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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석보(萬石洑)를 찾았던 지난해 가을 잔상이 아직도 강렬하다. 배들(梨平)은 생각보다 훨씬 풍요로웠다. 수확이 한창이던 10월을 택했다. 백산에서 본 들판은 황홀한 황금물결이다. 그 모습에 절로 포만감이 든다. 지평선을 이룬 배들다운 가을빛이다. 들판을 적시는 동진강이 윤슬로 빛난다. 가을을 만끽하는 꽃으로 치장한 강이 호사를 부린다.

조병갑이 노린 것
 
햇살에 윤슬이 빛나는 동진강. 배들의 젖줄이다.
▲ 동진강 햇살에 윤슬이 빛나는 동진강. 배들의 젖줄이다.
ⓒ 이영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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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산을 내려와 노래를 흥얼거리며 강둑을 따라 느리게 걷는다. "만석보 터지는 물에 새 길이 열릴 때∼". 그때 갑자기 서쪽 바다에서 시커먼 먹장구름이 몰려왔다. 쨍하게 맑던 하늘이 컴컴해지면서 굵은 빗방울이 떨어진다. 130년 전 농민들 가슴에도 저런 먹장구름처럼 시름이 덮쳐왔을까?

다행히 짧은 소나기였다. 비가 많이 내리면 하루 정도 수확을 멈추어야 한다. 벼가 젖으면 콤바인이 처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잠깐의 소나기 뒤, 배들은 평화로우면서 다시 분주해진다. 십수 명이 열 지어 낫질로 벼 베던 단내나는 노동은 이젠 볼 수 없다. 콤바인과 트럭만이 재게 움직일 뿐이다. 저 멀리 만석보 터가 보인다. 정읍천이 동진강에 합수하는 자리다.

탐관오리의 대명사인 조병갑이 노린 게 배들의 쌀이다. 보(洑)로 농사지었다며 세금을 2중으로 걷으려 했다. 과연 탐관오리다운 행태다. 이로써 그는 이곳에 앙시앙 레짐(Ancien Régime, 구체제) 의 표징을 심은 셈이다. 혹은 망해가는 늙은 조선이란 나라가 짊어졌어야 할 바벨탑일 수도 있다. 그게 만석보다.
 
만석보가 있던 동진강과 지평선을 그려내는 배들.
▲ 만석보 터 만석보가 있던 동진강과 지평선을 그려내는 배들.
ⓒ 이영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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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리 정읍과 전주 쪽은 높다란 산이 병풍처럼 막아섰다. 북으로 흐르는 정읍천이 서로 흐르는 동진강에 합류하는 곳 둑에 만석보 유지비가 있다. 그 옆 시인 양성우의 '만석보' 시비와 함께다. 멀리 북서쪽으로 백산이 아련하고 끝도 없이 펼쳐진 지평선에 망망한 호남평야가 참맛으로 다가든다. 만석보 터에 이웃한 예동 마을에 만석보 혁파비각이 서 있다. 이를 상징하듯 쌀을 보관하는 거대한 창고가 위압하듯 서 있다.

앙시앙 레짐의 표징

고부 군수에 3번이나 임명된 건 아마 조병갑이 유일할 것이다. 1889년 부임했다 모친상으로 사임한다. 1892년 4월 부임하여 1893년 12월 만석보로 인해 익산 군수로 발령 날 때까지 갖은 수탈을 저지른다. 1달 후인 1894년 1월 다시 부임할 때 고부봉기가 일어난다.

이런 일이 가능했던 건, 세도정치 아이콘 중 하나인 조두순이 그의 큰아버지였기 때문이다. 망국이란 게 별거 아니다. 무너져 내린 원칙에 사익을 추구하는 집단이 활보하면서 싹이 돋는다. 1890년대는 여흥민씨 집단이었고, 2024년은 떼를 이룬 검사 패거리다.

1892년 벽두 조병갑이 동진강에 새 보를 쌓으라 명한다. 정읍천에 있는 멀쩡한 보를 두고서 말이다. 세금 면제라는 감언이설로 속이고 달랜다. 힘으로 보 쌓은 강제노역에 농민을 동원한다. 천태산과 두승산 등지 나무가 잘린다. 손대지 않는 게 관행이던 수백 년 묵은 묏자리 도래솔까지 베어간다. 부자에겐 공사비 찬조를 닦달한다. 그렇게 보가 만들어진다.
 
동진강 만석보가 있던 자리 강 둑에 세워진 유지 비. 사진 왼쪽 멀리 백산이 보인다.
▲ 만석보 유지 비 동진강 만석보가 있던 자리 강 둑에 세워진 유지 비. 사진 왼쪽 멀리 백산이 보인다.
ⓒ 이영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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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약속과 달리 가을걷이 때 세금을 부과한다. 1천 섬을 거둬들여 착복하려 한 것이다. 모두가 분개한다.
 
고부민란 사건을 일으킨 원인 중의 하나인 수세미람봉(水稅米濫捧)이라는 것은 고부 북면에 있는 만석보와 팔왕리보(八旺里洑)를 백성을 동원한 부역으로 쌓았으면서도, 그 보로 농사지었다고 논 1두락(약 200평)에 추가로 삼두(三斗=3말)씩 세금을 거둬 군수 조병갑이 자기 배를 채우려 착복한 일을 말한다. (동학사. 오지영. 문석각. 1973. p192에서 의역 인용)
 
보를 쌓을 때부터 고부 사람들은 가을걷이 후, 조병갑이 어떻게 나오리라는 걸 예견했던 걸로 보인다. 이에 각 마을 동임이 협의하여 소(訴) 제기로 거부 의사를 밝힌다. 조병갑은 2∼3일 사이 소에 대한 답변을 줄 것이니 돌아가 기다리라 하고선, 각 마을 동임을 옥에 가둬버린다. 소를 무마하려는 속셈이다. 이에 김도삼(金道三)이 나서 갇힌 사람들을 풀어낸다. 하지만 이는 조병갑의 기만술이다.
 
백산 정상에서 바라 본 태인, 전주 방향의 배들. 망망한 호남평야가 참 맛으로 다가 온다.
▲ 배들(梨平) 백산 정상에서 바라 본 태인, 전주 방향의 배들. 망망한 호남평야가 참 맛으로 다가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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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사이 백성을 윽박질러 각종 잡세를 먼저 거둬들인다. 압박 수단이다. 그다음 지주들을 강압해 받은 세금을 예동마을 앞 논바닥에 쌓아 놓는다. 그리곤 도둑맞았다는 소문을 낸다. 범인 색출 명목으로 마구잡이로 농민을 잡아들여, 매질한다. 과연 수탈의 달인다운 술책이다.

우두머리로 나서는 전창혁

이에 재차 소를 제기하여 강력하게 항의하고, 세금을 없애보자는 논의가 인다. 이때 전봉준의 아버지 전창혁이 우두머리로 나선다. 70살 넘은 노인의 대단한 결기다. 전봉준의 의협심이 어디에서 발원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만석보 터에서 조금 떨어진, 정읍천과 동진강이 합수하는 자리 강 둑에 세워진 만석보 유지비.
▲ 만석보 유지비 만석보 터에서 조금 떨어진, 정읍천과 동진강이 합수하는 자리 강 둑에 세워진 만석보 유지비.
ⓒ 이영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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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성 중에 대표로 나선 사람이 전창혁(全彰赫), 김도삼, 정일서(鄭一瑞) 등 세 사람이며, 세 사람 중에는 전창혁이 우두머리가 되었다. 고부 백성들은 여러 가지 원통한 사정을 들어 군수 조병갑에게 등소(等訴)하였다. 조병갑은 이를 난민이라 하여 대표 세 사람은 때려 가두고 전라감영에 보고문을 올려 세 사람을 전주 감영 감옥으로 옮기고, 여러 백성은 두들겨 몰아냈다. 이때 전라감사 김문현(金文鉉)은 대표들이 백성을 충동해 난을 일으킨 것이라 하여 엄형으로 대표들을 징벌한 후 영(令)을 내려 고부 본 옥에 다시 옮기게 하고 엄형으로 다스리라 하였음으로써 세 사람은 고부에 내려와 심한 매를 맞고 옥중에 갇히게 되었는데, 그중 우두머리인 전창혁이 마침내 옥중에서 매 맞은 형벌로 죽고 말았다. (앞의 책. p193 의역 인용)
 
백발노인이 곤장 맞은 후유증으로 목숨을 잃는다. 백성을 위해 당당하게 우두머리로 나선 그의 죽음은 고부 백성에게 새삼스러운 충격을 준다. 유교적 덕목이 상식이던 시대다. 좋은 일은 서로 권한다는 덕업상권(德業相勸)의 시대다. 그 반대도 마찬가지다.

충격이 곧 다짐으로 변한 건 당연지사다. 또한 전봉준에 대한 신뢰감을 절대화한 기폭제로 작용했을 가능성이 크다. 폭거와 불의에 당당히 맞선 전봉준의 부친 전창혁. 그는 실천으로 현실의 모순을 타파하려 했다. 이는 전봉준을 비롯한 백성들에게 무언의 교훈을 남긴 셈이다.
 
양성우 시인의 시 '만석보' 전문이 새겨진 시비.
▲ 만석보 시비 양성우 시인의 시 '만석보' 전문이 새겨진 시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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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봉준은 이 사건을 계기로 질곡의 고리를 끊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혁명'뿐이라는 걸 적확하게 인식하고 실행에 옮길 결심을 했을 것이다. 성패를 떠나 엄청난 희생이 따르겠지만, 그렇다고 방치했다간 공멸할 위기감이 더 컸기 때문이다. 진정 나라와 백성을 위한 길에 맞닥뜨린 것이다.

또 다른 악한(villain)의 등장

그때는 고부뿐 아니라 전주와 익산 등 전라도 곳곳에서 소요사태가 일어났다. 죄다 썩은 탓이다. 여기저기서 원성이 자자하다. 이에 조정은 장흥 부사 이용태에게 폐단을 없애라 명한다. 하지만 이용태는 오히려 수탈에 가담함으로써 원성을 더 높이는 역할을 자행한다.
 
만석보 유지비가 있는 강 둑의 모습.
▲ 만석보 유지비 만석보 유지비가 있는 강 둑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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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으로 한심한 관리에 우스운 나라 꼴이다. 이에 농민들은 이제 더는 당하지 않으려고 집단의 힘으로 대항하기 시작한다. 이처럼 민중은 언제나 현명하다.
 
전라도 각 군에 민란이 일어남에 따라 정부는 장흥 부사 이용태(李容泰)에게 명하여 전라도 안렴사(按廉使)의 직을 맡겨 관의 폐단을 잘 살피고 백성의 고통을 구하라 하였다. 그러나 소위 안렴(按廉=백성을 어루만지고 보살피는 일)의 직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백성 재산 수탈에 힘쓸 뿐이었다. …(중략)… 이용태는 고부, 부안, 고창, 무장 등지로 돌아다니며 백성의 재물을 노략질한 일이 많았다. 하루는 무장 선운사에서 밥술이나 먹는 백성들을 동학군이라는 트집으로 잡아 묶어 서울로 올라가다가 손화중 포의 도인들 손에 걸려 정읍 연지원(蓮池院) 주막거리에서 매를 얻어맞고 도망질한 일이 있었다 …(중략)… 동학군들도 또한 전과 달라 항거하기로 하였다. 앞으로는 돈 바치고 빠져나오는 것 같은 일을 하지 말고 어디서든지 사람을 잡아가는 때에는 솔밭을 흔들어 서로 힘을 합하고 경포(京捕=포도청)나 영포(營捕=전주 포청)를 막론하고 만나는 대로 두들겨 주고 잡혀가는 사람을 빼앗아 오기로 하였다. (앞의 책. p196~197 의역 인용)
  
만석보 터에서 가장 가까운 예동마을에 세워진 만석보 혁파비. 1894년 고부봉기 때 농민들이 해체하고 1898년에 고부 군수가 완전 해체한다.
▲ 만석보 혁파비 만석보 터에서 가장 가까운 예동마을에 세워진 만석보 혁파비. 1894년 고부봉기 때 농민들이 해체하고 1898년에 고부 군수가 완전 해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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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용태라는 인물을 잘 기억해 두자. 동학농민혁명의 3대 악한이라 할 만하기 때문이다. 백성을 바라보는 그들의 시선에서, 조선이 망국의 길을 걸은 건 어쩌면 당연한 귀결이라는 생각이다. 지금은 어떤가? 당시보다 더 낫다고 자부할 수 있는가?

태그:#만석보, #배들梨平, #고부민란, #전창혁, #동학농민혁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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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삼스레 타인과 소통하는 일이 어렵다는 것을 실감합니다. 그래도 많은 이들이 공감하고 소통하는 그런 일들을 찾아 같이 나누고 싶습니다. 보다 쉽고 재미있는 이야기로 서로 교감하면서, 오늘보다는 내일이 더 풍성해지는 삶을 같이 살아갔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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