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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는 이제까지 개인사 중심의 인물평전을 써왔는데, 이번에는 우리 역사에서, 비록 주역은 아니지만 말과 글 또는 행적을 통해 새날을 열고, 민중의 벗이 되고, 후대에도 흠모하는 사람이 끊이지 않는 인물들을 찾기로 했다. 

이들을 소환한 이유는 그들이 남긴 글·말·행적이 지금에도 가치가 있고 유효하기 때문이다. 생몰의 시대순을 따르지 않고 준비된 인물들을 차례로 소개하고자 한다. [편집자말]
한국천주교는 1784년(정조 8) 3월 이승훈이 중국 연경에서 세례를 받고 천주교 서적을 가지고 귀국하여 이벽·권철신·김범우·정약종 등과 서울 명례방에서 집회를 갖고 조선교회를 창설하였다. 서학·서교·천주학 등으로 불리다가 천주교로 개칭되었다. 모든 나라가 선교사에 의해 천주교(가톨릭)가 전파된 데 비해 한국에서는 자국민에 의한 첫 사례이다.

정유년(丁酉年-1777년)에 권철신이라는 유명한 학자가 정약전 등 여러 학자들과 더불어 산골에 있는 그윽한 절에서 철리(哲理) 깊은 뜻을 서로 토론한다 함을 듣고, 그는(이벽) 몹시 추운 날에 100리나 되는 눈이 쌓이고 험한 산길을 어두움과 호랑이 떼들과 싸우면서 걸어가 그날 밤으로 그 모임에 참가하였다.

연구회는 10일 이상을 두고 계속되어 천(天), 세계, 인성(人性) 등에 대하여 서로 이야기 하였다. 옛 성현들의 학설을 끌어내어 일일이 토의하였는데, 갑이 주장하면 을이 반박하여 그칠 줄을 몰랐다.

이때 그들은 북경에서 가져온 과학, 산수, 종교에 관한 예수회 신부들이 지은 책을 연구하기 시작하였다. 그 중에는 천주의 섭리와 영혼이 없어지지 않음을 가르치며, 칠악(七惡)을 이겨내어 덕을 쌓을 것을 가르쳐 주는 <천주실의> <성리진전>, <칠극> 등 유명한 천주교 교리서도 있었다.

여태까지의 확실치 않고, 앞 뒤가 서로 맞지 않는 점이 많은 유교에 관한 책만을 읽고 있던 그들은 곧 가르침에 따라서 아침 저녁으로 기도를 드리고, 매월 7일, 14일, 21일, 28일에는 일을 쉬고 오로지 깊히 생각하며 가만히 묵상에 잠겨 재계(齋戒)를 엄격히 지키려고 애썼다.(팔레, <한국천주교회사(상)>)

이벽(李檗, 1754~1785)은 경기도 포천태생으로 무반의 이름 높은 가문 출신이다. 아버지 이부만의 둘째 아들이다. 다산 정약용의 맏형 정약현이 이벽의 누이와 결혼하여 두 가문은 사돈 사이가 되었다. 이벽의 아버지는 건장한 둘째 아들도 형이나 셋째처럼 무관으로 출세시키고자 했으나 그는 활쏘기나 말타기보다 경서 읽기에 더 열심이었다.

타일러도 듣지 않고 고집을 부려 아버지는 고집이 세다는 의미의 글자 벽(僻)의 음을 따고 항렬인 목(木)을 배합한 글자인 벽(檗)으로 이름을 지었다. 처음 이름은 알려지지 않는다. 이벽은 매형인 정약현을 통해 그의 형제들 약전·약종·약용 등 재능이 우수한 청년들과 어울렸다. 또 권철신·권일신·이가환·이승훈 등 당대의 인재들과 만나 학문을 토론하고 여주·양주 일대의 산수를 즐겨 찾았다.

중인 출신 김범우를 만난 것도 이들을 통해 알게 되었다. 그는 역관으로 청나라를 자주 다니며 서학에 관한 각종 서책을 가져왔다. 우수한 청년들은 서양의 책을 접하면서 새로운 세계(관)에 눈을 떴다. 이제까지 배우고 읽힌 주자학 중심세계가 얼마나 협소한 것인지 알게 되었다.

이벽은 천주교와 서양 학문에 심취하였고, 그 선교를 주도하는 인물이 되었다. 1779년 (정조 3) 무렵에는 광주의 천진암과 주어사를 중심으로 천주교를 열심히 전파하였고, 겨울밤 눈속을 헤치고 와서 촛불을 밝히고 이가환과 열띤 토론을 벌이기도 하였다.
이벽은 천주교만이 아니라 역수(曆數)와 <기하원본>(마테오리치 지음)을 가르치기도 하였다. 이때 약전과 약종 형제, 권일신 형제, 김원성, 이승훈 등이 강학자들이었다.(이이화, <정약용과 이벽>, <한국근대인물의 해명>)

정약용이 스물세 살 때인 1784년 4월, 큰 형수의 제사에 참석하고자 고향을 찾았다. 여덟 살이 많았지만 친구인 이벽도 왔다. 큰 형수의 동생이었으므로 누님의 제사에 참석하고자 정약용의 집에 온 것이다. 사달은 제사를 마친 뒤 상경하는 뱃길에서 잉태되었다.

정약용에게 성호 이익이 한 세대 전의 스승이었다면 이벽은 살아 있는 벗이며 학덕 높은 지우였다. <이벽에게 드리는 글>에서 의기투합하고 존경심이 묻어난다.

어진이와 호걸은 기개 서로 합하고
친근함 돈독하니 기쁜 마음으로 돌아보네
아름다운 덕을 일찍부터 힘써 닦으니
비장한 결의 항상 얼굴에 드러나네.


형수의 제사를 지낸 정약용은 둘째형 그리고 이벽과 함께 나룻배를 타고 상경길에 올랐다. 배안에서 그야말로 경천동지하는 얘기를 듣는다.

그는 23세에 서학자(西學者)로 유명한 우인(友人) 이벽(李檗)으로부터 기독교 = 천주교리를 들었으며 또 자기 자형 이승훈의 중국 연경행을 통하여 천주교 서적과 서양 근대 천문학·수학, 지구도, 자명종, 천리경, 서양풍속기 기타 다수한 서적과 기물을 얻어 보았다. 예기(銳氣)가 왕성한 다산은 부패하고 대중성이 없는 유교를 싫어하고 과학기술과 부국강병을 배경으로 선전하는 종교에 호기심을 갖지 않을 수 없었으므로 이벽의 권고에 의하여 자기 중형 약전, 삼형 약종과 함께 한동안 교회에 비밀히 관계하였으며 '요한'이라는 세례자 영명(靈名)까지 받았다고 조선천주교회사는 말하고 있다. (최익한, <실학파와 정다산>)

조정에서는 탄압의 칼을 뽑았다. 1785년(정조 9) 3월 천주교도를 처음으로 처형한 데 이어 1786년 1월 청국에 가는 사절이 연경에서 서양 서적을 구입하는 것을 금지하였다. 1794년(정조 18) 청나라 신부 주문모가 조선에 밀입국하였으며, 1801년(순조 1) 1월 대대적인 천주교도 색출이 일어나고 붙잡힌 300여 명을 처형하였다. 신유박해이다.

천주교도 탄압이 시작될 때 이벽은 전염병에 걸려 나졸들에 의해 외딴 움막에 갇혔다. 전염을 막기 위해 당시에 있었던 관행이었다. 그리고 8개월 만에 움막에서 죽었다.

부음 소식을 전해들은 정약용이 만사를 지었다.

선계에 사는 학 세상에 내려오니
훤칠한 모습 좋은 풍체로다
날개 쭉지 희기가 눈 같은데
못난 집오리들 시기하고 성내네
울음 소리 저 하늘에 울리고
맑은 소리 이 세상에 뛰어나네
가을을 타고 갑자기 날아가 버려
슬퍼해 본들 부질없이 사람만 수고롭힐 것이로세.

 

태그:#겨레의인물100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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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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