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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구사 석탑과 지리산 주능선 연봉, 거북이 지형에 올라와 있는 사찰
 등구사 석탑과 지리산 주능선 연봉, 거북이 지형에 올라와 있는 사찰
ⓒ 이완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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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 남원시 인월면에서 경남 함양군 마천면까지 이어지는 20.5km의 지리산 둘레길 3코스 구간은 등구재(登龜峙)를 지나면서 지리산 주능선을 조망하기 좋은 산길이다.

함양에서 지리산 가는 길의 관문인 오도재(悟道峙)를 넘으면 곧 지리산 조망공원에 이르는데 지리산 천왕봉에서 반야봉까지 펼쳐지는 장엄한 경관을 한눈에 볼 수 있다. 이렇게 등구재를 넘거나 오도재를 넘어 찾아가는 '등구 마천' 지역은 예로부터 지리산으로 향하는 으뜸 나들목이었다. 

등구 마천 큰애기는 곶감 깎으러 다 나가고,
지리산에 줄 박달은 처녀 손길에 다 녹는다'

이 민요의 가사처럼 지리산 어귀의 '등구 마천'은 곶감으로 유명하였다. 이곳 처녀들이 늦가을이면 곶감을 깎아서 박달나무 막대에 매달았다. 고전문학 판소리 '변강쇠가'에서 변강쇠가 옹녀와 함께 '등구 마천'을 찾아간다. 이렇게 '등구 마천'은 지리산의 가는 길이며 험한 산골의 대명사였다. 지리산 계곡에 매서운 겨울 바람이 휘몰아치는 1월 하순에, 감나무 줄기 껍질이 거북 등같이 검게 얼어붙은 '등구 마천'의 등구사(登龜寺)를 찾아갔다.

함양군 '등구 마천'의 오도재와 삼봉산을 잇는 산줄기에 오도봉(1038.5m)이 있고, 이 산봉우리 남쪽 산자락의 촉동마을 뒤쪽 연화봉(蓮花峰)에 등구사가 있다. 이 절집은 20여 년 전부터 가람의 모습을 갖추어 가고 있는데, 수백 년 동안 폐허로 잡초만 무성했던 빈터의 허허로움은 여전하다.

이곳 지형이 신령한 거북이가 팔괘(八卦)를 등에 지고 연화봉에서 삼봉산을 바라보며 하늘로 기어 올라가는 명당이라고 한다. 풍수지리에서 유래한 '등구'란 지명이 천 년의 이야기를 머금고 있다.
 
등구사 재건하는 가람과 지리산 주능선, 오랜 세월 폐사지였던 등구사의 허허로움
 등구사 재건하는 가람과 지리산 주능선, 오랜 세월 폐사지였던 등구사의 허허로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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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등구사에는 금관가야의 마지막 왕인 구형왕(仇衡王, ?~557, 재위 521~532?)의 전설이 전해온다. 532년에 신라(법흥왕)가 금관가야를 침공했다. 구형왕은 '백성들을 전쟁의 제물로 삼을 수 없다'며 나라를 신라에 양도하고, 지리산 자락에 들어와 함양과 산청 지역에 머물렀다고 한다. 

이곳 함양군의 지리산 '등구 마천'에 구형왕이 머물렀다가 칠선계곡으로 떠났다. 이 지역에는 왕이 떠났으므로 '빈 대궐'로 남아서 폐허가 되었고, 칠선계곡에는 석성인 추성(秋城), 대궐터, 파수대와 뒤주터 등이 있다. 지금도 이 지역에서는 촉동마을 뒤 골짜기 연화봉에 등구사가 위치하는 곳을 빈대궐 또는 빈대골이라 부른다. 

구형왕은 칠선계곡에서도 다시 산청 왕산으로 옮겨가고, 구형왕릉이라 추정되는 흙 한 줌 없는 커다란 돌무덤을 남겼다. 멸망한 금관가야가 왕족은 신라의 진골로 편입되었다. 구형왕의 사후 백년쯤 지나서 구형왕의 증손자인 김유신(595~673) 장군이 삼국통일의 주역으로 활동한다.

해발 700여m 고지에 위치한 겨울 등구사의 추위가 매섭다. 등구사의 허허로운 가람 뜰에서 지리산 주능선의 이어진 연봉을 바라본다. 하봉, 중봉, 천왕봉, 제석봉과 촛대봉 등 지리산 주능선의 흐름이 '등구 마천'의 등구사에서는 큰 바다에서 출렁이는 거센 파도처럼 생동감이 넘치는 조망을 연출한다.

지리산 '등구 마천'에는 570년대에 진평왕이 10살 어린 시절(왕이 되기 전)에 3년 동안 지냈던 곳이다. 진평왕은 신라의 국왕으로 즉위하여 지리산 '등구 마천'에 군자사(君子寺)를 창건했다. 진평왕의 외손주인 태종무열왕(太宗武烈王) 김춘추(金春秋, 603~661)는 656년, 군자사가 있는 지리산 '등구 마천'에 등구사를 안국사, 금대암과 함께 세웠다.
 
거북의 알 같은 등구사 석조
 거북의 알 같은 등구사 석조
ⓒ 이완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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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구 마천'의 등구사, 안국사와 금대암 세 사찰은 불교음악인 범패와 인연도 깊다. 범패를 기록한 서적인 「어산청유상록서魚山廳留上錄序」에는 진감선사(774~850)가 도입한 범패가 함양 안국사와 등구사에 전승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범패는 9세기 초반 지리산 하동에서 꽃을 피우다가 9세기 후에는 이렇듯 지리산 '등구 마천'에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조선시대 15세기 후반에 금대암이 범패 수련 사찰이라는 기록이 지리산 여행 기록인 '두류기행록'에 있다.

이곳 등구사는 신라 말에서 고려 초에 이르는 시기에 불이 나서 빈터로 남아 있다가, 언젠가 중건되어 15세기에는 지리산 유람기에 이 사찰이 기록된다. 그 후에 다시 폐허가 되었다가 18세기 초에 안국사가 화재로 소실되자 평평한 지형에 있는 등구사를 재건했다고 했다고 한다. 그 뒤에 등구사가 또다시 폐허 되고 최근 가람의 형태를 되찾고 있어 무상(無常)한 부침(浮沈)을 계속하고 있다.

오랜 세월 폐사지(廢寺址)였던 등구사의 빈터가 천년 세월의 풍상을 견디며 예스런 자태를 간직하고 있다. 너럭바위 위에 거북이 알 같은 원구형의 바위가 놓여 있다. 등구사 가람에 흐르는 작은 개울을 건너는 연화교(蓮花橋)의 다리 난간에 석조 거북 형상이 있어 눈길이 머문다. 거북은 가락국의 토템이었다. 가락국의 김수로왕을 맞이하며 백성들이 구지봉에서 불렀다는 구지가(龜旨歌)를 지리산 연화봉 거북 지형의 등구사에서 읊어본다. 

금관가야의 구형황이 나라를 신라에 넘겨주고 낙동강 물줄기를 거슬러 올라와 지리산의 '등구 마천' 거북 지형을 찾아온 것이 우연은 아닌 것 같다. 거북은 김수로왕 때부터 강력했던 가야의 해양 세력 선단(船團)을 상징했던 것이 아닐까? 지리산 '등구 마천' 등구사에는 허허로운 가람의 너럭바위 위에 호젓이 놓여 있는 둥근 바위가 있다. 금관가야 너른 바다를 꿈꾸는 거북이 알처럼 오래오래 바라보았다. 

이곳 '등구 마천'의 물줄기는 금관가야의 고향 낙동강과 바다로 이어진다. 해양을 터전 삼아 대륙으로 소통하고 무역하며 활발히 활동 범위를 넓혀가며, 한때는 역사의 주역이었던 가야의 꿈이 미래에 이 땅에서 되살아나 펼쳐지기를 기대해 본다. 지리산 '등구 마천'의 등구사 여행은 맥놀이를 거듭하는 범종의 소리처럼 여운으로 오래 남았다. 
 
등구사 연화교 석조 거북 형상
 등구사 연화교 석조 거북 형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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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함양등구마천, #함양등구마천등구사, #함양등구사와가야구형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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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관광해설사입니다. 향토의 역사 문화 자연에서 사실을 확인하여 새롭게 인식하고 의미와 가치를 찾아서 여행의 풍경에 이야기를 그려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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