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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의 죽음> 표지(왼쪽), 대구 수성구 지범로 287 <앨리스>에서의 출간기념회 모습(오른쪽)
 <할머니의 죽음> 표지(왼쪽), 대구 수성구 지범로 287 <앨리스>에서의 출간기념회 모습(오른쪽)
ⓒ 정만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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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출신 소설가 현진건(1900~1943)은 우리나라 근대문학 도입기를 대표하는 민족문학 작가이자, 1936년 일장기 말소 의거로 고문과 투옥을 겪은 독립유공자이기도 하다. 이런 현진건을 연구하고 알리는 일에 몰두해온 '현진건 학교' 회원들이 지난 달 단행본 <할머니의 죽음>을 펴내고 대구에서 작은 출간기념회를 열었다. 

이미 현진건의 단편소설 '할머니의 죽음'은 출간돼 있지만, 과거에 쓰이던 어려운 어휘를 현대에 맞춰 뜻풀이를 달아 싣는 등 동인지 성격의 책을 별도로 만들어 <할머니의 죽음>이란 제목으로 출간했다는 뜻이다. 

지난 11월 25일 대구 수성구 지범로 287 카페 앨리스에서 열린 출간기념회는 김성순 회원의 '개회 선언'에 이어, 격려 말씀(김산 소설가), 자작시 〈할머니를 그리며〉 낭송(김규원 경북대 명예교수), 현진건 선생께 바치는 '헌사' 낭독(참석자 전원), 오는 12월 30일 번역서 〈현진건 중문 소설집〉을 별도로 펴내는 김미경 박사의 인사 말씀 등으로 진행되었다.

100년 전에 이미 노인 문제를 지적한 〈할머니의 죽음〉 

현진건은 원래 〈백조〉 창간 동인이었다. 그러나 현진건은 〈백조〉의 낭만주의와 경향이 전혀 다른 사실주의 작품을 줄곧 발표했다. 〈운수 좋은 날〉, 〈고향〉, 〈빈처〉, 〈술 권하는 사회〉, 〈정조와 약가〉, 〈신문지와 철창〉, 〈불〉, 〈사립정신병원장〉 등 현진건의 대표작들은 대체로 식민지 현실의 가난과 울분을 다루고 있다(관련 기사: 현진건이 누구인지 상세하게 설명해주는 책 https://omn.kr/25tw9).

현진건은 〈백조〉 동인이기는 했지만 소설은 〈개벽〉, 〈조선문단〉 등에 주로 발표했고, 〈적도〉, 〈무영탑〉 등 장편은 동아일보에 연재했다. 현진건이 〈백조〉에 발표한 유일한 소설이 〈할머니의 죽음〉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할머니의 죽음〉 역시 낭만주의가 아니라 사실주의 경향의 작품이다.

특히 단편소설 〈할머니의 죽음〉은 1923년 9월 〈백조〉 제3호(종간호)에 실렸다. 단편소설로 치면 〈희생화〉(1920), 〈빈처〉(1921), 〈술 권하는 사회〉(1921)에 이어 현진건이 네 번째로 발표한 작품이다. (1922년 1월부터 4월까지 〈개벽〉에 연재한 〈타락자〉는 흔히 중편소설로 분류된다.)

〈할머니의 죽음〉은 소설의 서사를 이끌어가는 화자 '나'가 섣달 그믐날 시골 본가에서 보내온 "조모주(할머니) 병환 위독"이라는 전보를 받는 것으로 시작된다. 다음은 책 내용줄거리를 '나'의 시점에서 요약한 것이다.
 
나는 부랴부랴 시골로 급히 내려간다. 사립문에 닿으니 마치 곡성이 나는 듯하다. 할머니는 이미 머잖아 돌아가실 듯이 병세가 매우 악화되어 보였다. 여든둘이나 되셨고, 작년 봄부터 기운이 쇠잔해지시어 가끔 가물가물하셨으니 그럴 만도 한 결과였다.

고향에서 멀리 떠나 있는 친척들이 모두 모였다. 다들 긴장을 한 상태로 몇 날을 보내는데, 그 중에서도 집안 최고의 효부로 익히 알려져 있는 중모(둘째아버지의 아내)는 할머니 곁에서 날마 다 밤을 새워 가며 간호를 할 뿐만 아니라 할머니의 기운이 신속히 회복되기를 기원하는 염불까지 쉼 없이 올린다.

할머니는 독실한 불교 신자이면서도 중모의 행동을 별로 탐탁하게 여기지 않는다. 뜻밖의 일이다. 다른 친척들도 중모가 "놀라운 효성"을 보이는 것을 "다른 사람을 야단칠 밑천을 장만하는" 행동으로 의심한다.

시간이 흐르면서 할머니는 치매 증상을 보여 자손들에게 웃음거리가 된다. 그 와중에 사람들은 할머니가 세상을 떠나기를 바란다. 빨리 직장으로 복귀하고 싶은 마음 때문이다. 그들은 한의사와 양의사를 번갈아 불러 할머니가 당분간 타계하시지 않는다는 결론을 받아낸다.

자손들은 모두 일터로 돌아간다. 나도 할머니에게 곧 완쾌하실 테니 염려하지 마시라는 위로 말씀을 드리고 서울로 올라온다. 몇 날 지난 화창한 봄날,  벚꽃놀이를 가려고 막 출발하려던 나는 다시 전보를 받는다. '오전 3시 조모주 별세'.

앞으로 더 심각해질 노인 문제, 소설 속 풍경이 눈 앞에 

〈할머니의 죽음〉에 등장하는 자손들은 할머니가 빨리 돌아가시기를 기다리는 모습이다. 소설 속 1923년 당시 82세 고령이었으니 그로부터 100년이 지난 2023년의 82세보다도 더욱 높은 연세였을 것은 분명하다. 게다가 치매를 앓고 있다. 그렇다 하더라도, 자손들이 할머니의 죽음을 내심 기다리는 이 현실을 우리 사회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대한민국 정책브리핑(2021년 8월 26일자, 보건복지부 주최 '치매 대책 발전협의회 제1차 회의자료)에 따르면, 우리나라는 2025년이면 65세 이상 노인이 1051만 명이 되어 전체 인구의 20%를 넘는 '초고령 사회'로 변하고, 치매 환자는 107만 7천 명에 이를 것으로 전망된다고 한다.  

게다가 2060년이면 노인 인구 비율이 40.1%까지 늘어나 세계에서 가장 빠르게 노령화가 진행되고, 치매 노인은 332만 명으로 급증할 것으로 예측되고 있다(보건복지부 2019년 발표). 정부와 전문가들의 통계는 소설 〈할머니의 죽음〉에 묘사된 100년 전 '풍경'을 한국 국민들이 일상으로 마주치게 될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사실을 실감나게 해준다.

그런 점에서, <할머니의 죽음>에 실린 글들을 읽으면서 착잡한 감회를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어려운 어휘에 뜻풀이를 단 현진건 소설 〈할머니의 죽음〉도 물론이지만, 김규원 회원의 시 〈할머니를 그리며〉는 참석자들에게 돌아가신 자신의 할머니를 그리워하게 만들었다. 이 책에 처음 실린 시 작품이다.

'외가, 친가, 시가가 한데 모여
사는 동네가 소왕국이었던
할머니 덕택에
이 세상을 맛본 나에겐
할머니는 처음부터
돌아가실 때까지 할머니였다.

하지만 할머니는
여느 할머니와 많이 달라서
흰머리 없고 등 굽지 않은 채
손자를 어르는
인자함보다는 위엄으로
몸을 감쌌다.

일흔 나이에 부지런히
닭모이 주러 가다가 넘어져
7년 병석 위에
정갈한 머리빗질, 깔끔한 얼굴손질, 빈틈없는 옷매무새
할머니의 사춘기가 함께 꼿꼿이 앉아
방문객을 맞이했다.

할머니 부음에도 눈물 없이 담담했는데
빈소에 웅크려 앉은
주름 잡힌 얼굴, 성근 머리카락의 환갑나이 아버지

처량한 고아가 된 모양에
여전히 철부지 청춘이었던
내 울음보가 그제야 터졌다.

어느새 할아버지 부르는 소리 익숙하니
어릴 적의 할머니 잔소리가 그립고
돌아가신 아버지 꿈속에 나타나
쇠락해진 묘소관리 나서니
고향산천도 변했고
몸과 마음도 예전 같지 않다.'


<할머니의 죽음> 출간 기념회는 내게 노인 문제를 다시 한번 깊게 생각하게 만드는 계기였다.

고령자들의 타계를 손꼽아 기다리는 사회란 그 자체로 얼마나 우울한가. OECD 가입국 중 늘 꼴지를 기록하는 대한민국의 저출산 현실, 그리고 초고령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정치인들과 정부는 심각한 고민과 현실적 조치를 취해야 한다. 이들에게 현진건 소설 〈할머니의 죽음〉 일독을 권하고 싶다.

태그:#현진건, #할머니의죽음, #김규원, #앨리스, #초고령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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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한인애국단><의열단><대한광복회><딸아, 울지 마라><백령도> 등과 역사기행서 <전국 임진왜란 유적 답사여행 총서(전 10권)>, <대구 독립운동유적 100곳 답사여행(2019 대구시 선정 '올해의 책')>, <삼국사기로 떠나는 경주여행>,<김유신과 떠나는 삼국여행> 등을 저술했고, 대구시 교육위원, 중고교 교사와 대학강사로 일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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