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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냉전이 본격화되면서 동북아가 두 진영으로 분화할 조짐이 심화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강조되는 화두의 하나가 한미동맹이다. 국가간 동맹, 외교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상부상조, 상호윈윈이고. 이를 통해 궁극적으로 세계 평화와 행복에 기여할 수 있다. 만약 부적절한 동맹논리나 역사적 관계가 부각될 경우 가짜뉴스로 그 폐해가 심각할 우려가 크다. 자칫 국민적 자존심을 상하게 하거나 국제적인 손가락질의 대상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윤석열 정부의 한미동맹에 대한 눈높이는 김의환 뉴욕총영사가 20일 미국 뉴저지 노우드공립학교에서 한미동맹 중요성에 대해 강연하면서 "미국이 한국을 살렸고, 그 덕분에 BTS도 블랙핑크도 삼성도 있을 수 있었습니다"라고 말한 것에서 확인된다<매일경제 2023. 11. 21.>.

이날 김 총영사는 한국전쟁 직후 황폐해진 한국의 사진을 보여주며 세계 최빈국 수준이었던 한국이 어떻게 세계를 선도하는 강국이 될 수 있었는지 설명에 집중, "1960년 내가 태어났을 당시만 하더라도 한국은 세계에서 가장 가난하고 비참한 국가였다. 하지만 이제 한국은 인구 5000만명 이상 국가중에 GNI 3만달러를 넘긴 '30-50 클럽'에 가입한 나라가 됐다"고 설명했다.

그는 "냉전시대 공산주의 국가로 둘러싸인 한국이 공산화되지 않고 번영할 수 있었던 결정적인 이유는 미국이 한국을 도왔기 때문"이라며 "미국은 한국을 위해 3만6574명의 군인을 희생하며 자유를 지켰다"며 "한미 동맹은 역사상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역사적인 관계다. 한국과 미국은 서로를 믿고 의지하며 더 높은 단계를 향해 나아가야 한다"라고 강조했다.

총영사는 외교와 국제 정치 분야에서 굉장히 중요한 역할을 하며 특정 국가나 지역에 대한 다른 국가의 대표이자 정부 간 대외 관계를 총괄하는 역할을 한다. 김 총영사가 한미동맹의 과거와 현재, 미래를 말한 것은 역사적 사실관계와 부합해야 하고 그것이 한미관계가 궁극적으로 한반도와 동북아를 포함한 세계의 행복지수를 높이는데 기여해야 한다. 그런데 BTS도, 블랙핑크도 삼성의 성공도 모두 미국 덕분이라고 치켜세우는 것은 과공은 비례라는 옛 말을 생각나게 한다.

김 총영사의 한미동맹 과찬은 윤석열 대통령이 집권이후 과거 대통령들과 큰 차이가 날 정도로 한미동맹을 강조하고 의미부여를 강하게 하는 것을 연상케 한다. 외교적 수사에서 과장이나 아전인수격 의미부여가 없을 수 없지만 그것이 지나칠 경우 역기능이 커진다는 점을 걱정해야 한다.

한미동맹, 한미관계에 대한 지난 150여 년 간의 근현대사를 큰 줄기에서 살필 때 두 나라의 역사적 궤적이 명백히 드러난다. 이런 점을 윤석열 정부는 깊이 살펴 현재와 미래의 한미동맹을 추진하는 자세를 지녀야 한다. 그것이 국민에 대한 기본적인 책무를 다 하는 것이고 특히 윤석열 정부가 저널리즘의 교과서적 논리와 충돌하는 식의 가짜뉴스 대책을 강행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미국이 국익을 챙기는 한반도 정책과 윤석열 정부의 정치

한미동맹을 언급할 때 한국의 입장도 중요하지만 미국의 대외정책을 살피는 것도 매우 중요하다. 그렇게 해야 치우치지 않고 균형적인 외교관계의 실체가 확인될 수 있다. 미국이 한반도와 맺기 시작한 뒤 반세기 넘는 외교관계는 큰 틀에서 일관성을 보이고 있는데 핵심은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최근 벌어진 이스라엘-하마스 전쟁에서 극명하게 확인되었다.

21세기 국제사회에서 최강자로 군림하고 있는 미국의 외교국방정책의 첫 번째 목표는 미 국익 수호와 증진이다. 국제평화나 정의, 윤리는 그 다음이라는 것은 클린턴 대통령이 1994년 5월 내린 대통령 결정 지침 25호(PDD 25)에 잘 명시되어 있다. 그 주요 내용은 아래와 같다(https://fas.org/irp/offdocs/pdd25.htm).

--- 해외에 파병된 미군이 참여하는 평화를 위한 작전은 미국 외교 정책의 핵심이 아니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그러나 미국은 평화를 증진하는 목표를 추진하는 국가로서 행동할 때, 신중하게 기획되고 원만하게 수행되는 평화 작전이 미국의 이익에 봉사하는 유용한 요인이라는 점을 인정한다. 이를 위해 이 지침은 평화작전에 동참하는 것이 미국에 선택적이고 유용하다는 것이 보장되어야 한다. ---

미국의 이런 입장이 극명하게 국제사회에서 확인되고 있는 사례가 이스라엘-하마스 전쟁이다. 유엔이 즉각 휴전을 결정하고 이스라엘의 가자지구에 대한 공격이 전쟁범죄와 흡사하다고 절규를 해도 미국의 입장은 이스라엘에 대한 군사적 지원이다. 가자지구의 병원 피해와 민간인 희생에서 확인되는 국제법과 인도주의 위반 등은 불가피하다는 것이 미국의 입장이다.

미국의 국방외교정책은 국가간 경쟁과 갈등이 일상화되어 있는 지구촌 상황에서 당연한 측면이 있다. 미국 정치는 국방외교를 수단으로 삼아 집권, 재집권이 가능하기 때문에 국가 이기주의에 민감한 미 국민의 눈치를 살펴야하기 때문이다.

오늘날 미국의 한반도 정책도 미국은 PDD 25에 입각해서 추진하고 있다는 점은 말할 필요도 없다. 사실 미국이 1950년 한국전 발생 전후이후 내놓았던 한반도 정책도 미국의 이익 확보가 최우선이었다. 그 결과 미국이 갈짓자 행보를 하기도 했다. 즉 미국은 1950년 동북아 방어선에서 한반도를 제외한 에치슨 선을 발표한 6 개월 후 한국전이 시작되자 입장을 바꿔 '유엔사'라는 다국적군을 만들어 참전한 것이다.

최근 서울에서 70년 만에 '유엔사' 참전국 17개국 국방장관회가 열리면서 국제사회의 이목이 집중됐다. 유엔사는 1950년 한국 전쟁 발생 직후 발족한 뒤 국제법적 적법성 여부가 논란이 되다가 1975년 11월 18일 유엔총회가 해체를 결의하고 미국 국무장관 헨리 키신저는 1976년 1월 1일부터 유엔사 해체를 약속한 바 있다. 그러나 그것은 이행되지 않았고 오늘에 이르렀다.

유엔사는 깃발만 유엔기를 사용할 뿐 유엔안보리에 군사행동에 대해 사전사후 보고할 의무가 없다. 미국이 주도하는 다국적군의 성격으로 규정된 조직일 뿐이다. 유엔사가 향후 한국을 회원국으로 포함시킨다는 것으로 알려졌는데 이는 한반도 유사시 북한지역에 대한 군정실시 등의 개념을 포함하고 있어 윤석열 정부가 외치는 통일과는 거리가 멀어 보인다. 미국은 중국, 러시아와 함께 한반도 분단 상태를 최상의 조건으로 여기고 있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유엔사 국방장관회의가 열리기 전 한미는 55차 안보협의회를 통해 미국 우주군의 위세 등을 강조하면서 동북아에서 한미연합군의 위력을 십분 강조했다. 그러나 그 직후인 11월 15일 열린 미중정상회담은 군사적 충돌을 방지하기 위한 꼼꼼한 양국간 합의를 내놓았다. 미국은 한반도를 무대로 군사력을 과시하면서 중국과는 갈등 없는 경쟁, 평화공존을 합의한 것이다.

윤석열 대통령이 한미동맹을 강조하면서 중국과 러시아에 대해 날선 소리를 하면서 제기된 외교군사안보와 경제안보가 병행되어야 한다는 논리가 새삼 부각되는 계기가 되었다. 한국 정치권 일각에서 자체 핵무기 개발, 미국 전술핵무기 남한 배치 등을 언급하는 것은 강대국들이 세계지도를 놓고 협상하는 과정에서 자칫 제 3국을 흥정거리로 삼는 일이 적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 사례의 하나가 한민족이 뼈아프게 경험한 1905년 카스라-테프트 밀약이다.

미국 150년전 조선과 수교후 일관되게 국익 추진

미국은 남한에서 고마운 존재, 혈맹관계로 일컬어진다. 윤석열 정부가 특히 강조하고 있고 일부 언론도 장단을 맞추고 있다. 미국이 6.25 한국 전쟁에 참전해 수많은 미국 젊은이들이 희생을 당했고 그 이후 미군 주둔에 의해 안보가 보장이 되면서 한국이 엄청난 경제적, 정치적 기적을 이뤘다는 것이다. 물론 이런 측면도 분명 존재한다. 그러나 다른 견해도 있다. 미국의 한반도에 대한 정책은 19세기 말 신미양요 이래 최근까지 자국의 이익을 챙기기 위한 과정으로 볼 수 있다는 사실이다. 보는 시각에 따라 양쪽 주장에 대한 찬반이 갈리는데 그 판정은 역사적 사실관계에 의해 뒷받침되어야 한다. 과연 진실은 무엇인가?

미국은 일본과 조선의 강화조약이 체결된 뒤인 1882년 조미 수호통상조약에 따라 조선과의 외교 관계를 수립했다. 일본이 1894년 7월 –1895년 4월 벌어진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뒤 조선에 대한 장악력을 강화한 뒤 미국은 엄격한 중립을 유지했다<For documents pertaining to the Washington government's response to the Sino-Japanese confrontation of 1894-95, see FRUS, 1894, Appendix, I, 5-106.>.

1895년 10월 8일 새벽 일본의 자객들이명성 황후의 침소인 경복궁 옥호루로 쳐들어가 황후를 시해하고 시신을 불태운 사건이 발생하자 영국, 프랑스, 러시아 공관이 미국 공사에게 일본에게 고종황제를 보호하고 그 지위를 유지하도록 촉구하자고 제의했을 때 미국무부는 그에 반대하면서 중립을 지키라고 지시했다<. https://rmc.library.cornell.edu/Straight/timeline_text.html#top>.

고종황제는 1899년 미국에게 서구 세력이 조선의 자주권을 보장하도록 주선해 달라고 요청했으나 윌리엄 매킨리 미 대통령과 존 헤이 국무장관은 서울의 미국 공사 호레이스 알랜에게 고종의 요청을 거부하라는 지시를 내렸다<https://rmc.library.cornell.edu/Straight/timeline_text.html#top>.

1904년 만주와 한반도에서 이권을 둘러싸고 일어난 러일전쟁은 일본의 승리로 끝났고 그 다음해인 1905년 7월 일본의 총리 가쓰라 다로와 미국의 육군장관 태프트는 '미국은 일본의 한국 지배를 승인하고, 일본은 미국의 필리핀 지배를 승인한다'는 내용의 '가쓰라 - 태프트 비밀협약'을 맺었다.

1905년 11월 17일 조선은 을사늑약을 강요받아 일본의 보호국이 되고 말았다. 미국무부는 그로부터 일주일 뒤 서울 주재 공사에게 서울의 미영사관을 폐쇄하고 한국에서 철수한 뒤 모든 영사업무는 동경에서 대행하라고 지시했다. 워싱턴 주재 조선 공사관은 1905년 12월 16일 폐쇄됐다. 일본은 1910년 8월 조선을 강제 병합해 식민지로 만들었고 그 해 9월 미국은 이를 승인했다<https://rmc.library.cornell.edu/Straight/timeline_text.html#top>.

미 국무부는 3·1 운동이 발생하자 그 다음 달인 4월 일본주재 미 대사에게 훈령을 내려 "서울주재 미 영사에게 조선 독립 운동가들이 독립운동을 하는 것을 미국이 도우리라는 믿음을 갖지 않도록 극도로 조심할 것과 일본 정부당국이 조선의 독립운동에 미국이 동조한다고 의심하지 않도록 하라"고 지시했다. 윌슨 대통령은 조선의 독립만세 운동에 대해 지지하는 말 한 마디 하지 않았다<Frank Baldwin, "Participatory Anti-Imperialism: The 1919 Independence Movement," Journal of Korean Studies, 1(1979): 123-61; Dae-Yoel (Tae-yol) Ku, Korea Under Colonialism: The March First Movement and Anglo-Japanese Relations (Seoul, 1985), 37-303.>.

윌슨 대통령은 민족자결주의를 주장했지만 당시 국제적인 지배구조에 문제를 제기할 의도는 전혀 없었다. 특히 당시 일본이 전승국이었고 조선은 일본의 식민지여서 조선 독립 문제는 그의 관심사가 아니었었다. 윌슨은 민족자결주의 원칙에 세계의 약소민족들이 민감한 반응을 보이자 그 적용 범위를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 및 터키에 속했던 주민과 영토, 그리고 독일제국의 지배 아래 있던 식민지로 국한한다고 수정했다.

미국, 3.1 독립만세 운동 외면하고 임시정부 관련 이승만의 청원 외면

미국 정부는 1920년 이후 1930년대 말까지 일본의 조선 식민지 지배에 대해 아무런 관심도 표한 적이 없다. 1941년 12월 7일 일본이 진주만을 습격하면서 미국과 태평양전쟁에 돌입했다. 이승만이 임시정부 수반을 하면서 미국 정부에 임시정부를 조선의 합법적 정부로 인정해 달라는 청원을 했지만 미국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Chairman of the Korean Commission in the United States (Rhee) to the Secretary of State, 7 February 1942, FRUS, 1942, I, General, The British Commonwealth, the Far East, 859-60; The Secretary of State to the Ambassador in China (Gauss), 1 May 1942, Ibid., 873-75. >.

미국은 1942년 자유중국, 소련과 함께 일본 항복 이전에 조선인으로 구성된 임시정부 수립 문제를 논의했지만 각각 자기 영토 내에서 활약한 조선인 독립군과 그들이 구성하는 임시정부에 대해 서로 입장을 달리하고 있다는 점을 앞세워 결국 일본 항복이전 임시정부 인정은 이뤄지지 않았다< https://history.state.gov/historicaldocuments/frus1942China/comp18>. .
  
1945년 8월 6, 9일 미국의 핵 공격을 받은 히로시마와 나가사키 두 도시에 강제로 끌려와 노동에 동원됐다가 피해를 당한 조선인 피해자는 10만여 명에 달했다. 조선인 피해자 가운데 5만 명은 즉사하고 5만 명이 살아서 4만 3,000명이 영구 귀국하고 7,000명이 일본에 거주한 것으로 전해졌다.

소련이 만주에서 일본군을 대파하고 한반도 쪽으로 진군하자 미국은 1945년 8월 13일 소련의 한반도 주둔 일본군의 무장해제와 한반도 전역 점령을 막기 위해 북위 38도선을 군사분계선으로 확정, 소련에 통고했다. 미국은 원자탄이라는 신형 무기가 일본에서 가공할 파괴력을 보인 것을 소련에게 과시하면서 제안한 것이다<https://www.theguardian.com/world/2020/aug/04/hiroshima-atomic-bomb-us-japan-hi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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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은 일본이 항복을 선언하기 일주일 전에 만주에서 일본에 대한 선전포고를 하면서 전쟁을 개시해 전리품을 챙기는 작전을 시작한 뒤 1945년 8월 21일 해방군의 기치를 들고 원산에 상륙했다. 이어 평양에 소련군사령부를 설치하고 38도선 이남으로 진격하지 않았다. 소련이 한반도 분할 점령을 요구한 미국의 제안을 실천한 것이다.

2차 대전 종전이후 미국의 극동정책은 일본을 소련에 대한 전초기지로 만드는데 집중되었다. 이를 위해 미국의 일본정책은 맥아더를 통해 2차 대전에 대한 일본의 범죄 처벌을 최소한으로 제한해 전범처리, 전후 배상 등에서 파격적인 시혜를 베풀었고 그 과정에서 남한은 중요한 고려대상에서 제외됐다.

미국은 일본 천왕제를 유지하고 전범처벌을 극소화하면서 일제치하에 존재했던 행정기구나 그 인력을 활용해 일본에 대한 군정을 실시했다. 미국의 한반도 정책은 일본에 대한 점령정책과 유사했고 그 목적은 소련의 영향력을 차단하는 것에 맞춰져 있었다. 그에 따라 남한에서 친일세력의 적극 기용, 단독정부 수립 강행, 제주 4.3 항쟁 무력진압 등의 조치가 취해졌다.

미국, 일본 배상 책임 가볍게 한 강화조약 만들며 한국 원천 배제

미국은 제2차 세계대전의 전쟁상태를 종결하고 국교를 회복하기 위해 샌프란시스코 강화 조약을 1951년 9월 체결했는데, 일본에게 40년 가까이 식민지배의 피해를 당한 한국은 이 조약 협상과정에서 배제되고 서명국에 포함되지도 못했다.

미국이 주도한 이 조약은 일본을 반공 진영에 편입시켜 소련과 중국을 견제하려는 정치적 성격이 강했다. 이를 위해 미국은 일본이 신속히 경제적으로 안정, 발전할 수 있도록 일본이 전범국으로 피해국가에 대해 배상 책임을 지는 방식을 베르사유 조약과 크게 다르게, 즉 약하게 규정했다<https://100.daum.net/encyclopedia/view/24XXXXX59359>.

미국 정부는 한국의 배상요구에 대해 1947-1949년 부정적인 입장으로 돌아섰다. 당시 냉전이 심화되어 소련과 미국 간의 긴장이 고조되면서 미국 정부는 일본 경제와 정치적 안정을 최우선 과제로 인식하게 되었고 일본 배상문제는 미국 외교관들의 금기 사항이 되었다.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체결 이전인 1951년 5월 미 국무부는 태평양 전쟁 종전 후 남한에 남아 있는 일본인 재산과 남한이 주장하는 배상요구 액과 비교하는 자료를 내놓았다. 이 자료에 따르면 38선 이북의 북한 땅을 제외한 남한 땅에 남겨진 일본인 자산은 한국이 일본에 대해 요구하는 배상액의 4배에 달한다는 내용 이었다<"Comparison of Japanese Assets in Formosa and Korea with Possible Korean and Formosan Claims in Japan," 24 May 1951, Box 5, Folder "DRF-DR 229", Reports Relating to the Far East, 1946-1952, RG 59.>

이 자료는 남한이 요구한 배상액은 제시하지 않았는데 이를 공개한 이유는 남한이 전후 남한에 남겨진 일본 자산을 압류한 것으로 이미 상당 정도 이익을 보았다는 것을 제시할 목적이었다. 또한 일본이 한반도를 점령한 결과 달성된 한반도에서의 투자와 경제발전의 긍정적 효과를 구체적으로 제시해 도덕적 배상을 금전으로 환산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려는 목적이었다. 이 자료는 오늘날 일부 몰지각한 친일세력이 일제의 한반도 강점을 기능주의적 측면에서 기여했다고 주장하는 근거의 하나가 되고 있다.

베르사유 조약은 패전국 독일이 피해 국가들에 대해 엄청난 배상을 하도록 만든 것이었지만 미국은 프란시스코 강화 조약에서는 이 방식을 피하고 일본이 개별 피해국들과 협상을 통해 배상문제를 해결토록 했다. 이런 연유로 오늘날까지 일본은 전쟁 범죄를 부인하면서 강제징용과 성 피해자 배상을 거부하거나 독도가 한일 양국의 분쟁 대상이라는 추악한 짓을 저지르고 있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미 국익을 위해 거미줄처럼 촘촘하게 얽힌 한미동맹

오늘날 한미군사관계는 한국이 군사적 주권을 미국에게 넘겨준 불평등 관계로 그것은 주한미군사령관이 유엔사, 한미연합사 사령관 등 3개 사령관 모자를 쓰고 있는 것에서 상징적으로 들어난다. 미국은 다양한 경우에 대비해 한국 군사상황에 대해 통제력을 행사할 체제를 갖추고 있는 것이다.

주한미군은 치외법권적 권리 누리고, 유엔사는 한국군 전시작전권 환수 이후와 정전상태에서의 전쟁에 대비하며. 연합사는 한국군 전시작적 통제권을 행사한다. 미국은 표면적으로는 북한의 핵과 미사일이 세계 평화를 위협한다는 식의 논리를 내세우지만 실제 중국, 러시아를 견제하기 위해 주한미군 주둔이 필요하며 이를 위해 상정 가능한 미래의 군사상황에서 항상 미 국익을 챙길 장치를 해놓은 상태이다.

윤 대통령 정부는 북한에 대해 선제타격, 도발 시 원점과 지휘부 타격 등의 조치를 취할 수 있는 것과 같은 주장을 하고 있으나 한국군은 현재의 한미연합사 체제에서 북에 대해 자체 판단으로 독자적인 군사작전을 할 수 없고 한미연합사령관인 미군을 통해 가능한 구조라는 점이다. 한국군은 세계 6위의 군사력이지만 어떤 면에서 종이호랑이라는 취약점을 지니고 있고 국가 안보주권을 충족시키지 못하고 있는 형편이다.

한국군이 대북 군사행동을 하기 위해서는 그 법적 근거인 평시 및 전시 작전통제권의 경우 한미연합사 사령관이 갖고 있고, 대북 군사행동의 규모 등을 제약하는 정전협정은 유엔사가 관리하고 있다는 점을 고려해야 한다. 평시 작전통제권의 경우 1994년 12월 미국으로부터 환수한 것으로 되어 있으나 100% 환수한 것이 아니고 '연합 위기관리' 등 6개 영역은 '연합위임권한'(Combined Delegated Authority, CODA)이라는 이름으로 환수 범위에서 제외했다. 당시 김영삼 정부는 미국에게서 평시작전권을 반환받으면서 그 가운데 6개 핵심부분은 계속 한미연합사령관이 행사하기로 미국과 합의한 것이다.

이에 따라 한미연합사령관은 현행 정전체제에서 한국군의 평시작전권의 핵심부분을 장악하고 있다. 그 규정을 보면 ▲전쟁억제와 방어를 위한 위기관리 ▲조기경보를 위한 정보관리 ▲전시 작전계획 수립 ▲연합 교리 발전 ▲연합합동훈련과 연습 계획·실시 등이다. 현재와 같은 정전시기에 국군 주요전투부대의 연합 위기관리에 대한 작전통제권은 주한미군사령관이 가지고 있다<브레이크뉴스 2020/08/08>.

윤 대통령이 '북한 도발 시, 원점 타격'하라고 국군에 지시한다 해도, 이는 한미연합사령관인 주한미군사령관의 작전통제권한 범위에 속하는 문제다. 한국 대통령이 헌법상의 군 통수권을 온전하게 행사하려면 정전시기 및 전시 작전 통제권을 모두 환수해야 가능하게 되어 있다. 만에 하나 한미연합사령관인 유엔사령관이 윤 대통령이 언급하는 식의 대북 군사행동에 대해 동의하지 않는 사태가 발생 가능하다는 점도 인식해야 하고 그것을 국민에게 알리는 것이 윤 대통령이 강조하는 상식과 정의에 부합하는 정치라 하겠다.

한국은 한미상화방위조약 등에 의해 군사적 주권을 미국에 상당부분 넘겨준 상태로 지내면서도 경제력이 세계 10위권, 군사력 6위권의 선진국이 되었다. 남한은 군사동맹이라는 이름으로 미국에게 엄청난 군사적 특권을 제공하면서 말이 좋아 군사동맹이지 사실상 미국의 한반도, 동북아 전략에 예속된 상태로 보아야 한다. 박정희 대통령 시절 차지철은 한미상호방위조약의 불평등이 심각하다면 폐기를 주장하는 결의안을 국회에 제출하기도 했는데 21세기 들어 이 조약은 미국에 너무 심각하게 기울어진 군사동맹이라는 점은 더욱 분명해 지고 있다<폴리뉴스 2022.06.24.>.

오늘날 동북아 관련국들을 살필 때 한국이 평화를 가져올 상황을 조성할 수 있는 잠재력이 가장 큰 국가의 하나다. 단적으로 말해 미국의 손에 넘겨준 군사적 주권을 되찾아 그것을 평화 달성의 수단으로 썼을 때 큰 효과를 발휘할 수 있다는 점이다. 남북한 간에 핵무기, 미사일 등을 둘러싸고 군사적 긴장이 높다 해도 박정희, 노태우, 노무현, 문재인 대통령으로 이어지면서 남북간에 평화통일을 향한 로드맵을 만들어왔다는 점을 윤석열 정부도 인식하고 그런 방향으로 노력해야 할 것이다.

정치권은 6.25 한국전쟁을 종식시키고 평화협정으로 전환토록 하고 북한과 평화통일을 위한 항구적인 교류협력의 기반을 구축하는 노력을 해야 한다. 그렇게 하려면 한미동맹관계를 유엔회원국간의 평등하고 평화와 정의를 지향하는 것으로 전환해야 한다. 그 방향으로 노력하는 것이 미국에게도 진정한 이익이 된다는 점을 확인시키는 작업을 시작해야 할 것이다.

태그:#한미동맹, #윤석열, #미국익, #대외정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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