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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는 이제까지 개인사 중심의 인물평전을 써왔는데, 이번에는 우리 역사에서, 비록 주역은 아니지만 말과 글 또는 행적을 통해 새날을 열고, 민중의 벗이 되고, 후대에도 흠모하는 사람이 끊이지 않는 인물들을 찾기로 했다. 

이들을 소환한 이유는 그들이 남긴 글·말·행적이 지금에도 가치가 있고 유효하기 때문이다. 생몰의 시대순을 따르지 않고 준비된 인물들을 차례로 소개하고자 한다. [편집자말]
인류사의 뜨거운 주제의 하나는 권력투쟁사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크고 작은 권력을 놓고 각종 쟁투가 벌어졌다. "생물이 존재하는 곳에 모든 권력에 대한 욕구가 있다."(니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권력과 지위가 탐난다. 행동이 전부며 영광은 아무것도 아니다."(괴테, <파우스트>), "권력에 대한 욕망은 농부의 가슴 속에도 왕자 못지않게 강할 것이다." (J. T. <헤드레이>).

그렇다고 모든 사람이 권력을 탐하는 것은 아니다. 전통시대 권력 중에서도 최고 권력인 임금의 옥좌를 헌신짝처럼 버린 사람도 있었다. 아주 드문 일이지만 아름다운 사력으로 역사에 남는다. 부자, 형제간에도 나누기 어렵다는 권력, 그것도 왕좌를 팽개친 것이다.

이성계는 국왕이 되기 전에 죽은 첫 부인 한씨와의 사이에 이방우·이방의 등 여섯 아들과 현 부인 강(康)씨에게서 이방번과 이방석을 두었다. 서열상으로 보면 첫째 이방우가 세자가 되는 것이 마땅했지만, 본부인은 이미 죽었고, 실세는 현 부인이었다. 천하를 휘어잡아 새 왕조를 창업한 이성계이지만 가정에서는 지아비, 부인의 말을 듣지 않는 영웅호걸은 별로 찾기 어렵다.

둘째 아들 이방석을 세자로 책봉했다. 8명의 왕자 가운데 막내가 차기 집권자로 예비되었다. 이방번보다 이방석이 더 영특했던 것이다. 이복형들이 가만 있지 않았다. 특히 왕조 창업에 공이 컸던 다섯 째 이방원이 실력행사에 나섰다.

이성계가 개국한 지 5년 뒤인 1398년 8월 이방원은 병력을 동원하여 세자 이방석과 그를 둘러싼 중신들을 무자비하게 살해하였다. 이성계는 자식들의 골육상쟁에 생의 허무감을 느끼고 고향 함흥으로 낙향하면서 셋째아들 이방과에게 양위했다. 그는 권력에 별 욕심이 없었지만 어쩌다 제2대 임금이 되었다. 역사는 이를 '제1차 왕자의 난'이라 부른다.

피의 혈투 제2막은 넷째 아들 이방간과 이방원 사이에 벌어졌다. 권력욕이 충만한 데다 1차 왕자의 난에서 승자가 된 이방원은 형과 그 추종자들을 제거하고 옥좌를 거머쥐었다. '제2차 왕자의 난'으로 집권한 그가 제3대 태종이다.

태종은 왕비 원경왕후와의 사이에 4남4녀가 있었고, 후궁들이 낳은 8남 13녀가 있었다. 합하면 12남 17녀로, 조선왕조 군주 중에서 최다의 자식을 두었다. 몇 차례 골육상쟁을 치르며 왕권을 차지한 그로서는 후계자 문제에 각별한 관심을 갖지 않을 수 없었다.

왕후가 낳은 아들은 첫째가 양녕대군, 둘째가 효령대군, 셋째가 충녕대군, 넷째가 성녕대군이다. 왕후가 살아 있고 왕권도 어느 정도 기틀이 잡히면서 적장자 양녕이 11살 때에 세자로 책봉되었다. 그런데 정작 양녕은 권좌에 별로 관심이 없었다. 선대들의 혈투를 지켜보아 온 터여서 더욱 그러했다.

1407년 7월 양녕은 김한로의 딸을 맞아 성혼을 했는데, 어른이 되어서도 몰래 대궐 담장을 타넘어 말 달리고 활 쏘고 술 마시며 신나게 놀기에 바빴으니 태종의 눈밖에 날 것은 뻔한 이치였다.

양녕은 밤이나 낮이나 감시하는 눈길만 보이지 않으면 대궐을 도망쳐 나가 건달패와 어울려 저자를 휩쓸고 돌아다니며 술타령을 했고 심지어 동궁 안으로까지 건달과 기생들을 끌고 들어와 술판을 벌였으니, 세자의 이런 행동거지가 부왕의 귀에 들어가지 않을 리 없었다. 중신들의 마음도 차차 세자로부터 멀어져가기 시작했다.(한원갑, <양녕대군>, <역사인물기행>)

세자의 이같은 '탈선'과 관련 두 가지 시각이 있다. 권력 따위를 하찮게 여기면서 자유롭게 살고자 하는 그의 본성, 그리고 자기보다 훨씬 영특하고 재질이 있는 동생 충녕에게 세자의 자리를 넘겨주고 그를 장차 군왕이 되게 하려는 속내 깊은 배려라는 분석이다.

양녕은 어리(於里)라는 미녀에 빠져 그의 집을 드나들거나 동궁으로 불렀다. 소문은 아버지에게 전해지고 태종은 호통을 쳤다. "부왕께서는 많은 후궁을 두고 그들을 무시로 궁예 출입시키면서 왜 세자궁에 여자를 들이는 것을 막으십니까?" 당연한 항변이었다. 시쳇말로 '내로남불'의 발원지라 할까.

태종의 분기가 충천하고 군주의 심기 살피는 데 귀신같은 신료들이 들고 일어났다. '폐세자'가 군신일체로 모아지고, 셋째 충녕대군이 세자로 교체되었다. 이가 곧 조선조 제4대 임금인 세종대왕이다. 충녕의 세자 책봉에는 군신은 물론 양녕까지 바라던 바여서 모처럼 국론통일이 이루어진 셈이다.

충녕이 세자로 책봉되는 날 양녕은 대궐 담을 넘어 조용히 사라졌다. 충녕이 즉위하고 형의 행방을 찾아 군졸을 풀었다. 찾는 자에게 후한 상금을 주겠노라는 포고에도 그의 행방은 묘연했다. 군졸들은 어리의 집은 물론 주변을 샅샅이 살피고 애꿎은 그녀를 심하게 닦달하자 견디다 못해 스스로 목을 매달았다.

군졸들은 여러 달 만에 양녕을 아차산 바위굴에서 찾았다. 군왕의 측근들이 벌 주기를 주청했지만 세종은 형의 본심을 헤아리기에 귓전으로 흘렸다. 그리고 그의 자유로운 생활을 보호하였다.

양녕은 평양에 가서 정향이란 기생을 만나 헤어질 때 시 한 수를 주었다.

떠오는 길머리에 구름이 서려있고
보내는 정자 위에 조각달이 걸렸구나
가련토다 임 그리워 잠 못 이룰 밤
누가 있어 이 내 시름 달래어 주리.


세종이 재위 32년 만에 세상을 뜨고 병약한 문종이 즉위 3년 후 승하면서 어린 단종이 즉위했으나 수양대군의 쿠데타로 쫓겨났다. 양녕은 왕실의 가장 웃어른으로서 이 같은 과정을 지켜보았다. 권력무상을 재삼 느꼈을 터이다. 그리고 세조 8년인 1462년 9월 69살로 눈을 감았다. "내 죽으면 호화로운 장례를 하지 말고 묘비도 상석도 만들지 말라"는 유언을 남겼다. 역사의 기록이다.

양녕은 젊어서부터 글을 잘썼으나 세종이 성덕 있음을 알고 겉으로 글을 알지 못하는 척 하면서 미친 듯 스스로 방탕한 행동을 취했으므로 위(태종)에서도 그의 글 잘하는 것을 몰랐다. 늘그막에 양녕이 중(승려)에게 써 준 글에 이런 대목이 있다.

산허리에 둘린 안개로 아침밥을 지어먹고
댕댕이 덩굴에 걸린 달빛으로 밤에는 등불을 삼네
홀로 외로운 바위에 자니 다만 탑 한 층이 있을 뿐일세.

아무리 글 잘하는 문장이라도 이보다 더 잘 짓지는 못하리.(<연려술기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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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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