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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는 이제까지 개인사 중심의 인물평전을 써왔는데, 이번에는 우리 역사에서, 비록 주역은 아니지만 말과 글 또는 행적을 통해 새날을 열고, 민중의 벗이 되고, 후대에도 흠모하는 사람이 끊이지 않는 인물들을 찾기로 했다. 

이들을 소환한 이유는 그들이 남긴 글·말·행적이 지금에도 가치가 있고 유효하기 때문이다. 생몰의 시대순을 따르지 않고 준비된 인물들을 차례로 소개하고자 한다. [기자말]
조선의 개화를 위해 장벽인 일본과 한양을 드나들며 조선의 근대화를 추구하며 다양한 정보를 개화파에 제공하였다.
▲ 개화승 이동인 조선의 개화를 위해 장벽인 일본과 한양을 드나들며 조선의 근대화를 추구하며 다양한 정보를 개화파에 제공하였다.
ⓒ 이병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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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후기 두 차례의 기회가 있었다. 개화를 통해 서구의 문명과 제도를 수용하자는 가파른 길목이었다.

첫 번째 기회 갑신정변(1884년)은 수구파가 끌어들인 청국군에 의해 '3일천하'로 끝나고, 두 번째 동학농민혁명(1894년)은 제멋대로 들어온 일본군에 의해 1년여 만에 좌절되었다. 두 차례의 기회를 잃은 조선왕조는 왜적의 식민지로 전락하고 말았다. 역사는 개혁의 기회를 놓치면 보복한다고 했다.

갑신정변 즈음에 조선사회는 몇 갈래 정치·사회 세력과 사조가 치열하게 대립하고 있었다. "김옥균·박영효·홍영식·서광범 등 신진 엘리트 파워를 중심으로 한 급진 개화파, 김홍집·김윤식·어윤중·신기선 등을 중심으로 한 온건 개화파, 민비·민태호·민영익과 그 척족 및 한규직·이조연 등의 민비 수구파, 흥선대원군·이재원·이재면 등의 대원군 수구파, 그리고 재야 유림 수구파로 최익현·김평묵·이만손을 비롯한 위정척사파 등으로 분류할 수 있다."(신용하, <개화사상과 갑신정변 연구>)

갑신정변은 일본의 메이지유신(1868)보다 불과 16년 후의 거사였다. 이때 성공했으면 우리 국민의 역량으로 보아 일본과 자웅을 결하며 근대국가로 발돋움하고도 남을 것인데, 기회를 잃게 되고 식민지의 악몽과 현실의 분단이라는 비극의 원천이 되었다. 당시 동북아의 국제질서는 변화와 개혁의 시기였다. 중국의 양무운동과 일본의 메이지유신, 조선의 갑신정변이 그것이다.

이같은 흐름에 따라 조선에서는 1850~60년대에 실학을 계승한 박규수, 중인출신 역관 오경석, 의관출신으로 외국 문물에 관심이 많았던 유홍기 등 개화사상가들이 등장하고, 이들은 김옥균·김홍집·홍영식·서광범·박영효·어윤중·서재필 등 양반층 지식 청년들에게 개화사상을 주입시켰다. 이른바 개화파의 형성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놓친(빠진) 인물이 있다. '개화승'으로 불리는 이동인(李東仁)이다. 김옥균 등 개화파 인사들에게 사상적 영향을 미치고, 각종 책과 일본의 정보를 가져다 준 인물이다.
왼쪽부터 박영효, 서광범, 서재필, 김옥균. 이들은 친일 의존적인 급진적 개화 운동을 펼쳤다. 이들은 이동인의 사상적 제자였다.
▲ 1884년 갑신정변의 주역들 왼쪽부터 박영효, 서광범, 서재필, 김옥균. 이들은 친일 의존적인 급진적 개화 운동을 펼쳤다. 이들은 이동인의 사상적 제자였다.
ⓒ 이병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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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재필의 증언부터 들어보자.

그래서 그 책을 다 읽고 나니까 세계 대세를 대강 짐작할 것 같거든. 그래서 우리나라도 다른 나라처럼 인민의 권리를 세워보자는 생각이 났단 말이야. 이것이 우리가 개화파로 첫 번 나서게 된 근본이 된 것이야. 다시 말하면 이동인이라는 승려가 우리를 인도해 주었고 우리는 그 책을 읽고 그 사상을 가지게 되었으니 봉원사 새 절이 우리 개화파의 온상이라고 할 것이야.(<서재필박사 자서전>)

조선시대 서울(한양)의 거리도 자유롭게 걷지 못하게 했던 승려여서 신분이 제대로 밝혀지긴 어려웠다. 개화파에 큰 역할을 하고도 그의 신분이 제대로 밝혀지지 않은 이동인은 누구일까.

이동인의 출생과 성장과정은 물론 죽음도 베일에 가려있다. 급진 개화파가 동지를 규합해나갈 무렵, 이동인은 유대치를 통해서 김옥균을 알게 되었고, 그의 자금지원을 받아 1879년 6월 일본에 밀항하게 되는데, 그때 그의 나이 30세 전후였다.

그는 동래 범어사 승려로 그가 일본에 간 것은 일본의 정세를 파악하여 선배 유대치와 급진 개화파 리더 김옥균에게 알려주고 선진문물 자료를 수집하기 위해서였다. 이동인은 도쿄에 있을 당시 수신사로 온 김홍집을 만났으며, 그는 귀국시 일본사정에 밝은 이동인을 데리고 와 당시 실력자인 민비의 조카 민영익에게 소개하여 후에 국왕까지 알현, 대일 외교에 상당한 역할을 하게 되었다.

이를 계기로 이동인은 통리기무아문이 설치되면서 후세에 사상의학자로 널리 알려진 이제마와 함께 참묘관에 임명(고종 18년)되었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이동인은 약 한 달 뒤 행방불명이 되어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지게 되었다. 일설에 의하면 김홍집과 가까웠던 이동인이 김옥균과 내통하는 것이 알려져 수구파에서 그를 암살, 처치했다고 하나 진위 여부는 알 길이 없다.(안승일, <김옥균과 젊은 그들의 모험>)

이동인은 김옥균 등 개화파 인사들과 가깝게 지내면서 일본에서 많은 서책을 구입하여 개화파 인사들의 세계관을 넓혀주었다. 뿐만 아니라 수신사 김홍집을 만나 현지에서 일본의 각종 정보와 자료 등을 제공하여 국익에 도움을 주었다. 그는 또 유창한 일본어를 구사하여 일본에서 민간외교의 역할도 충실히 수행하였다.

일본공사관의 책임관 하나부사 요시히토가 부산에서 1874년 4월 25일 이동인과 만난 소회를 남겼다.

"4월 25일 이동인이 왔다. 나아가 만났더니 의복과 두발 모두가 고위 관리 같기도 하고 또 선비같기도 하고 앉아서 이야기하는 것이 우리와 달랐다."(곽승훈, <개화승 이동인은 어떤 인물이었어?>)

이동인은 국제정세를 보는 안목이나 세계관 등 당시로서는 국량이 대단히 큰 개화된 인물이었다. 한 달여 일본에 머물면서 주일 영국공사관과 독일공사관에 출입하면서 그쪽 사람들과 교류하였다. 그는 수구파가 똬리를 틀고 있는 조선 정부에서 설 땅이 주어지지 않았다. 당시 상대를 쉽게 찾기 어려운 국제적 안목과 개혁의 시국관이 그들에게는 걸림돌일 뿐이었다. 민씨 척족과 대원군세력 양쪽으로부터 박해를 받고 어느 날 지상에서 자취 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이동인은 우리나라의 근대개화사에 있어 빠뜨리고 넘어갈 수 없을 매우 중요한 인물이다. 위에서 살펴본 것처럼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이에 따라 그에 대한 평가도 여러 사람들에 의해 내려졌는데, 영국 외교관 사토가 내린 다음의 평이 가장 잘 나타내준다.

"이동인이 나가사키에 도착했다는 정보가 정확한 정보로 판명되기를 바랍니다. 그는 실제로 매우 흥미 있는 사람이며, 목숨만 부지할 수 있다면 자기 나라의 역사에 큰 자취를 남길 것이 틀림없기 때문입니다."(안승일, 앞의 책)

태그:#겨레의인물100선, #이동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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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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