 시간, 공간 그리고 사람에 관한 이야기다. 이맘때면 떠오르는 추억이 있다. 네모반듯한 학교 건물, 흙먼지 날리며 친구들과 뛰놀던 운동장, 보물창고 같던 학교 앞 문방구... 국민학교에서 초등학교로, 오늘 학교 앞 풍경은 많이도 변했다. 하지만 어른도 아이도, 기다리는 사람도, 찾는 이도 그 안에 머무는 사람들은 여전히 봄날이다.[기자말]
논현초 은수, 서윤, 강희 ⓒ 임학현 포토디렉터
 
두근두근, 학교 가는 길

봄은 스프링(Spring)이다. 여기서 '톡', 저기서 '톡' 온 세상에 새 생명이 솟아오른다. 아이들의 꿈도 기지개를 켜고 활짝 깨어난다. 새 계절과 함께 새 학기가 시작되는 3월이면 아지랑이가 피듯 떠오르는 추억이 있다.

새 학기가 시작되기 전날, 반딱반딱 윤기 나는 노트와 새 책가방을 머리맡에 두고 잠들던 밤. 새로운 선생님과 친구들을 만나러 가는 길엔 어찌나 가슴이 두방망이질 치던지. 그리고 문방구 앞을 서성이며 보물찾기하던 오후의 하굣길... 그날의 설레는 마음을 따라, 오래된 동네 학교 앞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이 봄, 햇살 같은 아이들 
 
떡볶이 한 접시에도 웃음꽃을 환히 피우는 아이들. ⓒ 임학현 포토디렉터
 
논현초 수민이와 은서 ⓒ 임학현 포토디렉터
 
"○○○이란 친구가 있는데, 같은 반이 돼서 망했어요. 저한테 자꾸 개똥이라고 놀려요. 근데 걔도 사실 군밤 머리예요. 밤톨이...", "우리 셋은 새 학년이 되면 헤어지는데, 뭐 괜찮아요. 얘네 둘은 사귀거든요." 옆에 있던 여학생이 다급히 친구 입을 막는다. "야! 비밀이잖아." 뽀얀 얼굴에 분홍빛이 수줍게 번진다. 

남동구 소래초등학교 앞 분식집에서 이제 4학년이 되는 세 친구를 만났다. 가까이 있는 논현초등학교에 다니는 은수, 서윤, 강희. 새 학년을 맞는 기분을 물었는데 이야기가 자꾸만 다른 방향으로 흐른다. 그래도 아이들은 평범한 일상에 깃든 '진짜 행복'을 안다. "친구들과 떡볶이를 맘껏 먹어서 신나요." 찡긋 웃는 콧잔등 위로 봄 햇살이 살포시 내려앉는다.

조금 더 자란 아이들은 제법 의젓하다. "이제 6학년이 돼요. 조금 떨리지만 성장하는 거니까 공부도 더 열심히 해야죠." 논현초에 다니는 수민이와 은서. 둘도 없는 단짝이라는 두 학생이 서로에게 하고픈 말을 전한다. "지금껏 추억을 쌓아 온 것처럼 앞으로도 우리 함께하자.", "다른 반이 됐다고 나 모른 척하면 안 돼." 까르르 웃음소리가 봄바람을 타고 찰랑거린다. 최고 학년 누나들도, 아이는 아이다. 

인생의 새 학기
 
인천소래초 앞 '에바다떡볶이' 대표 양준석·조경희 부부 ⓒ 임학현 포토디렉터
 
학교 앞 작은 분식집, 이 자리에서 누군가는 새로운 인생을 연다. 양준석(60)·조경희(58) 부부는 한 달 전 이 가게를 이어받아 장사를 시작했다. 남편은 신도시의 도로 녹지를 조성하는 계약직으로 일하다 구조조정의 거센 바람을 맞았다.

아이가 다섯에 막내가 이제 겨우 열세 살이다. 다시 일해야 했다. 집안일만으로 벅찬 아내도 가족의 생계를 잇기 위해 나섰다. 부부는 말없이 음식을 만들다, 이따금 아이들을 보며 빙긋이 웃는다. 집에 있는 자식들을 떠올리리라. 아직 엄마 손이 필요한 막내에게 따뜻한 밥 한 끼 제때 해줄 수 없어 미안하고, 엄마 아빠 대신 동생들을 챙기는 큰아이들에겐 고마우면서 애틋한 마음이 든다. 그래도 가족이 있기에 살아가는 오늘이 행복하다. 

부부에겐 장사 일이 목숨줄이지만 마음 씀씀이는 그 면면이 넉넉하기만 하다. "일상에 감사하며 살아요. 설사 그날 적게 팔더라도 '오늘 하루도 잘 지나가고 있구나.' 하고 주어진 삶에 감사하지요."

부부의 꿈은 작고 소박하다. 힘닿는 데까지 열심히 일해서 자식들 뒷바라지하는 것. 이 큰 세상을 움직이는 힘은 이렇게 작은 소망에서 비롯된다.   

생에 아름다운 날들
 
어른이 될 아이와 어른이 된 아이, 창영초를 나온 민지와 아빠(왼쪽). ⓒ 임학현 포토디렉터
 
창영초 아이들의 영원한 이모, 김학자씨 ⓒ 임학현 포토디렉터
 
시곗바늘은 멈췄지만, 추억 너머로 시간은 흐른다. 동구 창영초등학교 앞에 하나뿐인 분식집, '이모네 주먹밥'. 그 집 한편엔 고장 난 시계가 걸려 있다. 13년 전, 창영초 아이들이 작고 여린 손으로 만들어 김학자(71) '이모'에게 선물한 것이다. "애지중지 다뤘는데, 어느 순간 시계 밥을 줘도 움직이지 않는 거야. 어찌나 서운하던지. 내겐 아직도 책각책각 시계 소리가 들려." 맑고 커다란 아이들의 눈망울도 눈에 선하다. 

자그마치 13년을 한자리에 있었다. 이제 어른이 될 아이들과 어른이 된 아이들이 손잡고 찾아온다. 창영초를 나온 민지 아빠도 이날 딸과 함께 분식집을 찾았다. 후미진 골목이 옛이야기로 오랜만에 생기가 돈다.

1980년대 오전·오후반이 끝나는 시간이면 학생들이 우르르 쏟아져 나왔다. "어느 가게나 학생이 바글바글했어요. 50원, 100원 하는 떡볶이 맛이라도 보려면 줄을 서야 했지요. 그때가 좋았어요." 

'희성아~ 학교 가자!' 이른 아침 집 앞에서 친구들이 부르는 소리에 헐레벌떡 학교로 뛰어가곤 했다. 전학 와 처음 만난 짝지는 평생 짝꿍이 됐다. 싱그러운 봄날이었다. 

이모의 나이는 어느덧 칠십을 넘어버렸다. 이제는 할머니라고 부르라 일러도 아이들은 한사코 이모라고 한다. 돌아보면 아이들과 함께한 시간이 봄처럼 짧게만 느껴진다. 그만큼 모든 순간이 아름다웠다. "이제 개학하면, 아이들이 몰려들 거야. 내 귀가 아프도록 깔깔대며 웃고 떠들겠지. 여기가 얘네들 안방이라니까." 다시 만난 아이들은 한 뼘 더 자라 있을 것이다. 

지금, 우리의 봄날 
 
대성문구사 대표. 최광민·손경선 부부. 문방구 사장님은 지금도 아이들의 선망의 대상이다. ⓒ 임학현 포토디렉터
 
학교 앞 문방구도 여전히 아이들의 보물창고다. ⓒ 임학현 포토디렉터
 
학교 앞 문방구는 예나 지금이나 아이들에게 보물창고다. 빼곡히 진열된 형형색색의 문구와 장난감에 두 눈을 반짝이며 마음을 빼앗기고 만다. 

미추홀구 용현초등학교 길 건너에 있는 대성문구사. '초일류 울트라 슈퍼 캡숑 나이스 베리 베리 짱'이란 문구와 함께 간판에 새겨진 캐릭터는 20년 세월의 더께만큼 나이 들었다. 최광민(69)·손경선(66) 부부의 시간도 그만큼 흘렀지만 마음은 늘 푸릇푸릇하다. "행복하세요~.", "건강하세요~.", "돈 많이~ 버세요~." 아이들이 날마다 새로운 인사를 건네기 때문이다. "세상이 변했어도, 아이들은 여전히 순수하고 예뻐요. 아이는 아이답게 밝고 맑게, 지금 모습 그대로 자라면 좋겠어요." 

이름은 못 외워도 얼굴은 다 기억한다. 훗날 어른이 되어 찾아온 아이도 한눈에 알아본다. 그러면 반가워서 서로 얼싸안고 눈물짓기도 한다. 유년의 기억을 따라 떠오르는 인연은 애틋한 법이다. 

시대의 흐름 속에 이 일대 문방구도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몇 년 전, 마지막까지 함께하던 문방구가 문 닫자 아내는 며칠을 앓아누웠다. "곁에서 오래도록 함께하길 바랐는데... 우리만 덩그러니 남아버렸어요."

아이들을 바라보며 주어진 대로 하루하루 살아갈 뿐이다. 오늘도 햇살이 깨어나지 않은 이른 새벽부터 가게 문을 열었다. 찾는 이는 많지 않아도, 한 학생이라도 발걸음을 되돌리지 않으면 된다. 

이 순간도 학교 앞 오래된 문방구는 지나온 날처럼 문을 활짝 열고 아이들을 기다린다. 
 
아이답게 맑고 순수한 인천 용현초 아이들, 모처럼 함께 학교 운동장을 맘껏 뛰었다. ⓒ 임학현 포토디렉터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굿모닝인천> 3월호에도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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