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필자는 이제까지 개인사 중심의 인물평전을 써왔는데, 이번에는 우리 역사에서, 비록 주역은 아니지만 말과 글 또는 행적을 통해 새날을 열고, 민중의 벗이 되고, 후대에도 흠모하는 사람이 끊이지 않는 인물들을 찾기로 했다. 

이들을 소환한 이유는 그들이 남긴 글·말·행적이 지금에도 가치가 있고 유효하기 때문이다. 생몰의 시대순을 따르지 않고 준비된 인물들을 차례로 소개하고자 한다. [기자말]
우리가 세계적으로 앞섰고 가장 내세울만한 것 중에는 금속활자가 있다. 국제사회에서 통용되는 독일의 구텐베르크가 1440년대 말기에 개발한 금속활자에 비해 200여 년 앞선다.

이전까지 책의 인쇄는 목판(木板)으로 만들어졌다. 통나무를 베어 물에 담갔다가 말려서 만들었다. 조립된 활자가 쉽게 튀거나 허물어져 경제성이 취약했다. 일반이 활용하기에는 비용 등 어려움이 많았다.

고려 조상들은 활자의 이로운 점을 깨닫고 그 실패에 대한 연구를 거듭했다. 어떻게 하면 활자를 쇠붙이로 튼튼하게 만들어 판을 손쉽게 짜서 여러 주제 분야의 책을 수시로 값싸게 찍어 펴낼 수 있을까의 고안이었다.

우리 조상들은 삼국시대 이래 청동으로 범종과 불상 그리고 동전 등을 정교하게 주조해내는 기술을 체험해 왔기 때문에, 여기에 판짜기용 접착성 물질을 개발하고 또한 쇠붙이 활자에 잘 묻는 기름먹만 개발한다면 금속활자 인쇄는 충분히 가능했던 것이다.

특히 우리나라는 중국과 달리 영토가 좁고 인구가 적으며, 독서와 학문하는 이들이 한정되어 있기 때문에 책을 찍어내는 부수는 적으면서 여러 학문분야에 걸쳐 필요한 책을 수시로 고루 찍어내야 했으니, 우리에게는 정녕 안성맞춤 격의 이로운 인쇄법이었다.(천혜봉, <금속활자>)

우리나라에서는 고려 고종 21년(1234년) 무렵부터 금속 활자를 사용하여 인쇄를 한 것으로 전한다. 원나라 지배시기인 1372년 7월 청주목의 교외에 있던 흥덕사에서 찍어낸 <불조직지심체요절(佛祖直指心體要節)>(직지심요) 하권은 1866년 9월 병인양요 때 프랑스군이 탈취해갔었다.

금속활자가 크게 개발·활용되기 시작한 것은 조선 세종대왕 때이다.

세종은 16년(1434), 여러가지 문물제도가 정비되는 한창 고비였다. 자동 누기(漏器)를 만들어서 처음 쓰기 시작하였고, 또 한 편 야인 북정(北征)으로 다량의 무기를 주조해야 했다. 다량의 무기를 구해와 쇠로 주조할 때 이어서, 금속 자료를 쓰는 기술이 급속 발전했다. 함께 활자를 만들지 않으면 아니 되었다. 지중추원사(知中樞院事) 이천(李蕆)의 지휘 감독 아래 집현전 직제학 김돈, 직전 김빈, 호군 장영실, 첨사색원사 이세형, 사인 정척, 주부 이승지 등이 활자를 새로 만드는 일을 맡게 되었다.(홍이섭, <세종대왕>)

이천은 1376년(고려 우왕 2년) 경상도 예안에서 태어났다. 호는 불곡(佛谷)이고 시호는 익양(翼襄)이다. 아버지는 군인으로 군부판서를 지냈다. 27살에 무과시험에 합격한 이천은, 35살 때에 고급무관 후보자를 뽑는 중시 시험에 합격했으나 무인의 길을 버리고 기술관계 관청인 공조에 들어갔다. 무인천시 풍조에서 비롯된 전직이었다.

그는 두뇌가 명석하고 사려가 깊어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하고 많은 공적을 크게 남겼다. 공조참판으로서 황해도 일대 은광개발, 우군부 절제사로 대마도 정벌 참가, 좌군동지총제, 경상해도 조전절제사, 충청도 병마도절제사, 한양도성 보수공사 책임자, 표준저울을 만들어 전국에 배포, 조선의 군선(軍船) 개량과 노궁(弩弓) 개발, 악기 개선, 호조판서 재임 시 간의(簡儀), 혼의(渾儀) 등 천문기구 제작지휘, 평안도 도전제사로서 여진족 토벌하고 4군설치를 건의하여 이를 실현하는 등 조선의 관리로서 보기 드문 업적을 수행하였다.

그의 많은 업적 중에는 금속활자의 제조를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이천은 십수 년 동안 고심을 거듭한 끝에 새로운 자판을 만드는 데 성공하여 능률적이고 아름답게 인쇄하는 기술을 완성하였다. 또한 1434년에는 '갑인자(甲寅字)'라는, 자체가 예쁜 새로운 구리 활자를 주조하는 한편 같은 자형의 납 활자를 만들어냈다.

세종도 활자 제작에 비상한 관심을 기울이고 있었다고 한다. 1436년에는 납 활자 '병진자(丙辰字)'가 새로 제작되었다.

세종의 특별한 배려로 궁전 안에 세워진 주조소에서 왕과 이천과 남급은 주조술과 활판법 개량에 더욱 노력하고, 또한 명나라로 파견되는 사신들에게 명의 인쇄술을 연구하게 하는 등 모든 연구 결과를 종합하여 더욱 발전된 주조법과 인쇄술을 완성하게 하였다.(이은직 지음, 정호준 옮김, <한국사·명인전①>)

고려인들은 몽고의 침략으로 국토가 쑥대밭이 되는 상황에서 금속활자를 창안하고, 조선조 세종은 이천과 같은 인재를 발탁하고, 이천은 연구와 실험을 거듭하면서 금속활자를 개발하여 민족문화에 크게 기여했다.

그들(중국-필자)의 금속활자 인쇄는 명나라로 그 활자본들을 활자체ㆍ활자모양, 판짜기의 기술면에서 살펴볼 때 중국의 서지학자들도 언급했듯이 우리 동활자본의 영향을 받았음이 드러난다.

그리고 일본은 임진왜란 때 우리에게서 비로소 활자 인쇄술을 받아들었으며, 이것이 17세기의 일본문화를 발전시키는 데 큰 원동력이 되었다.

이렇듯 금속활자 인쇄라면 그 창안시기로 보나, 그것을 나름대로 꾸준히 개량 발전시켜 온 면으로 보나, 그 활자의 종류가 다양하면 서로 각각 특성을 지니고 있는 면으로 보나,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단연코 독보적인 위치를 지켜왔으니 문화민족으로서 더 없는 긍지요 자랑이라 하겠다.(천혜봉, 앞의 책)
 

태그:#겨레의인물100선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이 기자의 최신기사'한국 근현대사'를 고쳐 쓰다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