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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22년 전북 전주국립박물관이 일반 미술품 경매도록에 나온 동국진체의 글씨와 유사한 작품을 구입했다. 원교 이광사가 그의 아들에게 써준 호를 똑같이 판각한 '연려실(燃藜室)'이라는 편액이었다.

그해, 대구국립박물관이 조선시대 편액 전시를 기획하면서 아버지의 글씨를 아들이 새긴 편액을 제1호 전시품으로 선보였다. 240년 전 부친과 아들의 극적인 만남이라는 의미를 붙이면서 모든 관심이 거기에 집중됐다.

편액은 지난 2021년 국립중앙박물관이 전국에서 수집된 유물을 정리하는 중에 발견됐다. 그동안 존재가 확인되지 않다가 2021년 박물관 측이 일제강점기 조선총독관저에서 수습한 뒤 여러 경로를 거쳐 박물관 수장고에 있었던 사실을 밝혀낸 것이다. 200년 넘게 실물이 전해지지 않았는데, 이번 발견은 큰 성과였다. 

'조선현판 특별전'에 나온 편액엔 원교 이광사가 장남인 긍익에게 지어준 호 '연려실'의 각수가 정교하게 새겨져 있었다. 유년시절부터 역사에 관심이 깊었던 아들이 중국의 유향과 같은 큰 인물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이런 내력을 담은 호를 아들에게 내렸다.

부친 글씨 방에 걸어두고 써내려간 최고의 역사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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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친이 죽은 후, 긍익은 전남 완도의 신지도로 내려와 원교의 글씨를 자신의 방에 새겨 내걸고 필생의 역작이자 <조선왕조실록>과 더불어 조선 최고의 역사서로 꼽히는 <연려실기술>을 저술했다.

그가 집필한 조선의 야사인 <연려실기술>은 당대사회를 새로운 시각으로 들여다보는 통로였다. '명아주 지팡이를 불태워서 어둠을 밝혀 역사를 연구하는 방'이란 뜻의 연려실은 중국 한나라의 유향이라는 학자가 밤새 명아주 줄기를 태워 빛을 밝히며 역사 연구의 대가가 됐다는 고사를 품은 데서 유래한다.

그는 '술이부작'이라는 표현을 한 공자의 가르침을 그대로 따르면서 역사의 기록을 서술하되 창작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내세웠다. 영조 때 인물인 긍익은 조선 태조부터 숙종 때의 이야기를 특색에 맞게 기록했다.

<조선왕조실록>이 임금의 관점에서 쓰였다면 <연려실기술>은 왕조의 기록보다도 더 자세한 내용이 수록됐다. 승자의 역사가 아닌, 각종 비하인드 스토리까지 나열해 한 눈에 우리의 역사를 볼 수 있게 서술했는데, 컴퓨터가 없던 당대로선 세간의 관심사였다.

역사적으로 발생한 사실적 기록, 처음과 끝의 본말이라고 해서 '기사본말체'라는 다소 생소한 표현을 쓰지만, 이것은 날짜별로 서술한 편년체의 기록과는 다르게 카드섹션과 같은 편리성을 응용한 현대식 방법과 유사한 기록이라는 점에서 높이 평가 받는다. 그는 당대의 언론인 기능을 담당했던 셈이다.

그것은 목숨을 내놓지 않고는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왕조의 역사를 기록하다가 자칫 상대로부터 다른 평가가 이뤄진다면 위험한 상황이 연출될 수도 있기 때문.

거기에 따른 긍익의 생각은 이랬다.

"처음 이 책을 만들 때 가까운 친구들이 남에게 보이지 말라고 권고한 일이 간혹 있었다. 나는 남이 이 책을 알지 못하기를 바란다면 만들지 않는 것이 옳고, 만들어 놓고 남이 알까 두려워한다면 도를 좋아하는 것이 아니다."

그의 강한 의지가 담긴 이 책은 마치 사마천의 사기와 같은 권위 있는 역사책이었음을 증명하고도 남는다.

긍익은 "이 책은 사람들의 귀나 눈에 익은 이야기를 모아 분류해, 편집 하나도 나의 사적 견해로 논평한 것이 없다. 나는 사실에 의거해 수록하기만 할 뿐, 그 옳고 그름은 후대 사람들이 판단할 것이다"라고 했다. 

정사가 아닌 민간에 떠도는 야사에 이르기까지, 긍익은 조선의 정치와 문화를 설득력 있게 한데 모아 실증적으로 집필하기에 이르렀던 것. 

<연려실기술>은 왜 조선 최고의 야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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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철저한 기록정신에 입각한 시대의 기록자로 역사에 남기를 원했다. 조선 최고의 야사인 <연려실기술>에 가끔 틀린 내용이 보이는 것은 이런 이유에서다. 그래서 <조선왕조실록>과 같은 실증적인 역사서와 함께 읽는다면 조선사를 이해하는 데 가장 완벽한 책이라고 학계에서는 높이 평가한다.  

책 속의 이야기 몇 개를 예를 들어보면, 태조 이성계가 정종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고향인 함흥에서 은거할 때 일이다. 2차 왕자의 난을 일으킨 태종이 부친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 함흥으로 차사를 보내는데, 심부름 간 사람들을 돌려보내지 않아 생겼다는 '함흥차사'의 고사라던가, 신숙주가 궐에서 밤늦게까지 업무를 보다가 깜빡 잠들었는데, 이를 측은하게 여긴 세종이 자신의 옷을 벗어 덮어주었다는 이야기, 신숙주의 부인 이야기, 수염이 아름답고 그 모습이 범상치 않았다는 문종 이야기, 노비의 자식들에게까지 관용을 베푼 황희 정승의 이야기 등. 드라마나 영화에서 제작된 조선왕조의 이야기를 모두 이 책에서 가져왔다고 전한다.

1995년 <조선왕조실록>이 CD로 제작되고 2005년 인터넷에 알려지기 전까지는 야사의 기록인 <연려실기술>의 내용이 교과서 역할을 했을 만큼 중요하게 다뤄졌다.  
온갖 불행을 떠안고 신지도로 유배 온 원교 이광사에게 유일한 힘과 희망이 된 것은 두 아들 긍익과 영익이었다. 영익은 부친을 따라서 유배지 신지도로 내려와 부친이 타계할 때까지 수발하면서 함께 서화 작업을 하며 조선의 양명학을 완성했다. 긍익은 한양에서 근근이 집안일을 돌보면서 부친과 서신을 나누고 유배지를 오가면서 부자의 정을 이어나갔다. 

양대의 국립박물관이 선택한 원교의 친필 글씨와 편액을 보면 관람자들에게 어떤 감동을 선사했는지를 충분히 짐작케 한다. 대구국립박물관의 조선 편액전시 중에서 단연 인기는 부자의 인연이었다. 애틋한 정이 넘쳤던 부자 사이에서는 당대의 글씨와 그림에 대한 미학적 감평, 그리고 역사의 기록과 세상 만물에 대한 철학적 사상에 이르기까지 다채로운 담론이 소통됐다는 평가다.      

비장한 심정으로 단박에 써내려간 '연려실'의 친필과 이것을 나무판에 새긴 편액은 놀랍게도 먹물을 흘린 세세한 흔적까지 똑같았다. 긍익은 그만큼 세심하고 정성스럽게 부친의 마음까지 그대로 이어받아 새겼다는 뜻이다.

부친이 생을 마감하자 곧바로 신지도로 내려와 이 편액을 새겨 집필실에 걸어 놓고 30년을 쉬지 않고 역사집필에 몰두해 마침내 조선의 야사인 <연려실기술>을 완성하기에 이른 긍익. 그것은 새로운 세상을 열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담보한 지난한 싸움이었다. 

정지승 문화예술활동가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완도신문에도 실렸습니다.


태그:#연려실기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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