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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우물 야경3 | 120호 | 종이에 수채 이진우 작가는 마을에 화실을 두고 1997년부터 꼬박 20년 동안 열우물마을을 담아냈다. ⓒ 이진우
 
골목을 걷는 것은 동시대를 기억하는 가장 다정한 방식이다. 그 안에 우리네 삶의 오늘과 내일, 어제가 있다. '골목길 TMI'는 골목의 새로운 변화와 그 속에서도 변하지 않은 사람들의 살아가는 이야기다. 이번에는 인천 동암역 북광장에서 열우물경기장 사이 언덕을 지나 함봉산 안자락에 안긴 열우물마을의 고아한 풍경을 따라 걸었다. 수백 년 역사와 이야기가 고여 있는 우물가엔 마르지 않는 샘처럼 새로운 역사와 희망이 솟아나고 있었다.

달동네의 온기

부평의 마지막 달동네, 열우물 벽화마을. 땅보다 하늘이 더 가까운 산꼭대기까지 오래된 집들이 다닥다닥 붙어 살았다.

본디 사람의 발길이 거의 닿지 않던 야산에 1960년대 후반부터 도화동, 용현동, 율도 등에서 철거민이 몰려들어 집을 짓고 솥단지를 걸었다. 1970년대엔 주안국가산업단지가 생기며 도시 노동자들로 북적였다.

가파른 골목을 올라 도달하는 지상의 가난한 집, 살림은 어려웠지만 삶은 어렵지 않았다. 마당이 곧 길이 되고, 네 것 내 것이 따로 없는 한 뼘 앞마당에서 주민들은 서로 기대어 살았다. 겨울에 눈이라도 내릴라치면 미끄러져 넘어지기 일쑤였던 골목은 늘상 왁자지껄했고, 지나는 사람들에게 괜한 참견을 건네도 이상하지 않았다.
 
도시재생사업으로 초고층 아파트가 들어선 열우물 벽화마을의 옛 모습. 아파트 관리사무소에 걸린 사진을 한참 동안 바라보는 이진우 작가 ⓒ 유승현 포토디렉터
 
우물을 형상화한 조형물 ‘마르지 않는 샘물’. 단지 곳곳에 달동네의 생활 유산을 품은 작품 10점이 전시돼 있다. ⓒ 유승현 포토 디렉터
 
시간의 켜가 층층이 쌓인 그 동네는 지금 인천에서 가장 넓고 높은 아파트 숲이 되었다. 19만 2687㎡ 규모에 총사업비 1조 1621억 원이 투입돼 2022년 완공된 뒤 5678가구, 1만 4000여 명이 입주했다.

"상전벽해(桑田碧海)죠. 1997년부터 꼬박 20년을 달동네에서 살았는데, 번듯한 아파트가 들어서니 길이 헷갈리네요."

마을에 화실을 두고 희망의 벽화를 그렸던 이진우(59) 작가는 오늘 단지 안의 특별한 조형물을 보러 왔다. 도시재생사업으로 변화한 이곳엔 달동네의 생활 유산들이 작품이 되어 남아 있다.

"물도 잘 안 나오는 달동네에서 우물은 생명수였어요. 우물 청소도 하고, 타일도 곱게 붙여줬는데."

아파트 정문에 들어서자마자 마주친 '마르지 않는 샘물'. 우물을 형상화한 조형물 앞에서 이진우 작가는 옛 추억을 퍼올린다. 그의 얼굴에 옅은 미소가 번진다. 달동네는 사라졌지만, 지난 한 세기 공동체를 따스히 품었던 그 온기는 여전히 남아 있다. 누군가의 기억 속에, 또는 누군가의 인생 속에.

마르지 않는 우물
 
큰우물가엔 지금도 사람들이 모여든다. ⓒ 유승현 포토 디렉터
 
가뭄에도 마르지 않았던 고래우물 ⓒ 유승현 포토 디렉터
    
개발이 비껴간 곳, 윗열우물마을. 마을 사람들은 두레박 하나 가득 찰랑찰랑 물을 길어 올리는 게 복을 길어 올리는 것이라 믿었다. 좋은 우물 근처엔 많은 사람이 모여 살았고, 우물을 향해 마을의 안녕과 번영을 기원하는 '고유제(告由祭)'를 지내기도 했다.

마을에는 이름에 걸맞게 수십여 기의 우물이 있었다. 다른 마을에서는 대동 우물 하나 파기에도 온 마을 사람이 서둘러 몇 달이 걸렸는데, 이 마을에서는 혼자서도 몇 시간이면 우물을 팔 수 있어 풍요로웠다. 마당, 안뜰, 심지어 밭두렁에서도 물을 길어 올렸다.

그중 십정동 고래우물(십정동 79번지)은 윗열우물마을에서 가장 유서가 깊다. 열우물경기장 부지로 논이 수용되기 직전까지, 수백 년간 고래우물을 이용해 농사를 지었다. 박흥서(75)씨는 "1964년에 든 극심한 가뭄에도 물이 없어 벼농사를 짓지 못했던 아랫마을 사람들이 고래우물에서 물을 길어다 쓰는 일도 있었다"라고 회상했다.

이번엔 큰우물로 발길을 옮긴다. 양지우물(여우재로 26번길 49-53)엔 지금도 사람들이 모여든다. "배추도 씻고, 빨래도 하고, 한여름엔 등목도 많이 했지." 우물물을 퍼올려 순무를 씻고 있는 주민이 추억을 풀어낸다.

박흥서씨는 "사람들의 애환이 담긴 우물이 사장되지 않고 많은 사람이 이용할 수 있도록 잘 보존하고 가꾸는 것이 주민들의 바람"이라고 말했다.

함봉산 안자락, 웅숭깊은 마을
 
창녕 성씨 종갓집의 안뜰엔 돌을 박아 치장한 우물이 남아 있다. ⓒ 유승현 포토 디렉터
     
뒤뜰에 오래된 우물을 품고 있는 고택 ⓒ 유승현 포토 디렉터
 
아담한 한옥과 사시사철 마르지 않는 우물, 찬 바람 끝의 까치밥 홍시... 함봉산 안자락에 안긴 윗열우물마을엔 고아한 풍경이 웅숭깊게 들어앉아 있다. 주변에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기 전, 산과 논밭만 펼쳐졌던 호젓한 시절이 잠잠히 머문다.

수백 년 변함없는 풍경과 순수한 인심 뒤에는 긴 세월 한결같은 사람들이 있다고. 반남 박씨 세양공파 27대손 박흥서씨는 말한다.

"윗열우물마을은 집성촌이에요. 창녕 성씨(昌寧成氏), 반남 박씨(潘南朴氏), 능성 구씨(綾城具氏), 영월 신씨(寧越申氏) 일가가 모여 살며 고집스럽게 전통을 지켰죠."

여전히 이곳엔 성씨와 박씨가 많다. 창녕 성씨 회곡공파 참의공 종중(宗中)에 따르면 세조 2년(1456년) 병자사화 때 성씨 문중이 화를 피해 성습지 등 일곱 가정이 마을에 정착한 뒤 560여 년 세거지(世居地)가 됐다 한다.

"2006년까지 128가구가 그 명맥을 이어왔는데, 개발제한구역이 해제되면서 변화가 시작됐어요." 반들반들 윤이 나는 서까래와 ㅁ자 마당을 둔, 수백 년 묵은 기와집이 속절없이 사라졌다. 새로 온 사람들은 하나같이 빌라를 올렸다.

그래도 마을엔 발길 닿는 곳마다 옛 시간의 흔적이 남아 있다. 우물에선 여전히 물이 샘솟고, 여기저기 손질을 한 개량 한옥도 제 나름 세월의 멋을 풍긴다. 가파른 세상의 변화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대대손손 터를 지켜온 사람들의 순박함도 여전하다. "내가 태어난 집, 함께 자란 친구들이 곁에 있으니 더 바랄 게 없어요." 환하게 웃는 그의 얼굴 위로 햇살이 퍼진다. 느릿느릿, 열우물마을의 계절이 깊어간다.
 
대대손손 터를 지켜온 사람들 ⓒ 유승현 포토 디렉터
 
농익어가는 'K-전통주의 꿈'

술이란 그 곡식이 뿌리를 내린 뒤 무르익는 환경과 날씨, 풍경까지도 오롯이 담겨 완성되는 것. 전통주 전문 매장 '열우물가게'의 김보성(46) 대표는 열우물마을의 고즈넉함에 반해 두 해 전 이곳에 매장을 열었다. 세월 묵은 고택에 윤을 내고, 향기로운 전통주를 가득 채웠다.

"이곳은 쇼룸이자 아이디어 창고입니다. 400여 종의 독창적인 우리 술을 만날 수 있어요." 그의 뒤로 알록달록한 유리병에 담긴 증류주와 우리 과일로 만든 와인, 막걸리와 청주 등이 저마다의 자태를 뽐낸다. 우리 술이 이렇게 다채로웠나. 보는 것만으로도 흥이 오른다.

다양한 사업 아이디어도 이곳에서 숙성한다. 그가 기획한 술 소개를 부탁하자 '김보성 의리남 소주', 가수 김민종의 히트곡을 주제로 한 '하늘 아래서', 해병대가 주인공인 '팔각모 사나이' 등 요즘 술판을 뒤흔든 주인공들이 술술 나온다.
 
'전통주 어렵지 않아요. 우리 곁에 있어요'란 슬로건을 단 전통주 전문 매장 '열우물가게' ⓒ 유승현 포토 디렉터
 
마을 안자락에 뚝심 있게 세운 술집. 그 안에서 힙한 전통주를 빚어내는 김보성 대표의 꿈은 세계인에게 사랑받는 K-전통주를 만드는 것이다. ⓒ 유승현 포토 디렉터
 
열우물가게 김보성 대표 ⓒ 유승현 포토 디렉터
 
마을 안자락에 뚝심 있게 세운 '술집', 그 안에서 힙한 전통주를 빚어낸 그의 족적(足跡)은 하루아침에 이뤄진 것이 아니다. 롯데아사히주류, LG상사 와인사업부를 거쳐 뭇사람들이 1년에 한두 번 명절 때나 전통주를 마시던 때부터 전통주의 매력에 취해 산 세월이 15년이다.

"요즘 전통주 몸값이 높아져 흐뭇합니다. 개성 있는 양조장의 성장도 눈에 띄고요. 하지만 앞으로 해야 할 일이 더 많아요." 그는 올 초 '열우물양조장'을 열었다. 전통주 유통을 넘어 기획, 생산에 도전장을 낸 것. 양조장에서는 올해 초 '열우물소주25'를 생산했고, 강화의 특산물을 베이스로 한 '인천 고구마 소주'를 생산할 계획이다.

"'글로벌 주당'들을 우리 술에 취하게 만들 겁니다. 전 세계에 수출해 사랑받는 K-전통주를 만드는 게 목표입니다." K-주당 김보성. 그의 눈에서 반짝 빛이 난다. 세계로 뻗어나갈 K-전통주의 씨앗이 열우물마을에서 쑥쑥 여물어가고 있다.

(열우물가게 부평구 함봉로36번길 46-1, 0507-1438-4144)
 
김 대표가 기획한 증류주 ‘하늘 아래서’. 단감을 베이스로 만든 부드러운 술로, 가수 김민종의 노래 ‘하늘 아래서’에서 이름을 따왔다. ⓒ 유승현 포토 디렉터
 
열우물마을 지도 ⓒ 굿모닝인천
 
글 최은정 본지 편집위원│사진 유승현 포토 디렉터

'골목길 TMI' 영상 보기 (https://youtu.be/jUehknq8W4s?si=b1RR36VJ3ZxOf7sf)
 
'골목길 TMI' 영상 섬네일 ⓒ 굿모닝인천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굿모닝인천> 12월호에도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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