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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메일이 디지털 사진이라면 필름 사진은 손편지 정도로 여기며 천천히 세상을 담습니다. 여정 후 느린 사진 작업은 또 한 번의 여행이 됩니다. 수평 조절 등 최소한의 보정만으로 여행 당시의 공기와 필름의 질감을 소박하게 보여드리고자 합니다. Kodak Ektar100 필름을 사용하였습니다.[기자말]
- 지난 기사 '노지 야영의 끝판왕, 모든 게 허용되는 땅(기사 링크)'에서 이어집니다.

키르기스스탄 알틴아라샨에 도착한 시각은 얼추 점심식사를 해야 할 때였다. 지난 밤 꿈같은 별빛 속에서 꿀같은 잠을 선물 받았기에, 이곳에 이르는 마지막 오르막이 그리 힘들지 않았다. 마을 초입이 보이는 언덕에 도착하자 빗방울이 하나둘 떨어지기 시작했다. 출발하기 전 매일 확인했던 예보와 같았다.

잠자리를 우선 정했다. 딱히 규칙이랄 게 없어서 어디든 자리만 잡으면 우리의 침실이었지만 구릉과 말똥이 연속되는 곳이라 평평하고 깨끗한 곳을 찾아야 한다. 약간의 금액을 주고 숙박업소의 마당을 쓰는 방법도 있었지만, 조금 험하더라도 사람의 발길이 스쳐가지 않는 곳에서 쉬고 싶기도 했다.

결국 찾은 곳은 그나마 평평하긴 했지만 경사가 없는 곳은 아니었다. 동행인과 어느 방향으로 텐트를 칠까 고민하다가 첫날은 경사를 좌우로 두고 잤다가 밤새 굴러다니느라 잠을 설쳤다. 말에 치여 바닥에 엎어지는 꿈을 꾼 것도 같다. 둘째 날은 높은 곳을 머리에 두고 자니 그래도 잘 만했다.
 
비가 오락가락 (휴대폰촬영) 가만히 보고만 있어도 마음이 평온했던 풍경 ⓒ 안사을
 
이 마을에는 온천수가 곳곳에서 나온다. 숙소를 이용하면 무료로 이용할 수 있게 해주거나 어느 정도의 금액으로 온천 입장을 허해주기도 한다. 여행객에게 더 유명한 곳은 노천 온탕이다. 언덕 위에서는 보이지 않는 샛길로 2km 넘게 걸어가야 하는 곳이지만 지도 앱에 위치가 표시되어 있으니 충분히 가볼 만한다.

알틴아라샨 마을에서의 첫날, 그러니까 카라콜에서 출발한 지 이튿날에는 어차피 비가 올 것이었기 때문에 별다른 계획을 세우지 않고 다음날 왕복 10시간짜리 등산을 위해 체력을 비축하기로 했다. 마을의 입구에 있는 게스트하우스에서 식사만 청해 편하게 밥을 먹고 온천에도 몸도 녹였다.

해발 3900m 정상, 상상을 초월하는 경사 

알라쿨로 가는 길은 왕복으로 20km 정도 된다. 거리가 제법 있어서 경사가 심하지 않아도 출발점과 정상 사이의 표고차가 꽤 있다. 알틴아라샨 마을은 해발 2500m, 알라쿨패스 뷰포인트는 해발 3900m이다. 하루 만에 1400m를 오르내려야 하니 결코 쉬운 길은 아니다. 그리고 마지막 경사는 정말 상상을 초월한다.

지난 8월 3일 새벽, 눈을 비비고 일어나 라면으로 아침을 먹고 8시 반쯤 길을 나섰다. 밤새 굴러다니느라 잠도 잘 못 잔 데다가 3000m 정도의 고도가 되면 고산증이 찾아올 것이 불을 보듯 뻔했다. 그래도 어젯밤과 오늘 아침 고산증 약을 미리 먹어두었으니 위태로운 상황은 없을 것이라 전망했다.
 
강을 건너 멀리 보이는 설산의 방향이 아닌, 가다가 오른쪽으로 꺾어서 올라가야 한다. ⓒ 안사을
 
등산로라고 생각할 만한 곳은 출발한 곳에서 한 시간 반 정도를 걷고 나서 시작되었다. 위에서 끊임없이 내려오는 물이 땅을 진창으로 만들었고 발목까지 푹 적시지 않기 위해 요리조리 피해 다니느라 시간이 많이 걸렸다. 게다가 우리 둘 다 계속 설사 중이었기에 남들 안 보이는 곳에서 바지춤을 열었다 닫았다 하느라 지체되기도 했다.

고도를 200m 정도 치고 올라가자 늪을 벗어난 산뜻한 길이 열렸다. 수백 마리의 양 떼가 한가로이 풀을 뜯으며 우리와 같은 방향으로 올라가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파란 하늘과 녹색 풀밭, 갈색의 양들이 삼색으로 어우러져 목가적 풍경을 자아냈다. 고목에 잠시 앉아서 쉬었다가 다시 발걸음을 재촉했다.
 
알라쿨 가는 길 언제나 그렇듯 가장 멀리 있는 봉우리가 목적지인 줄 알지만, 택도 없다. ⓒ 안사을
  
힘찬 물소리와 함께 걷는 내내 들리는 계곡 소리는 우리에게 힘을 내라고 하는 듯하다. ⓒ 안사을
 
스무 명도 넘어 보이는 무리가 말을 타고 우리를 앞질러갔다. 한국인들이었다. 알틴아라샨은 차를 타고 올라왔고, 알틴아라샨에서부터는 말을 타고 가는 중이라고 했다. 우리는 카라콜에서부터 걸어 올라가는 중이라고 하니 다들 엄지를 척하니 내밀며 대단한 도전이라고 칭찬해 주었다.

마음속으로 저 사람들은 굳이 왜 말을 타고 올라가는지 생각했었다. 이날은 공기도 청명하고 길은 평탄했으며, 흔들거리는 말 잔등에서 코어 근육의 힘으로 중심을 잡는 것이 오히려 더 힘들어 보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마음은 두 시간여 만에 사라졌다. 지긋지긋한 고산증이 찾아온 것이다.
  
고산증의 위험성... 구토까지 일으키는 '지독한 숙취'의 느낌
 
자갈의 강 물처럼 보이는 것은 돌이 계곡이 되어 흘러내리는 광경이다. ⓒ 안사을
 
다행히 동행인은 증세가 가벼웠다. 당시 걸음이 지체될까 봐 그에게 말은 제대로 하지 못했지만 정말이지 포기하고 내려가고 싶은 마음이 스무 번도 넘게 들었다. 원래 고산증이 찾아오면 멈추고 내려가는 것이 맞다. 증세가 가볍다고 하루 이틀 더 진행하다 보면, 과장이 아니라 정말 목숨을 잃을 수도 있다.

그럼에도 천천히 꾸역꾸역 올라갔던 이유는, 어쨌든 정상을 찍고 다시 내려올 여정이었고 숙영지였던 2500m의 고도에서는 고산증 증세가 사라지기 때문이었다. 만약 그다음 날도 계속해서 고도를 올려야 하는 여정이었다면 안전의 이유로 그만 포기하고 내려왔을 것이다.

고산증의 증세가 어떤 것이냐고 물으신다면 나는 '지독한 숙취'의 느낌이라고 표현하고 싶다. 자신의 주량보다 두 배 이상 마신 다음날 아침, 선잠에서 깨어났을 때의 느낌과 매우 비슷하다. 머리가 깨질 듯 아프고 속이 메슥거린다. 실제로 이것 때문에 구토를 하는 사람들도 더러 있다.

거기에 더해서, 조금만 움직여도 숨이 차오르고 아무리 깊이 숨을 쉬어도 울대뼈 아래까지 시원하게 숨이 차오르는 느낌이 들지 않는다. 가만히 있을 땐 괜찮다가도 발걸음을 조금 움직이면 다시 두통과 메슥거림이 찾아온다. 기어가듯이 천천히 가면서 최대한 자주 쉬는 수밖에 없다.
 
외국인 한 무리 여기서부터 고산증이 심해졌다. 아무런 증세도 없는 듯 홀연히 올라가는 저 무리가 참 부러웠다. ⓒ 안사을
 
계곡에 잠시 앉아 거친 빵 두 개와 초콜릿 몇 개로 점심을 해결했다. 가져온 물을 마시고, 물을 아끼기 위해 나는 정수 빨대로 계곡물을 직접 마시기도 했다. 조금만 더 힘을 내보자며 서로 용기를 북돋고 다시 출발했다. 아까 말을 타고 올라가던 사람들이 자꾸만 아른거렸다.

듣기론 마지막 유르트(유목민들이 쓰는 이동식 천막집)가 나오면 엄청난 경사가 등장하는데, 거기만 넘어 잘 오르면 호수가 보인다고 했다. 지도로는 가늠이 잘되지 않는 길고 긴 길을 그저 걸었다. 위로가 되는 것은 그림 같은 풍경, 그리고 앞서거니 뒤서거니 함께 걷고 있는 동행인 뿐이었다. 그러던 중 앞이 트이는 느낌과 가로막히는 느낌이 찰나의 시차를 두고 거의 동시에 들었다.

눈앞의 거대한 벽을 보고 혀를 내둘렀다. 경외감과 절망감이 함께 올라왔다. 나와 동행인은 기가 차다는 듯 말했다.

"저게 뭐야!"
"아니, 잠깐만. 저기를 올라간다고?"
"그래도 길은 있네."
"저게 길이긴 한데..."

 
마지막 관문 (휴대폰촬영) 사진으로는 규모와 경사가 잘 표현되지 않는다. 우측 아래 사람의 크기를 보면 조금이라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 안사을
 
위 사진은 휴대폰 카메라로 줌을 당겨 찍은 것이다. 사진을 찍은 곳에서 위 장소까지 올라가는 데만도 한 시간이 걸렸다. 고산증 때문에 계속 멈춰야 했기 때문이다. 동행인은 경사로를 올라가며 울음을 터트렸다. 세 걸음 올라가면 두 걸음 미끄러지는 위험한 길 때문이었다.

자칫 조금만 방심하면 한 20분은 굴러떨어질 것 같은 아찔한 곳이었다. 바위나 나무로 계단을 내어놓은 곳도 아니었고, 주먹만 한 날카로운 돌들로 이루어진 경사로였기에 길이라고 생긴 곳에서도 발이 푹푹 빠지며 우리를 밑으로, 밑으로 잡아채는 것 같았다. 이를 악물고 마지막 노력을 하는 여행자에게만 이 풍경을 허락하겠다는 톈산산맥(天山山脈)의 고집처럼 느껴졌다.
 
올라가며 미끄러운 길에 조금 적응하여, 배낭에서 카메라를 꺼내 기이한 자세로 담은 사진 ⓒ 안사을
 
그러길 몇시간, 드디어 벽의 정점에 올라섰다. 한 마리 독수리가 되어 고산의 머리 위를 소리 없이 맴돌며 아래를 내려다보는 느낌까지 들었다. 모두들 고요했고 나 또한 탄성조차 지를 수 없었다. 차가운 바람이 목덜미를 스치고 지나갔고 부르르 떨리는 스산함에 비로소 정신이 들었다.

호수를 보고 사람들은 '물감을 풀어놓은 듯한 색감'이라는 표현을 많이 한다. 이 곳은 물감보단 독약을 진하게 풀어놓은 느낌이었다. 머리를 양 갈래로 묶고 어떻게 하면 창의적인 방법으로 사람들을 괴롭혀줄까 생각하며 천진하게 웃는 마녀가, 자신이 가진 모든 노하우를 더해 가장 유혹적인 색깔로 만든 극약인 것만 같았다.
 
알라쿨 형광빛 호수와 함께 멀리 빙하의 흐름까지도 볼 수 있다. ⓒ 안사을
   
알라쿨과 설산들 호숫가에 내려가 볼 엄두는 나지 않았다. ⓒ 안사을
 
모두가 내려갈 때까지 충분히 풍경을 만끽했다. 언제 다시 이 고도에 올라 이런 풍경을 볼 수 있을지 모른다. 이렇게 높은 산을 걷는 것은 당분간 쉴 듯하다. 멀미가 싫어 버스 대신 운전을 택하는 나로서는, 지구라는 야생마를 타고 멀미하는 느낌이 드는 고산증을 마주하는 것을 이제 조금은 미뤄놓고 싶다.

뒤를 돌면 까마득히 보이는 첩첩산중에 다시 내려갈 일이 갑갑하여 여기서 하룻밤을 보내면 어떨까 하는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함과 동시에, 장비 없이는 단 하루만으로도 목숨이 왔다 갔다 하는 인간의 연약함을 느꼈다. 대자연 속에서 우리는 개미보다 약한 존재였고 그렇기에 더욱 경외감을 가지고서 그곳을 내려왔다.
 
돌아가야 할 길 왼쪽 아래 보이는 하얀 점이 마지막 유르트. 골짜기를 얼마나 굽이돌아야 다시 우리의 텐트로 돌아갈 수 있을지 까마득했다. ⓒ 안사을
 
18일 동안의 여정을 통해 꿈에도 그리던 톈산산맥의 정기를 온몸에 받아왔다. 고려인의 후손이 사는 마을에서 주민들과 작은 정을 나누기도 했다. 다양한 방식과 모습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을 보며 마음의 품이 조금 더 넓어지는 느낌이 들기도 했다. 어깨에 얹어진 무게와 다양한 상황들을 이겨내며, 앞으로 나의 주변 사람들에게 조금 더 든든한 사람이 될 수 있을 것이란 믿음도 생겼다.

불편하게 담아 온 필름을 현상하여 하나하나 스캔하다 보니 다시 지난 여름의 기억이 생생하다. 올겨울엔 또 지구촌 어느 곳을 천천히 담는 여행자가 될지 생각에 잠겨본다. 바쁜 일상에 아직도 고치지 못한, 송쿨에서 두 동강 난 렌즈가 계속 눈에 들어온다. 여행 속에선 모든 흔적이 추억이 되니, 손해라고 할 것도 없다. 
태그:#키르기스스탄, #알틴아라샨, #알라쿨, #필름사진, #야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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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립 대안교육 특성화 고등학교인 '고산고등학교'에서 교사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필름카메라를 주력기로 사용하며 학생들과의 소통 이야기 및 소소한 여행기를 주로 작성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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