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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안군에는 1004개의 섬이 있다. 1004는 날개 달린 천사다. 신안군은 천사 조각상 1004개를 세우고 있다. 섬 하나에 천사가 하나다. 그 섬들에 가면 생명이 꿈틀대고 역사가 흐르며 자연이 숨 쉬고 낭만이 넘실댄다. 미래의 역사·문화·환경 자원으로 각광 받는 신안 1004섬. 그 매력을 새롭게 만나는 연중기획을 시작한다. 황호택 KAIST 문술미래전략대학원 겸직교수와 이광표 서원대 교수가 매주 1회 집필한다.[편집자말]
신라의 문장가 최치원(9세기), 중국 송나라의 문신 서긍(徐兢, 12세기), 프랑스의 주(駐) 상하이 영사 샤를 드 몽티니(19세기), 그리고 세계 최고의 바둑기사 이세돌(21세기). 1000년 넘은 시간의 폭을 지닌 인물들. 그 이름은 모두 신안군 비금도의 내력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키워드다. 이들의 삶과 스토리는 모두 비금도의 역사와 문화가 되었고 멋진 풍경이 되었다.

900년 전 비금도 한가위를 즐긴 송나라 사신들

868년 어느 날 비금도 수대리. 웅대한 꿈을 안고 중국 당나라 유학길에 오른 12세의 최치원이 비금도 서남쪽 해안의 수대리에 들렀다. 마실 물을 구하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비금도는 가뭄에 시달리고 있었다. 최치원은 수대리 뒷산 봉우리에 우물을 만들고 기우제를 지냈다. 이후 가뭄이 해소되었다. 그 후 비금도 사람들은 최치원의 호를 따 이 우물을 고운정(孤雲井)이라 불렀다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신안 비금도의 서남쪽 해안 수대리의 ‘천년의 샘’. 868년 중국 당나라 유학길에 오른 최치원은 가뭄에 시달리는 이곳에 들러 기우제를 지내고 우물을 판 것으로 전해온다.
 신안 비금도의 서남쪽 해안 수대리의 ‘천년의 샘’. 868년 중국 당나라 유학길에 오른 최치원은 가뭄에 시달리는 이곳에 들러 기우제를 지내고 우물을 판 것으로 전해온다.
ⓒ 이광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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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치원이 판 우물. 최치원의 호를 따 고운정이라고 부른다.
 최치원이 판 우물. 최치원의 호를 따 고운정이라고 부른다.
ⓒ 신안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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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의 비금도 서남문대교 초입이다. 최근엔 이곳을 '천년의 샘'이라 부른다. 커다란 글씨와 안내판이 서 있고 그 옆 계단을 오르면 야트막한 언덕 정상이 나온다. 비금도와 도초도를 연결하는 서남문대교의 날렵한 모습이 한눈에 들어온다. 여기 고운정이 있다. 최치원 설화는 비금도가 중국과 한반도를 오가는 교통의 요지였음을 의미한다.

1123년 6월, 중국 송나라의 사신단 200여 명이 고려를 방문했다. 그들은 바닷길로 중국과 개경을 오가면서 비금도에 두 차례 들렀다. 당시 사신단의 일원이었던 서긍은 고려 기행문 '선화봉사고려도경(宣和奉使高麗圖經)'을 남겼다. 이 기록은 현존하는 사료 가운데 고려 사람들의 일상을 가장 자세히 기록한 것이다. 여기에 비금도에 관한 내용이 나온다.

서긍 일행은 1123년 5월 26일 중국을 떠나 서해로 들어와 흑산도를 거쳐 6월 4일 비금도에 정박했다. 당시 비금도는 죽도(竹島)로 불렸다. 다음 날엔 임자도에 정박했고 6월 12일 예성항(벽란도)에 도착해 고려의 수도인 개경에 입성했다. 개경에 한 달여 머문 이들은 7월 15일 예성항을 출발해 귀국길에 올랐고, 그 도중 8월 16일부터 사흘 동안 비금도에 다시 정박했다. 서긍은 비금도 체류에 대한 소회를 이렇게 적었다.
 
이날 오후 7시가 다 되어 배가 죽도(비금도)에 이르러 정박하였다. 산은 여러 겹이고 숲의 나무들은 푸르고 무성하였다. 그곳 역시 주민들이 있고 우두머리도 있었다. 산 앞에는 흰 돌로 된 암초 수백 덩어리가 있는데 크기가 같지 않은 것이 흡사 옥을 쌓아놓은 것 같았다. 귀로에 사신이 이곳에 이르렀을 때 마침 추석 보름달이 떠올랐다. 밤은 고요하고 물결은 잔잔한데 밝은 노을이 비치고 비낀 달빛이 천 길이나 되어 섬과 골짜기와 배와 물건들이 온통 금빛이 되었다. 모든 사람이 일어나 춤추고 그림자를 희롱하며 술을 따르고 피리를 부니 마음과 눈이 즐거워서 앞에 먼바다가 놓여 있는 사실도 잊을 정도였다.
 
서긍의 눈에 비친 비금도는 평화롭고 아름다웠으며 낭만적이었다. 돌아가는 도중 비금도에 정박했을 때는 한가위 무렵. 휘영청 보름달의 풍경이 한 폭의 그림을 연상시킨다. 경치 좋고 인심도 좋으며 여러모로 풍요로운 분위기가 물씬 풍긴다. 서긍이 배를 댔던 곳은 지금 비금도의 어느 곳일까. 아무래도 그림산과 선왕산이 배경으로 잘 보이는 서남쪽 해변이 아닐까 싶다. 그림산과 선왕산은 그리 높지 않아도 바위가 두드러진 산이니까 말이다.

170 년 전 한국과 프랑스의 첫 만남

1851년 4월, 프랑스의 고래잡이 어선 나발호가 비금도에서 난파했다. 당시는 조선에서 천주교 박해로 프랑스 선교사들이 목숨을 잃을 때였다. 비금도에 표류한 프랑스 선원들은 조심스럽고 두려웠다. 그들 가운데 9명은 작은 배를 타고 중국 상하이로 건너가 프랑스 영사관을 찾았다. 구조를 요청하기 위해서였다.

상하이 주재 영사였던 샤를 드 몽티니는 통역관, 중국인 등과 함께 나발호 선원들을 구하기 위해 비금도를 찾았다. 몽티니 영사는 프랑스 선원들이 이런저런 ​고초를 겪고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비금도 섬 주민들의 보살핌으로 무사히 지내고 있었다. ​조선의 조정에서는 이들이 중국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배를 내주었을 정도였다.

'비변사등록' 철종 2년 4월 1일자에도 "나주 부근의 조창(漕倉)에 정박하고 있는 조선(漕船) 중에 돛을 두 개 달고 튼튼한 것으로 한두 척을 즉시 저들이 있는 곳으로 옮겨 저들 스스로 자세히 살펴보게 하여 사용할 수 있다고 하면 곧 채비해 주어… 조금이라도 소홀히 대접하는 일이 없도록 하라"는 내용이 나온다.
 
프랑스 파리의 세브르국립도자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조선 옹기병 2점. 1851년 중국 상하이 주재 프랑스 영사 몽티니기 비금도에서 선물로 받아 중국을 거쳐 프랑스로 가져간 뒤 1856년 박물관에 기증했다.
 프랑스 파리의 세브르국립도자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조선 옹기병 2점. 1851년 중국 상하이 주재 프랑스 영사 몽티니기 비금도에서 선물로 받아 중국을 거쳐 프랑스로 가져간 뒤 1856년 박물관에 기증했다.
ⓒ 국립문화재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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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이 한결 가벼워진 몽티니는 비금도를 관할하는 나주 목사를 만나게 되었다. 몽티니는 선원들과 함께 중국으로 돌아가기에 앞서 감사의 마음을 담아 배의 갑판에서 송별회를 가졌다. 1851년 5월 2일의 일이다. 몽티니는 상하이에서 가져온 샴페인을 내놓았다. 비금도 주민들도 항아리에 술을 담아 내왔다. 막걸리와 소주였다. 비금도 주민들과 프랑스 선원들은 술을 주고받으며 기분 좋게 어울렸다.

이것이 한국과 프랑스의 공식적인 첫 만남이다. 비금도가 그 역사적인 무대였다. 한국과 프랑스 교류사에서 매우 중요한 장소가 아닐 수 없다. 몽티니 영사는 비금도를 떠나며 나주 목사로부터 옹기병 3점을 선물 받았다고 한다. 그날 갑판에서 마셨던 술이 담겼던 옹기병이었는지, 술을 담은 또 다른 옹기병이었는지는 모르겠다. 술이 담긴 옹기였다면 옹기병 선물이라기보다는 조선의 술 선물이라고 보는 게 더 적절할 것 같다.

몽티니는 나발호 난파와 비금도에서의 경험을 파리에 있는 황제 나폴레옹 3세에게 자세히 보고했다. 그 후 프랑스로 돌아간 몽티니는 옹기병 두 점을 1856년 3월 파리의 세브르국립도자박물관에 기증했다.

2003년 국립문화재연구소(현재의 국립문화재연구원)는 세브르국립도자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한국의 문화유산을 조사했다. 그때 두 점의 옹기병을 확인했고 이후 나발호의 비금도 표류 이야기가 알려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2023년 5월 세브르국립도자기박물관에서 한국과 프랑스의 첫 만남을 기념하는 행사가 열렸다. 이때 옹기병이 전시되었다.

옹기병 두 점은 모두 짙은 갈색. 하나는 높이 23.2cm로 온전한 모습을 유지하고 있으며 다른 하나는 높이 19.1cm로, 주둥이가 약간 깨진 상태다. 바닥에는 몽티니 영사가 1856년 3월 16일 기증했다는 내용의 라벨이 붙어있다. 이들은 비금도의 역사와 문화를 이해하는 데 매우 흥미로운 유물이 아닐 수 없다.

신안군은 2026년 한국-프랑스 수교 140주년을 맞아 이를 기억하기 위한 프로젝트를 진행할 계획이다. 프랑스 선원의 표류를 기억하고 양국의 첫 만남을 기념하기 위한 공원을 조성하고 샴페인 박물관을 조성할 예정이다.

천재기사 이세돌, AI와 세기의 대국

2016년 3월 9~15일 서울 광화문네거리 포시즌스호텔, 세계 바둑의 최강자 이세돌 9단과 구글 딥마인드 인공지능(AI) 알파고의 바둑 대결이 열렸다. 최고 수준의 인공지능 바둑 프로그램과 인간 바둑 최고수의 대결에 세계의 이목이 집중되었다.

아무리 뛰어난 AI라고 해도 무한대의 경우의 수를 지닌 바둑에서는 인간을 능가할 수 없으리라는 것이 대부분의 예상이었다. 그러나 낙관은 완전히 빗나갔다. 뚜껑을 열고 보니 알파고의 실력은 엄청났다. 1패, 2패, 3패… 전 세계가 충격에 빠졌다.

이세돌은 3월 13일 제4국에서 180수 백 불계승으로 소중한 1승을 일궈냈다. 이 대국에서 이세돌의 78수는 '신의 한 수'로 불렸다. 예상 못한 수에 알파고가 당황했고 이때부터 이세돌이 승기를 잡았다.

그날 이세돌은 "한 판을 이겼는데 이렇게 축하를 받은 것은 처음"이라며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가치 있는 승리"라고 말했다. 최종 결과는 1승 4패였다. 우리는 지금 AI 속에서 살고 있지만 2016년 이세돌과 알파고의 대국은 인류사에서 매우 상징적인 사건이 아닐 수 없다.
 
비금도에는 이곳 출신의 천재 바둑기사 이세돌을 기억하기 위한 이세돌바둑박물관이 있다. 박물관 앞에는 2016년 3월 이세돌과 알파고의 대국에서 이세돌이 1승을 거둔 제4국의 기보 일부를 상징적으로 표현한 조형물이 세워져 있다.
 비금도에는 이곳 출신의 천재 바둑기사 이세돌을 기억하기 위한 이세돌바둑박물관이 있다. 박물관 앞에는 2016년 3월 이세돌과 알파고의 대국에서 이세돌이 1승을 거둔 제4국의 기보 일부를 상징적으로 표현한 조형물이 세워져 있다.
ⓒ 이광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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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둑돌을 쥔 인간(이세돌)의 손.
 바둑돌을 쥔 인간(이세돌)의 손.
ⓒ 이광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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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세돌은 비금도 출신이다. 이세돌은 어려서부터 바둑에 출중한 재주를 보였다. 이세돌은 교사 출신의 농부이자 바둑 아마 5단인 아버지로부터 바둑을 배웠다. 아버지 이수오는 아침마다 농사일을 나가면서 막내아들 이세돌에게 사활문제(주어진 상황에서 내 돌이 사는 법과 상대방의 돌을 죽일 수 있는지의 문제)를 내주곤 저녁에 돌아와 답을 맞혀 보았다고 한다.

이러한 훈련이 수 읽기의 힘이 되었다. 이세돌의 실력이 나날이 성장하자 아버지는 이세돌을 서울로 올려보냈다. 여덟 살 때 서울로 올라가 권갑용 8단 문하에 들어가 실력을 연마했다. 12세인 1995년 프로에 입문했고 2000년부터 거침없이 질주하기 시작했다.

이세돌의 바둑 DNA는 엄청나다. 1998년 타계한 아버지는 아마 5단이었고 큰형 이상훈은 프로 9단, 둘째 형 이차돌은 아마 5단, 큰누나 이상희는 아마 2단, 둘째 누나 이세나는 아마 6단이다. 비금도에는 이세돌이 태어난 집이 있다. 지금은 어머니와 둘째 형 이차돌이 지내고 있다.
 
이세돌바둑박물관 내부에 전시 중인 이세돌 모형. 이세돌의 앞자리에 앉아 대국 기념촬영을 할 수 있다.
 이세돌바둑박물관 내부에 전시 중인 이세돌 모형. 이세돌의 앞자리에 앉아 대국 기념촬영을 할 수 있다.
ⓒ 이광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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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세돌 생가에서 멀지 않은 곳 지당리에는 2008년 문을 연 이세돌바둑박물관이 있다. 폐교한 비금초등학교 대광분교(옛 비금대광초등학교) 건물을 박물관으로 꾸민 것이다. 이곳은 이세돌 전시관, 대국장, 신안천일염바둑팀 홍보관 등으로 꾸며져 있다. 이세돌과 그의 형제들이 사용했던 바둑판과 바둑알, 그들이 받은 상패, 관련 사진 자료, 바둑을 두는 이세돌의 모형 등이 전시되어 있다.

이세돌바둑박물관은 현재 신안군이 관리 운영한다. 신안군의 김호남씨는 "비금도를 찾는 관광객들이 꾸준히 박물관을 방문하는데, 특히 야외 조형물에 대한 관심이 많은 것 같다"고 전했다.

바둑박물관 입구에는 거대한 조형물이 서 있다. 2016년 이세돌과 알파고의 대결 제4국을 모티프로 한 것이다. 바둑판과 함께 두 개의 손이 형상화되어 있다. 왼쪽은 사람의 손이고 오른쪽은 로봇의 손이다. 사람의 손은 이세돌의 손을, 로봇의 손은 알파고의 손을 상징한다.
 
이세돌바둑박물관엔 이세돌의 어린시절 사진들이 전시되어 있다. 이세돌이 형 누나와 함께 바둑을 두고 있는 모습.
 이세돌바둑박물관엔 이세돌의 어린시절 사진들이 전시되어 있다. 이세돌이 형 누나와 함께 바둑을 두고 있는 모습.
ⓒ 이광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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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세돌이 태어난 비금도 집. 조용하고 고즈넉한 분위기이다. 문패(작은 사진)에서 알 수 있듯 지금은 이세돌의 어머니와 형이 살고 있다.
 이세돌이 태어난 비금도 집. 조용하고 고즈넉한 분위기이다. 문패(작은 사진)에서 알 수 있듯 지금은 이세돌의 어머니와 형이 살고 있다.
ⓒ 이광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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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이세돌은 은퇴했지만 그는 우리 시대에 더욱 상징적인 존재로 자리 잡았다. 이세돌과 AI의 대국을 시각적으로 구현한 것이 이세돌바둑박물관의 조형물이다. 이 조형물은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김호남씨의 얘기가 실감이 난다.

그건 인간과 AI의 대결이기도 하고 인간과 AI의 교류와 소통이기도 하다. 인류사의 일대 사건, 그 세기의 대국을 비금도에서 복기해 볼 수 있다는 건 흥미로운 경험이다. 나아가 비금도의 역사와 내력까지 돌아보게 만든다. 최치원, 서긍, 몽티니 그리고 이세돌과 알파고. 비금도에 축적된 시간과 문화의 역사는 이렇게 낭만적이면서 의미심장하다.

덧붙이는 글 | <참고문헌>
강제윤, 《신안》, 21세기북스, 2020
경기도박물관, 《고려도경 : 900년 전 이방인의 코리아 방문기》, 2018.
국립문화재연구소, 《프랑스 세브르국립도자박물관 소장 한국문화재》, 2006
서긍, 조동원 외 옮김, 《고려도경》, 황소자리, 2005
정아람, 《이세돌의 일주일 : 밀착 취재로 복기한 인간 이세돌과 그의 바둑》, 동아시아, 2016


태그:#비금도, #최치원, #서긍, #몽티니, #이세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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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에서 문화부 기자, 정책사회부장, 오피니언팀장, 논설위원 등으로 일했고 현재 서원대학교 휴머니티교양대학 교수로 재직 중이다. 대중들이 문화유산과 예술을 어떻게 인식하고 수용하고 향유하는지에 대해 관심을 갖고 탐구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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