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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이 들어서는 계절에 다소 성급하게 봄을 얘기하려 합니다. 지나고 나서 더 잘 보이는 것들이 있더군요.

시골의 봄은 걸음이 느린 아이, 혹시 오다가 딴청 피우는 것은 아닐까 자주 목을 길게 빼곤 했습니다. 겨울은 겨울대로 뒤끝이 심해서 이따금 찬바람으로 어깃장을 놓곤 합니다.  

미덥지 못한 날씨 탓에 실내에서 모종을 키웠습니다. 작은 구멍에 한 알씩 씨앗을 심어 싹을 내는 기쁨은 안달 부린다는 핀잔도 귓등으로 듣게 합니다. 빼꼼하게 어깨를 드러낸 놈, 껍질을 머리에 이고 올라오는 녀석, 눈치 보듯 하얀 목덜미를 먼저 디미는 아이... 하루가 다르게 자라는 싹을 보면 나도 몰래 반가움에 호들갑을 떨게 됩니다.

굳이 그리하지 않아도 꽃들은 정원에 스스로 피어나겠지만, 새싹 앞에 쪼그려 앉아 꽃을 상상하던 날에 봄은 내 곁으로 살짝 당겨오지 않았을까요? 사람이나 식물이나 어린 생명의 출현은 감동입니다. 마치 그 생명에 관여하고 있는 착각마저 듭니다.

이렇게 여리고 위태로워 보이지만 사실은 지구상의 어느 인간보다 훨씬 오래전부터 이 땅에 살아왔으니, 그보다도 더 연약하고 불안한 것은 실은 저 자신이겠죠.

쌈채소와 옥수수, 오이, 호박 모종은 집에서도 비교적 손쉽게 키울 수 있습니다. 종묘사에서 사려면 꽤 비싼 것을 넉넉히 만들어 이웃들에게 선심도 쓰지요. 낮에 내놨다가 저녁에 거둬들이는 것이 번거롭지만 그런 수고도 즐겁습니다. 꽃모종도 마찬가지고요.

키워서 심으면 좀 더 일찍 꽃을 볼 수 있고, 다른 풀들과 구분하기도 쉽습니다. 그렇게 새깃유홍초와 가우라(바늘꽃), 아프리칸 메리골드 등을 키워냈습니다. 모종을 옮겨 심을 때쯤 꽃밭에도 씨앗을 뿌렸습니다, 그러면 꽃을 보는 기간이 길어집니다.

기다림만큼 깊은 애정 
 
2023 봄날의 기억
 2023 봄날의 기억
ⓒ 김은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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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은 매화로부터 왔던 기억입니다. 하나 둘 팝콘 터지듯 피어나 하얗게 뒷산을 가리면 '봄이구나'하는 혼잣말이 저절로 튀어나옵니다. 산수유가 노랗고 앙증맞은 꽃망울을 터뜨릴 즈음 뒤뜰은 연보랏빛 제비꽃으로 뒤덮입니다. 개나리와 진달래도 흠칫 발길을 잡지만 눈길은 수선화로 향합니다. 때늦은 봄눈 속에서도 풀 죽지 않고 '꽃꽃하게' 진노랑 덧꽃부리를 열어 "보오오옴-"하고 노란 나팔을 부는 듯한 모습입다.

이른 봄에 피어나는 꽃들은 이 봄에 심어진 것이 아닙니다. 모두 추운 겨울을 잘 버텨낸 것들입니다. 그러니 어떻게 반갑지 않을 수 있겠어요? 기다림이 길어서인지 이즈음의 꽃들에겐 더 깊은 애정이 돋아납니다. 식물의 생리적 특성이야 어떻든 간에 다시 태어나 주어서 고마울 따름이죠. 이제 이렇게 정원은 색색으로 바뀌고 또 바뀔 것입니다.

텃밭에 봄맞이 나가듯 나가서 씨감자를 심었습니다. 미리 싹을 틔운 씨감자의 눈이 2~3개 되도록 잘라 심는데 싹이 올라와 10cm 이상 자라면 충실한 것으로 한 두 개 남기고 잘라줍니다. 여리여리한 감자꽃은 나중에 오이꽃, 호박꽃, 고추꽃 등과 함께 키친가든을 수놓게 될 것입니다. 열무와 시금치도 파종합니다. 특히 열무는 생육 기간이 짧아 여러 번 심고 수확할 수 있어서 봄 채소로 심기에 이만한 게 없습니다.

경칩은 개구리의 봄, 춘분이 지나야 비로소 봄이 오더라고요. 절기가 바뀌면서 손길이 바빠집니다. 잔디의 푸른 기가 짙어지기 전에 갈퀴로 검불을 긁어내고 파인 곳은 모래로 덮고 비료도 뿌려줍니다. 꽃밭에도 씨앗을 심습니다. 버베나, 백일홍, 프릴드로즈, 과꽃, 금어초, 붉은꽃아마 등 일 년생 화초들입니다.

도시를 떠나온 지 어느덧 일 년이 지났습니다. '그때의 그날엔 기다림이 있었나? 어떤 색깔이었지?'하고 돌이켜봅니다. 거기엔 그저 내일의 숫자만 있었던가? 선뜻 마무리를 짓지 못합니다.

지금은 기억을 더듬어 지난 봄에 머물러 봅니다. 그러다 3월의 끝엔 목련과 벚꽃이 만개했던 기억입니다. 봄날이 연분홍 치마처럼 바람에 휘날렸습니다. 

태그:#봄, #시골의봄, #겨울의봄, #전원생할, #시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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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퇴한 초보 뜨락생활자. 시골 뜨락에 들어앉아 꽃과 나무를 가꾸며 혼자인 시간을 즐기면서 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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