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대안'이라는 표현 하에 경쟁과 입시몰입교육을 지양하고, 자치와 상생을 위한 교육을 하며, 학생들이 현재를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는 안전한 삶의 터전을 만들어주기 위해 노력합니다. 이곳에서 여러 존재들과 좌충우돌하며 교육활동을 하고 있는 모습을 있는 그대로 담담하게 전하고자 합니다.[기자말]
드디어 2023학년도 강원도 통합기행의 막을 내렸다. 그 마지막 순서는 발표였다. 40여 명의 학생이 세 시간에 걸쳐 기행을 통한 자신의 변화 등을 발표하고 서로 질문과 응답을 주고받는 시간을 가졌다. 언제나 그랬듯 아이들은 3월과 비교하여 전혀 새로운 사람이 되어있었고 자신의 성장을 담담하면서도 뿌듯한 눈빛으로 읊어나갔다. 폭소를 자아낸 녀석도, 찡함을 선사한 아이도 있었다.
 
덕산기계곡 숲속 책방 이야기를 하고 있다.
▲ 발표하는 학생 덕산기계곡 숲속 책방 이야기를 하고 있다.
ⓒ 안사을

관련사진보기

 
본교는 3년째 학생과 교사가 함께 큰 배낭을 메고 짧게는 5일, 길게는 9일간 여행을 떠난다. 흔히 다니는 '수학여행'이 아닌, 통합 기행이라는 교과목으로 짜이는 본 여정은 1년 동안의 수업을 기반으로 한다. 행사로서의 여행이 아니라 과목으로서의 배움이 되는 것이다. 음식을 스스로 해결해야 하고 불편한 곳에서 야영을 해야 하는 본 과정을 겪고 나면 아이들의 눈빛은 한층 깊어져 있다.

정선과 태백, 그리고 강릉을 오가는 여정 속에는 역사와 자연, 그리고 사람에 대한 배움이 있다. 주제는 '사북 항쟁'이지만 노동과 투쟁의 현장뿐 아니라 찬란한 가을빛으로 물들어가는 숲, 그리고 현재를 살아가고 있는 사람과 진하게 만날 수 있도록 주선하고 있다. 오늘은 덕산기계곡 숲속 책방에서 아이들에게 새옹지마 이야기를 전해주신 유진아 작가의 말, 그리고 지금도 넋으로 그곳에서 함께하고 있는 강기희 작가의 이야기를 해볼까 한다.
  
(필름/ProImage100)짐을 풀기 위해 졸드루 야영장으로 걸어 들어가는 아이들
▲ 배낭 멘 아이들 (필름/ProImage100)짐을 풀기 위해 졸드루 야영장으로 걸어 들어가는 아이들
ⓒ 안사을

관련사진보기

 
덕산기계곡 숲속 책방과의 인연

정선에 전생의 봇짐이라도 부려놓은 듯, 한강 상류의 물줄기과 거친 산세를 좇아 작은 마을 곳곳을 다닐 때였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두 작가 부부가 덕산기에 살 곳을 꾸린 것과 내가 그곳을 처음 만난 건 같은 해였다. 그곳은 정선에서 나고 자란 강기희 작가의 고향 마을이었다. 사연을 알 턱이 없었던 나는 그저 계곡을 타고 내려가다 만난 그림 동화 같은 곳에서 시원한 커피 한 잔 얻어먹었을 뿐이었다.

그 후 아끼는 친구와 함께, 직장 동료와 함께, 소규모의 학생들과 함께 그곳을 종종 방문했다. 5시간이 넘게 이동해야 하고 오장육부의 위치가 재조정을 받는 듯한 느낌을 받는 비포장을 운전해야 하지만 그곳엔 항상 아늑한 평화가 있었다. 책을 몇 권 사 오고, 몇 마디 이야기를 나누는 것만으로도 그간 쌓였던 삶의 앙금이 털어지는 느낌이었다.
  
(필름/Portra400)7년 전 모습. 지금은 왼쪽 하단부에 화목 난로가 있다.
▲ 2017년의 숲속 책방 (필름/Portra400)7년 전 모습. 지금은 왼쪽 하단부에 화목 난로가 있다.
ⓒ 안사을

관련사진보기

 
사북 항쟁과 관련하여 융합 수업을 구성하면서 반드시 이곳을 아이들과 함께 오리라는 마음을 먹었다. 항쟁과 직접적인 연관은 없는 곳이지만 정선의 자연과 역사를 속속들이 알고 있는 강 작가님과 아이들을 만나게 해주고도 싶었고, 내가 얻었던 작은 평화를 아이들에게 물려주고도 싶었다. 이런 작은 마을에도, 첩첩산중에도 이렇게 아름다운 삶이 있다는 것을 아이들이 알기를 원했다.

그런데 올해 2월 1차 사전답사 때도, 6월 2차 사전답사 때도, 힘든 항암치료 중에도 불구하고 여유를 잃지 않고 나를 맞이해주시던 그가 8월에 그만 돌아가시고 말았다. 부랴부랴 학교 관리자에게 상황을 알리고 예정에 없던 3차 사전답사를 다녀왔다. 홀로 남겨진 유진아 작가님에게 무슨 말로 위로를 해야 할지 차마 몰랐지만, 예정된 일정을 취소하든 바꾸든 어쨌든 그분을 직접 대면하고 대화를 나눠야 한다는 마음에서였다.

짧은 만남에서도 수척해진 얼굴 너머로 몇 차례나 슬픔이 오고 갔지만 유 작가님은 감사하게도 일정을 취소하지 않아도 된다며 귀한 마음을 내어주셨다. 내가 먼저 쉼을 제안해야 할지 고민을 많이 했지만, 오히려 사람이 난 자리에 북적북적 아이들과의 만남을 주선하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 학생들에게 그냥 이곳에서의 삶 이야기를 가감 없이 잠시 해주십사 부탁도 드렸다. 그러한 시간이 유 작가님에게도 채움과 다독임의 시간이 되기를 간절히 바랐다.

발 담그고 물 건너 책방으로 간 아이들

기행을 떠나기 일주일 전, '학년토론실'이라는 공간에서 아이들은 큰 배낭에 짐을 찔러넣으며 탄식과 비명을 번갈아 질렀다. 이윽고 10월 13일 금요일, 아이들은 아침 일찍 출발하여 4시간 반 동안 버스를 타고 정선군 북평면 졸드루야영장에 첫 짐을 내렸다. 시간이 부족하여 그늘막(타프) 치는 실습을 완벽하게 못 했기에 여기저기서 "선생님! 선생님!"을 불러대는 아이들과 함께 잘 곳을 꾸리다 보니 금세 밤이 되었다.

둘째 날 아침, 그러니까 타지에서의 첫 아침 아이들은 예외 없이 모두 졸린 눈을 비비며 6시 반 점호에 참여했다. 시간 약속이 가장 중요하다며 귀가 닳도록 당부를 들어서인지 취사와 짐 정리까지 완벽하게 시간 안에 마쳤다. 학생과 교사를 실은 버스는 정선군 화암면 북동리에 그들을 내려주기 위해 곡예 운전을 했다. 베테랑 기사였지만 고개를 갸우뚱거릴 정도로 좁고 구불거리는 길이었다.
  
(필름/ProImage100)갈림길이 있을 만한 곳에 항상 팻말이 있었다.
▲ 팻말 (필름/ProImage100)갈림길이 있을 만한 곳에 항상 팻말이 있었다.
ⓒ 안사을

관련사진보기

 
북동교에서 하차한 무리는 물과 도시락을 싣고 선행하는 내 차의 꽁무니를 바라보며 걷기 시작했다. 나는 도중에 차를 세우고 역행하여 아이들의 사진을 담곤 했다. 숲속 책방으로 들어가는 길은 걸어서 한 시간이면 충분하다. 다만 길이 계곡물을 만날 때 종종 물에 발을 담가야 하는 곳이 있다. 서두르느라 미처 상황을 설명 못 했더니 학생들과 교사들 모두 당황한 듯했다. 용감하게 양말까지 벗고 진행하는 학생이 있는 한편, 어떻게든 젖지 않을 수 있는 곳으로 돌아가는 아이도 있었다.

"얘들아! 여기서 지체되면 안 돼. 이런 곳이 네 번은 넘게 나올 거야!"
"예? 이런 데가 또 나온다고요?"
"어. 그러니까 서둘러야 해. 그냥 양말 벗고 물 들어가는 게 더 빠를 거야."
"수건이 없어요!"
"양말로 닦으면 돼!"
"그럼 양말이 젖잖아요!"
"그 정도는 괜찮아."
"아, 쌤은 괜찮겠죠..."


귀여운 실랑이를 거듭하다 보니 어느덧 깊은 곳까지 들어왔다. 책방으로 가는 길에는 심심찮게 팻말이 서 있다. 시 같기도 하고 선문답 같기도 한 글귀를 보고 그냥 지나치는 아이, 한참을 보는 아이, 사진을 담는 아이 등 다양한 반응이 재미있었다.
 
(필름/ProImage100)신발을 안 벗고 건너려다 몇몇은 오히려 종아리까지 다 적셔버렸다.
▲ 우왕좌왕 (필름/ProImage100)신발을 안 벗고 건너려다 몇몇은 오히려 종아리까지 다 적셔버렸다.
ⓒ 안사을

관련사진보기

   
(필름/ProImage100)덕산기 마을로 향하는 아이들
▲ 도란도란 (필름/ProImage100)덕산기 마을로 향하는 아이들
ⓒ 안사을

관련사진보기

   
내가 먼저 책방에 도착해 작가님을 찾았다. 한 달 전 급하게 찾아뵈었을 때보다 조금은 더 편안해지신 모습에 마음이 놓였다. 우리의 여정을 허락해주셔서 고맙다는 말씀을 거듭 드렸다. 고요했던 골짜기에 사람 소리의 메아리가 아득히 들렸다. 아이들이 오는 소리였다. 나는 챙겨 온 스피커와 마이크를 꺼내어 책방 안에 놓았다.

비가 조금씩 내리고 있었다. 아이들이 젖을세라 작가님은 우리에게 어서 책방 안으로 들라고 하셨다. 평소 보지 못하던 풍경과 분위기에 두리번거리던 녀석들은 눈빛을 가다듬고 안으로 향했다. 작가님께서 시간을 잠시 내어 사는 이야기를 해주실 것과 진지하게 듣고 마음에 새길 것을 학교에서부터 거듭 주문해 놓은 상태였다.

마이크를 건네받으신 유 작가님은 마음을 가다듬는 듯 잠시 시간을 가지셨다. 주변의 공기가 순식간 무거워지며 학생들은 쥐 죽은 듯 조용해졌다. 간단하게 자신을 소개한 작가님은 이윽고 조금 떨리는 목소리로 오늘 해주실 이야기를 이어가셨다.

"오늘 제가 여러분께 들려드릴 이야기는 새옹지마에 관한 것입니다."

작가님은 새옹지마의 격언에 담긴 이야기를 매우 차분히, 알아듣기 쉽게 먼저 설명하셨다. 동화 작가의 경력 때문인지 강한 흡입력이 느껴졌다. 또한 작가님이 최근 겪은 어려운 상황을 모두 알고 있던 터라, 누구나 알 만한 흔한 이야기로 들리지 않았다. 삶에는 어려운 일과 행복한 일이 번갈아 오는 법이니 너무 낙심할 필요도, 너무 들뜰 필요도 없다는 말씀이 이어졌다.

특히 이 시대를 살아가는 청소년에게 전하는 말씀은 더욱 힘이 실렸다. 스스로 목숨을 끊기도 하는 어린 영혼 이야기를 하시며, 너무 힘들고 지칠 때가 다가온다면 새옹지마 이야기를 기억해달라는 당부를 힘주어서 하셨다. 울지 않으리라 몇 번을 다짐했지만 눈시울이 붉어져서 미안하다는 말씀도 함께 하셨다.
  
귀를 기울여 듣고 있는 아이들
▲ 작가님 말씀 귀를 기울여 듣고 있는 아이들
ⓒ 안사을

관련사진보기

 
몇몇 아이들은 함께 눈물을 흘렸다. 창밖에는 자세히 보지 않으면 알아챌 수 없을 정도로 고요한 가을비가 내리고 있었다. 오래된 책들이 숨죽이고 있는 좁은 책방엔 진한 종이 내음이 가득했다. 한창 질풍노도의 시기를 보내고 있는 우리 아이들의 눈동자에 또 하나의 계절이 스쳐 지나가고 있었다. 타인의 아픔에 공감하며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본 짧은 그 시간이 아이들에게 큰 성장의 순간이었음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책방을 나와 다시 걷기 시작했다. 버스가 기다리고 있는 반대편 하류를 향했다. 큰 비가 오면 무섭게 물이 흐르지만 평소에는 건천으로 유지되는 덕산기계곡의 소리 없는 흐름과 함께 걸었다. 계곡물의 침식 흔적이 가장 잘 보이는 곳에 아이들을 잠시 멈춰 세웠다.
  
석회암 지대여서 물이 빨리 빠지는 곳
▲ 물이 마른 덕산기계곡 석회암 지대여서 물이 빨리 빠지는 곳
ⓒ 안사을

관련사진보기

 
"여러분. 이런 천을 뭐라고 부른다고 했죠?"
"건천이요."


사전 교육을 기억하는 몇몇 아이들이 대답했고, 나는 말을 이어나갔다.

"건천이라는 단어에 주목해볼까 해요. 어쨌든 천이라는 글자가 들어가니까 이곳은 물이 흐르나 안 흐르나 계곡이라는 뜻일 거예요. 우리의 삶 또한 그런 시각으로 보면 어떻까 싶어요. 때로는 우리의 인생이 멈춰있는 것처럼 보일 때가 있을 거예요. 앞으로 나가아가는 것 같지 않고 말이죠.

하지만 이곳에 큰비가 내리면 또 힘차게 물이 흐르는 것처럼 우리의 삶 또한 힘차게 흐를 것을 알면 좋겠어요. 그래서 멈춰있는 건 인생이 아니라고, 헛된 것이라고 생각치 말기를 바라요. 언젠간 흐르기 위해 힘을 모으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으면 좋겠어요."


보통 진지하게 말하면 시쳇말로 오글거린다고 떠드는 아이들이 있기 마련인데 이날은 그렇지 않았다. 유진아 작가님이 들려주었던 이야기가, 덕산기계곡의 깊은 산세를 만나, 어쩌면 그날도 함께 해주었을지 모를 강기희 작가님의 영혼이 합세하여 아이들의 마음을 따스하게 어루만지고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태그:#대안교육, #미래교육, #통합기행, #필름사진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공립 대안교육 특성화 고등학교인 '고산고등학교'에서 교사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필름카메라를 주력기로 사용하며 학생들과의 소통 이야기 및 소소한 여행기를 주로 작성하고 있습니다.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