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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현충원 해설사 경험을 바탕으로 이곳에 묻힌 다양한 인물들의 생애와 사연을 소개하고, 현재를 살아가는 이들이 생각해야 할 점을 독자 여러분과 나누고 싶습니다.[기자말]
손기정 남승룡 두 사람의 올림픽 제패는 전 세계에 흩어져 살고 있던 우리 민족의 가슴에 희망과 용기를 불어넣었습니다.

시상식이 끝난 후 일본 선수단은 마라톤 영웅들을 위한 축하 파티를 개최합니다. 하지만 정작 주인공인 손기정과 남승룡 선수는 파티에 참여하지 않는데요. 그들은 몰래 선수촌을 빠져나와 베를린에 있던 한 두부 공장으로 들어갑니다. 그곳은 안중근 의사의 사촌 동생인 안봉근의 집이었는데요. 안봉근의 서재에서 두 사람은 난생처음으로 태극기를 보게 됩니다. 그는 그 순간을 자서전에서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태극기다. 우리 조국의 국기다.' 그렇게 생각이 들자 감전이 된 듯 뜨거운 감격이 몸에 흘렀다. 탄압과 감시의 눈을 피해 태극기가 이렇게 숨 쉬고 있듯이 우리 민족도 살아있다는 확신이 우러났다."
 

독일에 살던 우리 동포들이 한자리에 모여 두 선수를 축하했습니다. 손기정 남승룡의 승리는 단지 개인의 승리가 아니라, 식민지 설움에 빠져있던 우리 민족 전체의 승리로 다가왔습니다.

"우리는 당신을 단지 운동선수로 보지 않소. 일본이 여는 축승회에 가지 않고 우리에게 온 것 자체가 독립운동입니다."
  
애국지사 김요한의 묘 (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2묘역 470호)
 애국지사 김요한의 묘 (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2묘역 470호)
ⓒ 김선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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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 손기정의 마라톤 우승 소식은 전 세계 우리 민족에게 알려지며 독립 의지를 높이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2묘역 470호에 안장된 김요한 지사는 일본에서 활동하던 독립운동가입니다. 1940년 9월 자숙회라는 비밀결사를 조직하는데요. 일본에 있는 조선인 학생들을 규합하여 '조선 독립 혁명운동'을 추진하고자 했습니다.

자숙회에서 논의한 내용 중에 다음과 같이 손기정 선수에 관한 내용이 나옵니다.
올림픽 기록영화인 <민족의 제전>이 상영될 때 일본인 선수의 우승에 기뻐하고, 조선인 선수 손기정과 남승룡에 대해서는 냉담한 반응을 보이는 것은 민족적 차별에서 기인하였으므로 이를 민족적 불만을 강화하는 재료로 삼을 것
  
애국지사 김동호의 묘 (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4묘역 3호)
 애국지사 김동호의 묘 (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4묘역 3호)
ⓒ 김선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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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4묘역 3호에 안장된 김동호 애국지사 역시 1940년 일본에서 민족주의 단체 학우회를 조직하는데요. 그들은 조선 학생들의 민족의식을 일깨우고, 중일전쟁 과정에 일본 내 혼란이 일어나면 일제히 봉기해 조국 독립을 수행하겠다는 목표를 세웠습니다. 학우회 활동 방침에서도 손기정이 거론됩니다.
 
'... 둘째, 독립을 달성하기 위하여 한국인 학생은 단결을 더욱 굳게 하고 민중을 민족적으로 지도하여야 할 사명을 띠고 있다. 신입생에 대하여는 총독 정치의 모순, 한국 민족에 대한 차별 대우 등의 현실을 지적하여 민족의식을 지도·계몽한다. 셋째, 한국 민족은 열등한 민족이 아니다. 이미 올림픽대회에서 세계 각국 선수를 압도하고 우승한 손기정은 이 민족의 우수성을 발휘하고 있다. ... 일곱째, 3·1운동은 민중의 일시적 무통제의 폭동이었기 때문에 실패하였다. 이에 스스로 단결을 굳게 하고 대중의 지도에 노력하여야 한다.'
시 '그날이 오면'으로 널리 알려진 작가이자 신문기자였던 심훈은 두 선수가 메달을 수상한 소식을 듣고 그 자리에서 즉석으로 시를 짓기도 합니다. 심훈은 이 시를 지었다는 이유로 일본 경찰에 끌려가기도 했는데요. 이후 급작스럽게 장티푸스에 걸려 목숨을 잃습니다. 시 '오오 조선의 남아여'는 심훈의 마지막 작품이 되었습니다. 여운형 선생은 심훈의 장례식에서 이 시를 눈물로 낭송했습니다. 대전현충원 손기정 선수 비석에는 이 시 전문이 새겨져 있습니다.

가는 곳마다 쫓아다닌 일본 경찰
 
체육인 손기정의 묘 비석 (대전현충원 국가사회공헌자묘역 10호)
 체육인 손기정의 묘 비석 (대전현충원 국가사회공헌자묘역 10호)
ⓒ 임재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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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오 조선의 남아여
백림 마라톤에서 우승한 손기정, 남승룡 군에게
- 심 훈
그대들의 첩보를 전하는 호외 뒷등에 붓을 달리는 이 손은 형용 못할 감격에 떨린다. 이역의 하늘 아래서 그대들의 심장 속에 용솟음치던 피가 2천3백만의 한 사람인 내 혈관 속을 달리기 때문이다.
 
"이겼다."는 소리를 들어보지 못한 우리의 고막은 깊은 밤 전승의 방울 소리에 터질 듯 찢어질 듯 침울한 어둠 속에 짓눌렸던 고토의 하늘도 올림픽 거화를 켜 든 것처럼 화다닥 밝으려 하는구나!
 
오늘 밤 그대들은 꿈 속에서 조국의 전승을 전하고자 마라톤 험한 길을 달리다가 절명한 아테네의 병사를 만나보리라. 그보다도 더 용감했던 선조들의 정령이 가호하였음에 두 용사 서로 껴안고 느껴 느껴 울었으리라.
 
오오, 나는 외치고 싶다! 마이크를 쥐고 전 세계의 인류를 향해서 외치고 싶다! "인제도 인제도 너희들은 우리를 약한 족속이라고 부를 터이냐!"


한편 손기정 남승룡 두 사람이 그토록 지우고 싶었던 일장기를 신문 지면상에서나마 지워준 이들이 조국에 있었습니다. 바로 '일장기 말소 사건'입니다. 먼저 여운형 선생이 사장으로 있던 조선중앙일보가 일장기를 지운 채 사진을 실었습니다. 동아일보 역시 손기정 선수 시상식 사진에서 일장기를 지우고 화질을 낮춰 신문을 발행했습니다.

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3묘역 190호에 안장된 김준연 지사는 당시 동아일보 주필로 활동하고 있었는데요. '일장기 말소 사건'으로 동아일보는 무기 정간을 당하게 되고, 김준연 지사는 송진우 사장과 함께 주필에서 사임하게 됩니다.
  
애국지사 김준연의 묘 (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3묘역 190호)
 애국지사 김준연의 묘 (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3묘역 190호)
ⓒ 임재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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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다른 언론도 손기정 사진에서 일장기를 빼기 위해 여러 기지를 발휘하는데요. 여성 월간지 '신가정'에는 손기정 다리 사진만 게재합니다. 당연히 종로경찰서 형사들이 찾아오는데요. 일장기를 내기 싫어서 그런 것이 아닌지 따져 묻습니다.

이에 '신가정' 주필 변영로는 "손기정 선수가 무엇으로 세계를 제패했다고 생각하는가. 그가 세계를 제패한 것은 무쇠같은 다리를 가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의 다리만 실은 것이다"라며 당당히 맞섭니다. 그에 포기하지 않은 일본인 형사들이 사무실을 샅샅이 뒤져 나머지 부분을 찾아내는데요. 다행히 잡지에 실린 사진은 일장기 운동복을 입은 손기정 사진이 아니라, 양정고등보통학교 시절 손기정 사진에서 잘라진 부분이 발견되어 화를 면할 수 있었습니다.

손기정 선수는 귀국길에 오릅니다. 일제는 이번에는 손기정을 기차가 아닌 비행기에 태워 귀국시키는데요. 만약 철로를 따라 귀국하게 되면 손기정이 가는 곳마다 우리 민족이 몰려들어 민족 저항 의식이 높아질 게 뻔했기 때문입니다. 이를 우려한 일제는 베를린-인도-싱가포르-일본-조선 항로를 따라 비행기로 손기정을 실어 날랐습니다.

손기정 일행이 싱가포르에 도착했을 무렵 손기정은 한 선배로부터 경고를 듣게 되는데요. 조선에서 일장기 말소 사건이 일어났고, 그로 인해 여러 사람이 다치고 고초를 겪었다는 사실을 전해 듣습니다. 손기정이 가는 곳마다 일본 경찰이 손기정을 감시했고, 마치 사상범 다루듯 몸 수색도 서슴지 않았는데요.

손기정은 "차라리 마라톤 우승을 반납하고 싶다"며 "나라 없는 민족에겐 올림픽 우승을 기뻐하고 축하할 기회조차 없었다. 올림픽 우승자도 일본인들에겐 한낱 천덕꾸러기요, 성가신 인물이었다"고 당시 심경을 이야기했습니다. 일제는 이후에도 손기정 선수가 구심점이 되어 민족의식을 고조시킬까 항상 감시하고 통제했습니다.

"나의 길고 긴 싸움 끝났다."
  
비행길을 거쳐 귀국하는 손기정
 비행길을 거쳐 귀국하는 손기정
ⓒ 손기정기념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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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림픽 우승 이후 손기정이 가는 곳마다 일제 형사들이 감시했고 심지어 우편물까지 검열했습니다. 일본 경찰은 손기정에게 "오해를 살 수 있으니 사람들 모이는 곳에 절대 가지 말라"고 경고를 남기기까지 합니다. 손기정의 고통은 해방이 되어서야 끝날 수 있었습니다.

1945년 해방 이후 손기정은 한국 마라톤 재건을 위해 '조선 마라톤 보급회'를 창설하고 마라톤 육성에 매두몰신합니다. 1947년 4월 19일 보스턴 마라톤에서 서윤복 선수가 우승을 차지하고, 1950년 4월 19일 또 다시 보스턴 마라톤에서 함기용, 송길윤, 최윤칠 선수가 나란히 1·2·3위를 차지하며 시상대를 휩쓸게 된 영광도 손기정의 지도가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입니다.

국제 올림픽 무대에서 손기정이 본인 이름 '손기정'과 '한국' 국적을 되찾게 된 때는 1984년 로스앤젤레스 올림픽 폐회식이었습니다. 손기정 선생은 1988년 서울올림픽을 소개하는 대표자로 무대에 올랐습니다. '손기정, 코리아'라는 이름이 올림픽 경기장에 당당히 울려 퍼졌습니다.

"올림픽에서 늘 '손 기테이'라고 불렸던 나는 '손기정'이라는 소개에 신선함마저 느꼈다. 그렇다. 나는 이날이 오기를 고대하고 있었다. 나의 국적은 한국이고 이름은 손기정이라고 드디어 알리게 된 것이다. 이로써 나의 길고 긴 싸움은 끝났다."

손기정 선생은 마지막 소원이 있었습니다. 나라가 분단된 이후 고향 신의주를 다시는 갈 수 없었는데요. "죽기 전에 남북통일이 된다면 신의주 부산 간 역전경주 대회에 나가고 싶다"던 바람은 아직 이뤄지지 못했습니다. 통일을 보지 못한 채 2002년 눈을 감습니다.

선생은 생전 여러 인물과 인연을 맺었는데요. 1945년 3월 여운형 선생이 건국동맹을 건설할 때 연락 담당 역할을 맡기도 합니다. 베를린 올림픽 당시 손기정 선수는 '굳이 이 대회에 나가야 하느냐' 고민이 많았는데요. "일장기를 달고 가지만, 등에 한반도를 짊어지고 달린다는 것을 잊지 말라"고 격려한 게 바로 여운형 선생이었습니다. 1947년 7월 19일 여운형 선생이 암살된 후 손기정 선수가 선생의 관을 운구했습니다.
  
육군준장 김창룡의 묘 (대전현충원 장군 1묘역 69호)
 육군준장 김창룡의 묘 (대전현충원 장군 1묘역 69호)
ⓒ 임재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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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3년에는 특무대장 김창룡과 악연이 생기는데요. 대구에서 열린 제9회 전국축구대회가 발단이었습니다. 당시 준결승에서 육군특무부대 축구팀과 조선방직팀이 맞붙게 되는데요. 특무부대팀은 우세한 경기를 벌였지만, 연장전에서 패널티킥까지 놓이며 경기는 무승부로 끝나게 됩니다. 당시 규정에서는 승패를 제비뽑기로 정하게 되어 있었는데요.

조선방직팀이 뽑기를 열어본 결과 승리였습니다. 조선방직 응원단이 북과 꽹과리를 치며 환호성을 지르자, 육군 특무부대 부대장 김창룡은 지프차를 타고 운동장에 난입해 난동을 피웠는데요. 운동장에 공포탄을 쏘고 조선방직 응원단을 모두 잡아 체포하라고 고함을 질렀습니다.

난동 속에 운동장 옆에 주둔하던 미군 부대가 놀라 출동 준비까지 하는 등 아수라장이었는데요. 당시 조선방직 대구지점 간부였던 손기정도 체포되어 붙들려가는 수모를 당합니다. 장군 1묘역 김창룡과 국가사회공헌자 묘역 손기정은 대전현충원에서 언덕 하나를 너머 마주하고 있습니다.

지난 9월 27일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 <1947 보스톤>이 개봉했습니다. 주인공 손기정은 대전현충원에 서윤복은 서울현충원 국가유공자 3묘역 17호에 안장되어 있습니다. 서울과 대전 현충원에서 우리의 체육 영웅과 그들에게 희망을 보았던 독립운동가들을 찾아보시면 어떨까요.

[관련기사]
누구 앞에서든 당당했던 손기정, 그가 은퇴를 결심한 이유 

[참고자료]
1. <나의 조국, 나의 마라톤 -손기정 자서전> (손기정, 2022, 휴머니스트)
2. 손기정 기념관 (https://www.sonkeechung.com/sonkeechung/main/main.do)
3. 독립유공자 공적정보 (https://e-gonghun.mpva.go.kr/user/ContribuMeritList.do?goTocode=20002)

 

태그:#손기정, #대전현충원, #김요한, #김동호, #김준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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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의 시민활동가입니다. 우리 지역 현장 곳곳을 다니며, 현장의 목소리를 듣고 있습니다. 마이크가 필요한 분에게 마이크 드리는 것이 제 역할이라 생각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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