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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랙번로버스 Ewood 경기장
▲ 블랙번로버스 Ewood 경기장 블랙번로버스 Ewood 경기장
ⓒ 김명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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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요일(2월 27일) 저녁이다. 다음날이면 다들 일터에 가야 하고, 학교에 가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부 리그 뉴캐슬 유나이티드팀(뉴캐슬)과 2부 리그 블랙번 로버스(로버스)의 FA컵 경기를 놓칠 수 없는 날이기도 하다.

남편의 홈 팀인 로버스는 상대팀에 비해 약체다. 뉴캐슬 한 선수의 연봉이 로버스 팀 선수 전부의 연봉과 맞먹는다고 하니, 팀 간의 선수들의 기량 격차가 얼마나 큰지 설명해 준다. 프로 선수에게 몸값이 바로 실력이기 때문이다.

이날 게임은 로버스 홈 경기장인 이우드(Ewood)파크에서 열린다. 제법 쌀쌀한 날씨에 털모자에 머플러로 중무장한 축구팬들이 주중임에도 불구하고 경기장 관람석을 가득 채우고 있다. 원정팀의 본고장인 뉴캐슬에서 이곳 경기장이 있는 블랙번까지는 적어도 3시간 운전해야 하는 거리라고 하는데, 사면이 관중석인 경기장의 한 면을 가득 채울 만큼 많은 팬들이 원정 경기를 응원하기 위해 자리하고 있다.

못 말리는 축구 사랑

종종 M5 고속도로에서 탑승인원이 전부 특정 축구 유니폼을 입고 신나게 달려가는 미니버스들을 볼 수 있다. 지역 축구팬들은 주말마다 소속팀 경기를 따라다니느라 바쁘다. 열혈 축구팬인 영국인들의 축구 사랑은 정말 못 말린다.

각 팀의 성적과 기량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는 나는 그저 경기 시작을 기다리고 있다. 약체인 홈팀 팬인 남편은 "질 거야(아니 이길 수 있어) 제발 근소하게 만 져줘(까짓 기찬 골을 좀 넣자)", 지킬과 하이드 마냥 마음이 오락가락, 불안한 모습을 보인다.

경기가 시작된다. 뉴캐슬은 전반전이 다 끝나가도록 이렇다 할 골 찬스를 만들어내지 못했다. 그에 비해 로버스 선수들은 각자 부족한 기량을 투지로 채우려는 듯 동분서주 눈에 띄게 바쁘게 움직이고 그 덕분에 여러 번의 골 기회를 만들어 낸다.

이제야 나도 양 팀의 다른 분위기가 자세히 보인다. 뉴캐슬 선수들은 프리미어리그 선수들 답게 자신의 기량과 실력에 자신감을 가지고 약체팀을 대하는 여유가 있는 반면, 2군 로버스는 다음 주에 16세가 된다는 어린 선수부터 재능은 있을지는 몰라도 아직 그 기술이 정교하지 못한 선수들이 제법 많이 뛰고 있다. 뉴캐슬팀의 주주는 사우디아라비아 정부다. 참고로 로버스팀의 주주는 인도계 닭고기 가공기업이다. 투자 자금 규모나 영향력에서 상대가 되지 않는 두 팀의 경기는 계속된다.

후반부 첫 골은 뉴캐슬에서 터졌다. 탄탄하던 로버스 수비진이 잠시 해이해진 틈을 놓치지 않았다. 축구 경기를 볼 때마다 느끼지만 노련한 선수들은 경기 전반이 아니라 골이 될 수 있는 그 한순간에 믿을 수 없을 만큼 강한 집중력과 골 본능을 보여준다. 결국 골을 만들어낸다.

이에 질세라 눈물겨운 여러 번의 시도 끝에 로버스도 한 골을 넣는다. 손에 땀을 쥐며 경기를 시청하던 남편은 "Good job lad(멋져 친구)", 신이 나서 벌떡 자리에서 일어선다.
 
2024년 2월 27일 경기 캔바
▲ 블랙번로버스 vs 뉴캐슬유나이티드 2024년 2월 27일 경기 캔바
ⓒ 김명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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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랙번 로버스, 예상 밖의 선전... 아들이 어머니께 전화 건 이유

골 찬스, 골 점유율 등 지표를 보더라도 예상 밖 선전을 펼치고 있는 로버스다. 그 성과에 큰 일조를 하고 있는 골키퍼 이름이 미스터 피어스(Mr. Pears)이다. 밤 10시가 넘어가는 시간이지만 나는 '배(Pear) 님! 배 님!" 목청껏 응원한다. 몇 번의 실점 기회도 온몸을 날려 막아내는 '배 님'은 오늘의 히어로 중 한 명이다.

전 후반 경기를 모두 끝냈지만 결과는 1-1 무승부. 반드시 승패를 가려야 하는 만큼, 추가 30분이 더 주어졌다. 남편은 잠깐 쉬는 시간에 어머니에게 전화를 건다. 지금 극도로 쇠약해진 아버지가 여전히 경기를 시청하고 계신지 묻기 위해서다. 아직 TV를 보고 계시다고 한다. 요즘 눈에 띄게 말수가 줄고 한 공간에 있지만 예전 같지 않은 텅 빈 시선을 보여주시는 아버님이 얼마만큼 경기에 집중하고 계신지는 알 수 없지만 말이다.

아버님은 평생 로버스 팬이신 분이다. 어머님과 첫 데이트를 한 날은 어느 팀과의 경기에서 로버스가 이겨 신이 난 때였고, 첫 아들을 품에 안았던 날에는 경기 전 친구들과 맥주잔을 기울이며 새 생명의 축복을 기원했었다고 했다. 인생 중요했던 일들은 로버스가 어디 원정갔던 때 아니면 대승이나 졸전이였던 때와 연결돼 기억된다. 블랙번 로버스는 내년이면 150살이 되는 긴 역사를 가진 축구팀이다. 아마도 아버님은 수많은 로버스 골수팬 중 한 분이실 것이다.

연장전까지 양 팀 모두 최선을 다했지만, 더 이상의 골을 만들어내지 못했다.

승부차기 시간. 손에 땀을 쥐는 긴장감이 고조된다. 첫 로버스 킥은 뉴캐슬 골키퍼의 눈부신 활약으로 득점 실패. 반대로 뉴캐슬 스트라이커는 보란 듯이 1점을 획득한다. 다음 차례로 나선 로버스 선수는 많아봐야 이제 성년이 될까 말까 한 어린 소년이다.

첫 세이브로 의기양양해진 뉴캐슬 골키퍼를 홀로 대적해야 하는, 특히 경험이 부족한 어린 선수에게는 심리적으로 굉장히 힘든 순간이다. 골대 앞에 선 이 어린 선수는 상대팀 골키퍼와 시선을 맞추지 않는다. 제 앞의 공에 온 신경을 집중하고 있다. 팬들도 호흡을 가다듬고 두 손을 모은다. 크게 심호흡을 한두 번 하던 이 선수가 달려 나간다. "골인~!"

드디어 골문이 이 로버스의 어린 선수에게 열린다. 활짝 웃으며 팀 대열에 합류하는 모습이 너무나 훈훈하고 멋지다. 이후로 양 팀은 막상막하 골 주고받기를 하다가 마지막 주자에서 득점 실패한 로버스 선수와는 달리 뉴캐슬 선수가 시원하게 골을 추가한다. 뉴캐슬의 승리다(승부차기 4-3).
 
FA컵 블랙번로버스 vs 뉴캐슬유나이티드 BBC 생중계 광고
▲ BBC 경기 중계 방송 안내 FA컵 블랙번로버스 vs 뉴캐슬유나이티드 BBC 생중계 광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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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 후 카메라는  퇴장하는 선수들과 코칭 스텝들의 얼굴 표정을 잡는다. 승자는 경기의 승리만을 자축하기에는 씁쓸했고, 패자는 비록 졌어도 최선을 다해 경기를 펼쳤다. 약체지만 주눅 들지 않고 끝까지 쉽게 경기를 내어 주지 않았다. 최선을 다했기에 미련도 없어 보이는 멋진 경기였다.

경기가 끝나고 나니 밤 11시가 넘었다. 남편은 조용히 나를 불러 세우더니 "함께 경기 시청을 해서 참 좋았어. 고마워" 인사한다.

남편은 아빠와 함께 매주 경기장을 찾아 응원하던 유년시절을 추억한다. 예전처럼 경기 내용을 가지고 미주알고주알 아버지와 얘기 나누고 싶었을 테다. 그 심정을 알기에 나는 그 부족함을 목청껏 '배 님'를 불러대는 요란함으로 채웠다. 아버님도 긴 어둠의 통로를 지나다 잠깐 밝은 빛줄기를 만난 듯, 홈 팀의 멋진 경기를 즐기셨기를 바란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브런츠 스토리에도게재 됩니다.


태그:#FA컵, #블랙번로버스, #뉴캐슬유나이티드, #영국축구, #축구와인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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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세반하별 입니다. 영국 거주중으로 현지 생생한 소식을 통해 여러분과 이야기 나누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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