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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의사 사당 내의 녹천 고광순 영정
 포의사 사당 내의 녹천 고광순 영정
ⓒ 녹천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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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기사 '400년을 이어온 의향 호남의 뿌리'에서 이어집니다. 

한말 고광순 의병장의 삶

녹천 고광순은 임진왜란 때 왜적의 침략으로 바람 앞에 등불과 같은 나라를 구한 의병장 제봉 고경명(高敬命)의 둘째 아들인 학봉(鶴峰) 의열공(毅烈公) 고인후(高因厚)의 12대 손이다.

그는 1895년 8월, 명성황후 시해 사건에 이어서 단발령이 내려지자, 유생들은 위정척사의 기치를 높이 들고 과감하게 항일 의병투쟁의 길에 나서게 됐다. 제천 의병장 류인석(柳麟錫)의 격문이 도화선이 돼 전국 각지의 유생들이 벌떼처럼 들고 일어서는 가운데, 호남에서는 장성의 기우만(奇宇萬)과 기삼연(奇參衍), 창평의 고광순과 나주의 이학상(李鶴相) 등이 1896년 2월 그믐날 광산부 광산관(광주향교)에 집결했다.

그들은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장성을 거쳐 정읍까지 진격하였을 때, 조정으로부터 선유사 신기선(申箕善)이 고종의 해산 칙령을 가지고 와서 해산을 명하자, 황제의 영을 거역할 수 없다 하여 순순히 파병(罷兵; 군사를 흩음) 결정을 내리고 거의(擧義)의 뜻이 꺾이고 말았다. 의병 해산 뒤 고광순은 비분강개해 국치(國恥)를 씻고자 다시 의병을 일으킬 생각만 했다. 그는 숨어 다니면서 영호남으로 출몰해 백성들을 격려하기도 하고, 혹은 눈물로 호소하면서 동지를 규합했다. 

1905년 을사조약이 강제로 체결되자 면암 최익현이 순창으로 들어갔다는 소식을 듣고 고광순은 고제량과 함께 면암을 찾아갔다. 하지만 이미 면암은 체포돼 서울로 압송된 뒤였다. 다시 고제량과 함께 기우만과 백낙구(白樂九)를 찾아가 거사할 것을 모의하고 의병을 모우고자 떠난 사이에 일이 발설되어 기우만과 백낙구가 그만 적들에게 체포되었다. 그래도 고광순은 좌절되지 않고 동지 규합에 힘썼다.

12월 11일(양 1907년 1월 24일) 고광순은 고제량과 더불어 창평 저산에서 창의의 깃발을 세웠다. 고광순 의병부대는 유격전술을 써서 조석으로 변장하고, 어제 동쪽을 쳤다면 오늘은 서쪽을 치고, 밤낮으로 진지를 바꾸는가 하면, 구름과 같이 모였다 흩어지며, 치고 빠지기를 번개같이 하는 바람에 일군들은 이러한 유격전에 시달리고 지친 끝에 아예 고광순 부대의 뿌리를 뽑아버릴 요량으로 녹천 본가에 불을 질러버렸다.
  
‘불원복’기
 ‘불원복’기
ⓒ 녹천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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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광순은 본가가 불타고 벙어리 아들 재환이 일군의 칼에 마구 찔리고 가솔이 오갈 데 없이 되었다는 소식에 더욱 집안과 나라의 원수를 갚겠다는 의지를 불태웠다. 그는 태극도안 위에 "불원복(不遠復: 머잖아 광복이 된다)"이라는 세 글자를 크고 단정하게 써 넣은 '불원복'기를 고안해 군기로 사용했다. 장졸들은 아침저녁으로 이 국기 겸 군기에 절하면서 국권회복을 염원하며 죽기를 맹세하고 싸웠다.

녹천 의병부대는 능주 양회일 의병부대와 담양 이항선, 장성 기삼연 의병부대 등과 제휴하여 게릴라 연합전술로 능주와 동복을 공략하는 등, 인근 고을을 넘나들며 기습을 거듭해 봤으나, 훈련받지 못한 비정규군에다 빈약한 무기와 부족한 군량 등 악조건으로는 최신의 무기를 갖춘 적에게 결정적 타격을 주기는 어려웠다. 뿐만 아니라 관군과 일군들이 의병의 근거지를 겨냥하고 차츰차츰 죄어 들어오는 기미가 보이자 마침내 고광순은 전략을 바꾸어 지리산의 심산유곡으로 본진을 옮기고 일군을 그곳으로 유인할 계책을 세웠다.

그리하여 고광순은 월봉산 국수봉을 향하여 신명께 고유제를 올리고 진용을 다시 정비하여 자신은 도독(都督)이 되고, 고제량은 도총, 박성덕은 선봉장, 윤영기 신덕균을 참모로 삼아 이튿날 지리산을 향하여 출발하였다. 이들이 지리산 피아골 연곡사에 당도한 때는 추석을 나흘 앞둔 1907년 8월 11일(음) 오후였다.
  
고광순의 무덤
 고광순의 무덤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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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죽어 귀신이 돼서라도

지리산 연곡은 남으로 화개와 북으로 문수골을 끼고 있는 골짜기다. 예로부터 화개는 호남에서 영남을 오가는 관문으로, 마을에는 경상도와 전라도에서 찾아든 지리산 포수가 많이 살고 있기에 고광순은 일군과 전투할 때, 그들의 도움도 받을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더욱이 문수골은 험한 천연 요새이니, 이 두 곳의 지리를 이용하여 유격전술을 쓴다면 대일항전에 승산이 있을 것으로 보았다.

고광순은 그렇게 판단하고 의병진을 유격전에 편리하도록 소단위로 재편성하여 날마다 훈련에 열중하였다. 그런 가운데 고광순 의병진은 여러 차례 적과 교전하여 상당한 전과를 올렸다. 하지만 적은 9월 11일 새벽 6시 무렵에는 의병진이 머물고 있는 연곡사 일대를 여러 겹으로 완전히 포위했다.

희끄무레한 새벽녘 초병이 몸을 숨기고 언저리를 살펴보니 연곡사는 이미 적의 병력으로 완전히 포위되었다. 초병의 숨 가쁜 보고를 들은 고광순은 마침내 최후 결전을 준비하였다. 고광순은 부하들에게 무겁게 입을 열었다.

"지금 이 병력으로는 적과 싸워 전혀 승산이 없다. 나는 이미 나라를 위하여 한 몸 바치기로 한 사람이니 적탄에 맞아 죽을 것이다. 너희들은 군사들을 데리고 이곳을 빠져나가 뒷날을 도모하라. 특히 네가 맡은 각종 군부(軍簿, 군의 장부)들이 절대로 적의 수중에 들어가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한다. 이것은 군령이다."

고광순은 그 말을 마치자마자 총을 들고 방을 뛰쳐나가 적진을 향해 소리쳤다.

"이놈들! 너희들은 내 집안과 나라의 원수다. 내 죽어 귀신이 되어서라도 반드시 너희들의 씨를 말리고 말 것이다."

고광순은 적을 연곡사 경내 계곡으로 유인하여 동백나무 그루터기에 기대어 총알이 다할 때까지 쏘고 또 쏘았다. 고광순 부하들은 대장의 뒤를 따랐다. 적은 이때를 기다렸다는 듯 그들을 향해 일제히 사격을 가해 왔다. 적은 30여 분 동안이나 집중포화를 퍼부었다. 고광순과 부하 10여 명은 모두 장렬한 최후를 맞았다. 1907(정미)년 음력 9월 11일 묘시(오전 6시 전후)였다.
  
포충사 내 고경명 영정
 포충사 내 고경명 영정
ⓒ 포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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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향(義鄕) 호남인의 뿌리, 포충사

이날(음 2007. 9. 11.) 고광순의병장 추모제는 1시간 남짓 만에 끝났다. 마지막 순서는 녹천의 원혼을 달래는 살풀이춤이었다. 마이크를 잡은 사회자는 "어매 환장하도록 좋은 날씨"라고 흥을 돋웠다. 정말 청명한 날씨였다.

"사람은 죽은 뒤 100년 뒤에 바른 평가를 할 수 있다"고 하더니, 녹천 고광순은 사후 100년 만에 자랑스러운 의병장으로 부활한 것을 지켜보는 서생의 마음은 더없이 흐뭇했다. 우리 일행은 그 길로 광주광역시 원산동에 있는 포충사(褒忠祠)로 달렸다.

이곳은 임진왜란 때 의병장으로 나라를 구한 충렬공 고경명(高敬命) 선생과 그의 두 아들 종후(從厚) 인후(因厚) 및 유팽로(柳彭老) 안영(安瑛) 두 분을 받드는 곳으로 일찍이 의향(義鄕) 호남의 뿌리였다. 고경명은 1592년 임진년에 왜란이 발발하자 아들 고종후, 고인후와 함께 담양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임진왜란 당시 고경명 부자가 일으킨 의병은 당시 호남 최대 규모였다. 특히 고경명은 광주·순천·남원·옥과 일대는 물론이고 전국 각지의 여러 의병장에게 격문을 띄워 상황의 심각성을 공유하고 의병 세력을 규합하려 노력하였다. 본래는 북상을 목표로 그해 6월에 은진까지 진격하였으나 왜군이 금산을 공격한다는 소식을 접하고는 다시 남하하였다.

그해 7월 10일에 금산 일대에서 왜군과 맞서 싸웠으나 크게 패한 뒤 후일을 기약하자는 주변의 만류에도 "패장은 죽음만이 있을 뿐이다."라고 하며 끝까지 항쟁하다 끝내 두 아들 고인후, 유팽로(柳彭老), 안영(安瑛) 등과 함께 순절했다.

그날 광주의 포충사(褒忠祠) 참배에 이어 늦은 오후 창평의 고광순 의사 사당인 포의사(褒義祠)에도 들러 공의 영정 앞에 분향을 하면서 400년을 이어온 충혼에 깊이 고개 숙였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월간 <순국> 2024년 2월호에도 실렸습니다.


태그:#의향호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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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 은퇴 후 강원 산골에서 지내고 있다. 저서; 소설<허형식 장군><전쟁과 사랑> <용서>. 산문 <항일유적답사기><영웅 안중근>, <대한민국 대통령> 사진집<지울 수 없는 이미지><한국전쟁 Ⅱ><일제강점기><개화기와 대한제국><미군정3년사>, 어린이도서 <대한민국의 시작은 임시정부입니다><김구, 독립운동의 끝은 통일><청년 안중근>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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