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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는 이제까지 개인사 중심의 인물평전을 써왔는데, 이번에는 우리 역사에서, 비록 주역은 아니지만 말과 글 또는 행적을 통해 새날을 열고, 민중의 벗이 되고, 후대에도 흠모하는 사람이 끊이지 않는 인물들을 찾기로 했다. 

이들을 소환한 이유는 그들이 남긴 글·말·행적이 지금에도 가치가 있고 유효하기 때문이다. 생몰의 시대순을 따르지 않고 준비된 인물들을 차례로 소개하고자 한다. [기자말]
대법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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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 법률가(판사·검사·변호사)는 일반적으로 좋은 평가를 받지 않는 직업군이다. 많은 사람이 선호하고 경쟁도 치열하지만 부정적인 이유는 '존재가치'인 공정하지 않다는 데 있다. 최근 한국사회에서 벌어진 이른바 '법비(法匪)'와 '법꾸라미'는 고위검찰·변호사·법관 출신들의 부도덕·불법을 상징하는 용어가 되었다. 여기에 '검찰국가'가 되면서 비판의식은 더욱 심화되고 있다.

물론 예외가 없지는 않다. 지금 기억하는 사람이 많지 않지만, 김홍섭(金洪燮, 1915~1965)은 김병로와 함께 법조계의 전설적인 인물이다. 법관은 가장 엄격한 잣대로 말하면 '피도 눈물도 없는 공정성'이 직무이고, 타락하면 '법비'가 되는 법조계에서 공정성을 지키면서도 눈물을 흘리고, 신념과 품격과 풍류를 즐길 줄 아는 인물이었다. 사람들은 그를 '사도법관'이라 부르고, '인생의 각자(覺者)'라고도 하였다.

김홍섭은 전북 김제군 금산면에서 아버지 김재문과 어머니 강재순 사이에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선조들이 물려준 약간의 땅이 있어서 근근히 먹고 살 정도였다. 그가 자란 시기는 일제 강점 초기여서 아무리 시골이라해도 살벌하기 그지 없었다.

원평의 보통학교를 졸업한 김홍섭은 경제사정으로 진학을 포기하고 할아버지의 서당에서 한학을 공부하면서 고모의 인도로 기독교 예배당에 다녔다. 당시 예배당은 그나마 총독부 교육과는 달리 유일한 개화교육의 장소이기도 하여 매일 새벽기도회에 다니며 신앙심을 키웠다.

16살이 되던 해, 가족은 원평을 떠나 이웃마을로 이사를 갔다. 농지를 팔아 이곳에 조그만 상점을 열었다. 김홍섭은 잔심부름을 하면서 각종 책을 열심히 읽었다. 특히 아브라함 링컨전을 읽고 크게 감명 받았다. 독학을 해서도 얼마든지 성공할 수 있다는 결심이 섰다. 법률을 공부하기로 작심한다.

스무살이 되는 1935년 5월 집을 떠났다. 치솟는 향학열을 가누기 어려워 가출을 한 것이지만, 막상 갈 곳이 없었다. 전주에 도착하여 변호사 사무실이 있는 거리를 두리번 거리다 우연찮게 일본인 변호사 히사나가(久永)를 만났다. 그는 침착하고 튼실해 보이는 조선 청년을 자기 밑에서 심부름을 하게 해주었다.

본성이 성실하고 침착한 김홍섭은 히사나가를 열심히 도왔다. 그리고 틈틈히 법률서적을 읽었다. 4년 후 그의 주선으로 도쿄로 건너가 일본대학 전문부 1학년에 입학하였다. 고학을 하면서 공부한 결과 1년 후에 조선변호사 시험에 합격하였다.  

희망하던 변호사 시험에 합격했으나 공부를 더 하고 싶었다. 와세다대학 문과에 청강생으로 들어가 젊은날에 하지 못한 인문·역사·철학 등을 공부하였다. 1년 후 귀국하여 당시 독립운동가들의 변론을 도맡아 애국혼을 키우고 있던 김병로의 법률사무소에서 일하게 되었다. 이곳에서 근무할 때 김준연의 딸 김자선과 결혼하였다.

해방이 되고 미군정시대가 열렸다. 검사로 발령받았다. 1946년 5월 이른바 조선정판사 위조지폐사건이 발생했다. 조선공산당이 당비를 조달할 목적으로 1,300만 원의 위조지폐를 만들어 시중에 유통시켰다는 죄목으로 미군정 당국이 기소한 사건이다. 김홍섭은 조재천 검사와 함께 이 사건의 수사를 담당하였다.

미군정청은 당간부 16명을 체포하고 조선공산당본부를 수색하는 한편 기관지 <해방일보>를 무기정간시켰다. 조공은 성명을 통해 이 사건과 전혀 관계가 없다고 주장하는 등, 정판사사건은 해방공간에서 일어난 시비가 많은 정치적인 사건이었다.

김홍섭은 양심에 따라 수사권을 지휘하고자 했지만 정치권력의 압력으로 심한 갈등을 겪어야 했다. 법률가가 되어 처음으로 부딪히게 된 양심과 권력 사이에서 고민하다가 마침내 검사직을 내던졌다.

한강변 뚝섬으로 거처를 옮겨서 닭과 돼지를 키우고 농사를 지으며 살았다. 농부는 자신의 뜻대로 계절의 순환에 맞춰 사는 삶이어서 좋았다. 시국은 '법조인 농부'를 오래 내버려두지 않았다. 서울 소년부지원장으로 발령한 것이다. 법률가가 희소했던 때라 소년부지원이 신설되면서 그의 역할이 필요했던 것이다.

6·25전쟁이 발발하고 김홍섭은 가족과 함께 부산으로 피난갔다. 부산에서 고등법원판사로 임명되고, 환도 후 서울지방법원 판사에 임용되었다. 이승만대통령이 피난가면서 끊어버린 한강다리 때문에 피난을 가지 못한 다수의 시민들이 부역자로 몰리고, 인민군 치하에서 숨어지내던 사람들이 이웃집 장독에서 간장을 가져다 먹다 잡혔다고 특수절도죄로 재판정에 서는 등 환도 서울은 아수라장이었다.

김홍섭은 스스로 물었다.

이런 상황에서 누가 누구를 재판할 수 있는가.
국민을 이같은 처지에 몰아넣은 자들은 누구인가.

김홍섭은 법조인으로서 번뇌의 나날을 보내었다. 예산 수덕사의 김일엽 스님을 만나 구도의 문제를 토론하고, 가족과 함께 1953년 4월 명동성당에서 세례를 받았다. 어려서부터 기독교인이었던 그가 개종을 하고 바오로라는 세례명을 받았다.  

김홍섭은 법조인으로 입문하면서 세상 사람들이 여러가지 모습으로 법과 인연을 가지게 된다면서, 늘 스스로를 자책해 왔다.

 법을 예장처럼 차리고서 근엄·자중하는 사람.
 법을 보신처세 도구로 삼아 변융자재로 구사하는 사람.
 법을 장난감 딱총처럼 휘두르면서 때때로 세간을 놀래어 주는 사람.
 법을 빨간 넥타이처럼 목에 달고서 장식에 이용하는 사람.
 법을 양식 바가지처럼 꽁무니에 차고서 염치 없이 쫒아다니는 사람.
 법을 경이원지(敬而遠之)는 하지만 끊어 팽개칠  용기도 없어 질질 끌고다니는 사람.
 법을 사갈같이 엽기하는 사람.
 법을 악마처럼 증오하는 사람.
 등등 ··· (김홍섭, <무상을 넘어서>)

김홍섭은 1956년 11월 서울고등법원 부장판사로 승진하였다. 이승만의 폭정이 절정에 이르고 있을 때이다. 기독교에서는 장로인 이승만을 무비판적으로 추종하면서 교세를 확장시켜 나가고 가톨릭은 정부에 비판적이어서 불이익은 물론 심한 탄압에 시달렸다.

초기에는 그나마 사법부는 김병로 대법원장과 같은 강골이 버티고 있어서 독립성을 유지할 수 있었다. 이승만의 총애를 받으며 국정을 농단하던 육군 특무대장 김창룡이 1956년 1월 암살당했다. 허태영 대령이 정의감에서 그를 암살한 것이다. 김홍섭은 이 사건의 재판을 맡게 되었다. 

허태영은 사형수로서 김홍섭의 인도로 가톨릭에 귀의하고 형이 집행되기 며칠 전 김홍섭 판사에게 회심(回心)의 편지를 보냈다.

김창룡의 방약무인한 국정농단을 의협심에서 암살한 허태영과 그를 따르던 군인들은 1957년 9월 24일 사형이 집행되었다. 허태영은 김홍섭 판사의 은혜를 입고 간다는 유언도 남겼다.  

김홍섭은 틈틈이 산으로 섬으로, 수도원으로 성당으로, 순교자들의 유적지를 찾아 종교적 답사를 다니면서 신심을 돋우고 어지러운 세태에서 법조인의 자세를 가다듬었다. 1959년 연초에 전주지방법원장으로 임명되었다. 소년시절의 꿈과 애환이 서린 곳이었다. 그러나 1년이 지난 다음해 1월에 대법원 판사로 전임 발령되었다.

1960년 봄, 이승만의 영구집권 공작으로 3·15부정선거가 감행되고 마산의거에 이어 4ㆍ19혁명이 발발하였다. 그는 뒤늦게 참여한 대법관이지만 국민은 이승만 정권의 시녀 역할을 해온 사법부에 냉담한 눈길을 쏟아부었다. 그는 국가적 혼란기에 사법부라도 제자리를 지켜야 한다는 신념으로 일체의 정치적 외압을 물리치면서 소임을 다하였다.

5.16쿠데타가 일어났다. 군부가 3권을 장악하고 대법원은 설 자리를 빼앗겼다. 배정현 대법원장 대리가 이른바 '혁명과업의 완수를 촉구하는' 담화문을 발표하였다.  대법관들과는 논의를 거치지 않은 일이다.

쿠데타에 비판적이었던 김홍섭은 이해 9월 광주고등법원장으로 좌천되었다. 광주생활 2년여는 오히려 해방의 공간이었다. 권력의 소용돌이, 정보기관의 감시 속에서 보낸 대법원 판사는 그의 영혼을 짓누르는 세월이었다. 광주에서 주말이면 무등산을 오르고 남해안의 섬들을 찾아 다녔다. 

김홍섭은 청빈으로 법관생활을 일관하였다. 변호사·검사·판사에 이어 대법관에까지 이르면서도 부인이 싸준 도시락으로 점심을 때우고 양복은 한 번도 맞춰 입는 법이 없었다. 구두도 제대로 못 신고 고무신을 신고 다녔다. 슬하에 8남매를 두었으니 가장으로서의 짐이 무거웠을 것이지만, 마음만 먹으면 조금은 면할 수도 있는 가난에서 벗어나려고 한 흔적이 없었다. (한승헌, <대법관 김홍섭>)

김홍섭은 1964년 광주고등법원장에서 서울고등법원장으로 자리를 옮긴 후부터 건강에 이상이 생겨 이듬해 3월 16일 51세의 아까운 나이에 눈을 감았다. 간암의 진단을 받고도 주변에 폐가 된다고 알리지 않고 혼자 투병 끝에 조용히 자연으로 돌아갔다.

태그:#겨레의인물100선, #김홍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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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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