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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는 이제까지 개인사 중심의 인물평전을 써왔는데, 이번에는 우리 역사에서, 비록 주역은 아니지만 말과 글 또는 행적을 통해 새날을 열고, 민중의 벗이 되고, 후대에도 흠모하는 사람이 끊이지 않는 인물들을 찾기로 했다. 

이들을 소환한 이유는 그들이 남긴 글·말·행적이 지금에도 가치가 있고 유효하기 때문이다. 생몰의 시대순을 따르지 않고 준비된 인물들을 차례로 소개하고자 한다. [기자말]
김시습 영정 - 보물 제1497호
 김시습 영정 - 보물 제1497호
ⓒ 윤재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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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시습(金時習, 1435~1493)은 세종 17년(1435) 서울 성균관 북쪽 반궁리에서 태어났다. 관향은 강릉이고, 선대는 신라 알지왕의 후예인 원성왕(元聖王)의 왕제 주원(周元)의 후손이다. 증조부는 안주 목사, 할아버지는 오위장, 아버지 김일성(金日省)은 충순위(忠順衛)를 지냈다. 반가 출신임을 알 수 있다.

그의 이름 시습은 "때때로 익힌다"는 뜻으로 <논어>의 <학이편(學而篇)>에 나오는 "학이시습지 불역열호(學而時習之不亦悅乎, 배우고 때때로 익히면 또한 기쁘지 아니한가)"에서 따온 것이다. 자(字)인 열경(悅卿)도 같은 어구에서 따왔다. 호는 매월당(梅月堂)이며 이 밖에도 청한자(淸寒子)·동봉(東峰)·벽산(碧山)·췌세옹(贅世翁)으로도 불렸다. 나중에 설잠(雪岑)이란 법호로 승려 생활을 하기도 하였다.

5살 때의 일이다. 당대의 명재상 허조(許稠)가 하루는 천재 소년의 소문을 듣고 그의 집을 찾아와 '노(老)'자를 넣어 시를 지어 달라고 부탁하였다. 이에 어린 시습은 "노목개화 심불로(老木開花心不老)"라고 응대하여 노재상을 기쁘게 했다.

이 이야기를 들은 세종은 지신사 박이창(朴以昌)을 시켜서 직접 시험토록 하고 궁궐로 김시습을 불렀다. 박이창은 먼저 김시습의 이름을 가지고 시를 짓도록 하였다.

김시습은 "내시강보 김시습(來時襁褓金時習, 올 때 강보에 싸여 있던 김시습입니다)"라고 지었다. 

박이창이 궁궐의 벽에 걸린 산수화를 보고 다시 청하니 "소정주택 하인재(小亭舟宅何人在, 조그만 정자 같은 배에는 어느 누가 살고 있는지)"라고 김시습이 거침없이 대답하였다. 

박이창은 감탄하며 "아이의 글재주가 백학이 되어 하늘을 나는구나"라고 읊으니, 김시습의 대구(對句) 또한 빼어났다. "상감의 덕은 황룡이 되어 벽해 속에 번득이는 듯 합니다."

이 자리에서 세종은 비단 수십 필을 하사했다. 그리고 김시습이 어떻게 하는가 하고 지켜보니, 그는 비단 끝을 각각 이어서 한쪽 끝을 잡은 뒤 유유히 궁궐 문을 나선 것이다. '김오세(金五歲)'란 별칭은 이 때에 붙게 된 것이다. 

김시습은 13살 때까지 이수전(李秀甸)의 문하에서 수학했다. 또 당시 성균관 대사성(大司成)이며 후진 교육에 40여 년을 바친 교육자 김양(金洋)과 국초에 사범지종(師範之宗)이라 칭송받던 윤상의 문하에서 사서육경 등을 공부하였다.

타고난 재질이 우수하고 노력 또한 열심이어서 그의 학문은 일취월장했다. 5살 때 이미 세종의 총애를 받아 그가 장차 크게 쓰일 것을 어느 누구도 의심하지 않았다. 그러나 운명은 근역(槿域, 무궁화가 많은 땅이라는 뜻으로 우리 나라를 일컫는 말) 제일의 천재로 하여금 학문에만 열중토록 내버려두지 않았다.

김시습은 15살 되던 해에 어머니를 여의고 외가로 내려가 3년 상을 치르던 중 믿고 의탁하던 외할머니마저 세상을 뜨는 아픔을 겪었다. 다시 상경했을 때는 아버지도 중병으로 폐인지경의 상태였다.

집안에 우환이 있는 가운데 계모를 맞게 되고, 훈련원 도정(都正) 남효례(南孝禮)의 딸에게 장가를 들었다. 그러나 그의 가정사가 날이 갈수록 어렵기만 하여 삼각산 중흥사로 들어가 학업을 계속하고자 했다.

20살이 되도록 과거에 응시하지 않고 당시에 신설되었던 사부학당(四部學堂)에도 진학하지 않은 채 개인 사사를 받거나 절간에서 수학을 하게 된 동기는 무엇일까?

더욱이 신동의 자질과 세종의 약속까지 있었던 터였다. 그러나 그는 전통적인 관학보다는 자유로운 사학에서 더 배움의 길을 찾았고, 실제로 벼슬에는 큰 매력을 느끼지 않았다.

이런 이유가 개인적인 성품 탓인지, 아니면 변변치 못한 집안 사정으로 인해 벼슬길이 여의찮았던 까닭인지는 알 길이 없다. 다만 그의 강직한 성품과 의협심이 좀 더 큰 공부를 하기 위해서 학문에만 전념토록 한 것으로 추측된다.

그러던 중 수양대군이 단종을 내몰고 왕위에 올랐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그는 너무 충격을 받아 사흘 동안 식음을 전폐하고 방성대곡하다가 읽던 책을 전부 불태우고 똥통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등 정신착란 증세까지 보였다고 한다. 그리고 그 길로 머리를 깎고 중이 되어 방랑을 했다.

경기도 수락산으로 들어가 중이 된 김시습은 이후 거듭하여 설악산·천마산·성거산·오대산·묘향산·지리산 등을 돌며 방랑했고, 4백년 사직을 지켜 온 송도의 옛 성터에 올라 제행무상을 노래했다. 

그의 발길이 닿지 않은 산이 없었고, 그의 시구(詩句)가 흐르지 않는 강이 없었다. 그리고는 "내가 벼슬살이를 했다면, 이 아름다운 경치를 어찌 즐길 수 있었으며 또한 이렇게 마음껏 지낼 수 있었으리오. 오호라, 사람이 천지의 사이에 나서 한갓 명리에 얽매여 생업에 허덕인다면 이 몸의 괴로움이 저 뱁새가 능초를 그리워하고 표주박이 나뭇가지에 매달려 있음과 무엇이 다르리오."라고 읊었다.

중이 된 그는 민둥머리에 수염을 기르고 다녔는데, 다음의 자작시에서 그 연유를 짐작할 수 있다.

 머리를 깎아서 세상을 등졌지만
 수염을 길러서 장부임을 알리노라.

이런 때문이었을까. 그는 유생을 만나면 공맹의 도를 역설하기를 그치지 않았으나, 불도나 불법에 대해 물으면 입을 다물고 말하지 않았다. 중이 되었으나 유가의 근본 가르침을 잃지 않았다는 증거이다. 그야말로 행색은 걸승에 불과했지만, 속은 유교적인 명분사상·천도사상을 옹골차게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사육신이 처형되었을 때의 일이다. 세조가 볼 때, 단종 복위를 꾀했던 사육신은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대역죄인이었다. 결국 그들은 처참하게 처형당했고, 삼족이 멸문지화를 입었다. 그들의 사신은 갈기갈기 찢겨진 채 노량진 남쪽 새남터에 버려졌다. 갈가마귀가 하늘을 날아오르고, 들쥐가 시신을 뜯어 먹는 것 외에 그 곳은 사람의 그림자도 얼씬거릴 수 없었다.  후환이 두려웠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버려진 충신들의 시신을 주워 모아서 하나 씩 등에 지고 강을 건너는 사람이 있었다. 서릿발 치는 무도의 난세에 그런 일을 할 사람이 누구이겠는가. 바로 매월당이었다. 그는 이렇게 혼자서 사육신을 장사 지냈다. 

어느 날인가 김시습은 한명회의 별장 앞을 지나간 적이 있었다. 한명회는 수양대군에게 빌붙어서 김종서를 죽이는 하수인 노릇으로 공신호를 받고, 두 딸을 왕비로 출가시켜 영의정까지 지낸 권모술수에 능한 당대의 세력가이다. 그런데 그의 별장에 이런 싯구가 적혀 있었다. 

 젊어서는 사직을 붙들었고
 늙어서는 강호에 누워 있네.

 靑春扶社稷 白首臥江湖.

 한명회의 자작시였다. 이걸 본 김시습이 그냥 지나칠 수 있겠는가. 

충의를 저버린 변절자이고 사직을 무너뜨린 역신의 농간을 도저히 묵과할 수 없었다. 그래서 '부(扶)'를 '위(危)'로, '와(臥)'를 '오(汚)'로 고쳐 적었다.

 젊어서는 사직을 위태롭게 했고
 늙어서는 강호를 더럽혔구나.

그는 글자 두 자를 바꿔 간신 한명회를 마음껏 욕보이고 태연스레 사라졌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절대권력을 비판하는 사람의 생애가 평탄할 리 없다. 그도 마찬가지였다. 수양대군이 집권한 후로 생활은 더욱 더 어려워져만 갔고, 뭇사람들에게 미치광이라는 놀림도 받게 되었다.

춘추대의가 땅에 떨어지고 선악이 뒤바뀐 세상에서 차라리 미치는 것이 그가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을지 모른다. 그래서 그는 미친 척하며 사는 것이 최소한의 생존을 유지하는 방법임을 체득했을 것이다.

김시습이 진짜로 미치지 않았다는 사실은 우리 국문학사에 찬연한 빛을 남긴 <금오신화(金鰲新話)>에서도 엿볼 수 있다. 그는 금오산 남쪽 즙장사에 머물면서 매월당이란 서재를 짓고 <금오신화>를 지었다. 

한문으로 된 이 소설은 그의 고고한 인간 정신의 발현이며, 고독한 이단자의 번뇌의 산물이었다. 삶과 죽음, 이승과 저승을 넘나드는 이야기로 꾸며져 있는 이 소설에는 그의 사상적 깊이와 풍부한 체험, 놀라운 상상력으로 시대적 모순과 갈등이 초현실주의적인 수법으로 묘사되어 있다. 

오랜 방랑 생활과 노쇠함으로 병약할 대로 병약해진 매월당은 부여 무량사로 마지막 여행을 떠나 성종 24년 59살에 그곳에서 생을 마쳤다. 그의 유언으로 화장은 하지 않았다. 3년 후 장례를 지내려고 관을 열어 보았더니 얼굴빛이 살아 있을 때와 같았다고 한다. 불교식으로 다비(茶毘)하고 부도를 세웠다.

태그:#겨레의인물100선, #김시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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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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