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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인터스텔라> 중 한 장면.
 영화 <인터스텔라> 중 한 장면.
ⓒ 워너 브러더스 코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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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추석에 강력한 '중력'이 있다고 믿는다. 평소에는 달과 지구처럼 멀었던 나와 타인의 관계가 미친듯이 가까워진다. 업무에 치여 생각지도 못했던 가족, 친구, 친척에게 연락을 건넨다.

그러고는 문득 궁금해진다. 나처럼 혼자 지내는 사람들의 명절은 어떨까. 청년은, 중년은, 혹은 노년 1인 가구는 어떨까. 영화 <인터스텔라> 속 주인공이 5차원의 공간에서 시간을 내다보듯, 난 연령대별로 추석의 중력을 견디는 사람들의 하루를 들여다본다. 그것은 곧 내 미래의 모습일지도 모른다.

'중력'을 대하는 자세

20대 자취생은 중력을 아직 완전히 컨트롤하지 못하는 것 같다. 무척이나 강력하게 끌어당기거나, 전혀 끌어당겨지지 않거나. 바꿔 말하면 아예 밖으로 나가버리거나, 아예 집에 있거나. 둘 중에 하나다. 그들은 넘치는 힘을 주체하지 못하는 분자처럼 전세계를 돌아다닌다. 흔치 않은 긴 연휴기에 제주도나 유럽을 가기도 하고, 한적함을 틈타 헬스장에서 운동을 실컷 하기도 한다. 서비스업을 하는 친구는 수당을 노리고 풀근무를 뛴다.

명절은 좀처럼 이들을 묶어놓을 수 없다. 그들에게 명절은 책임보단 기회다. 대신 부모님에게도 그들만의 효도를 한다. 두분만의 오붓한 여행을 보내드리거나, 해외에서 돌아올 때 희귀한 디저트를 사오기도 한다. 조부모님들이 하나둘 계시지 않게 되면서 책임의 중력이 사라진 부모님이 허전하지 않도록 새로운 명절을 보내는 방법을 알려준다. 그들의 역동적인 힘은 여지껏 상상치 못했던 광경을 기성세대에게 보여주고 있다.

40, 50대 자취생은 중력을 적당히 이용할 줄 아는 우주인같다. 사회와 개인 속에서 타협점을 찾고, 적당히 유람한다. 사촌언니는 40대 후반에 접어드는 비혼자다. 얼마 전 사촌오빠의 결혼식이 있었다. 단연 주인공 부부만큼이나 주목받은 것은 그녀였다. 아마 이전에도 결혼 안 하냐는 질문을 수도 없이 받아왔을 것이다. 그녀는 쏟아지는 잔소리에 질린 내색을 하지 않았다. 대신 "난 혼자 사는 게 좋아요"라며 어깨를 으쓱인다. 그녀는 아이를 사랑하는 유치원 선생님이다. 명절 전까지도 유치원을 지키며 아이들과 함께 엽전을 만들고, 윷놀이를 가르쳐준다.

또다른 워커홀릭 50대 남성도 있다. 아버지는 명절마다 대학후배인 그의 자취방에 들른다. 역시나 미처 돌리지 못한 빨랫감과 뜯지 않은 택배상자가 고이 모셔져 있다. 명절에도 그는 여전히 바쁘다. 주말에도 회의에 여념이 없다. 하루정도 시간을 내어 지방에 홀로 계신 어머니를 보러 내려간다. 어머니는 이참에 내려와 같이 살자고 말한다. 하지만 그는 고개를 젓는다. 스스로의 힘으로 일궈낸 둥지를 쉽게 버릴 수는 없다. 그에게 '명절'은 평소와 같은 날일 뿐이다. 그들은 삶과 개인이라는 중력 속에서 적당히 버티는 방법을 알아냈다.

'70대 자취생' 이야기
 
노인의 손.
 노인의 손.
ⓒ Alexas Fotos /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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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 80대 노인 중에도 물론 1인가구가 있다. 이번만큼은 그들을 독거노인이 아니라 자취생이라고 부르고 싶다. 우리 할머니는 혼자 생활을 꾸리신다. 그들은 강력한 중력을 원한다. 달 너머만큼이나 멀리 있는 가족들을 끌어당기고픈 마음이 한가득이다. 허리 한 번 못 피고 전을 부치는 명절부터, 코로나를 기점으로 고요한 명절까지 모두 겪은 그들이지만 어쩐지 이번 추석은 유독 허전하다. 자신만큼이나 몸이 성치않아진 자녀들 걱정에 고민이다.

우리 할머니는 누구보다도 분주한 추석을 보낸다. 시장에 가서 외상값도 치르고, 연휴 전에 치과도 다녀오시고, 자녀들에게 배도 한 상자씩 보낸다. 먹을 사람 없다며 손사래 치는 자식들의 핀잔에 맘이 상하기도 한다. 이번 추석에도 거리를 핑계로 가지 못한 나는 할머니께 전화를 건다.

"할머니. 저번에 홈쇼핑에서 보셨다는 김치요. 5kg 보냈어요. 드셔보시고 맛있으면 더 말씀하셔요."

심심한 위로와 안부가 담긴 김치에 할머니는 울먹거린다. 마치 외로운 행성에서 홀로 살아있는 우주인에게 구호품을 보내 듯, 난 할머니를 잊지 않고 있다는 작은 증거를 보낸다.

할머니는 어찌 보면 내가 아는 사람 중에 가장 독립적인 어른이다. 난 당신의 삶을 쓸쓸하게만 바라보고 싶지 않다. 그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의 발걸음을 내딛고 있기 때문이다. 그 모습에서 내 미래가 어렴풋이 겹쳐보인다. 영화 <인터스텔라> 속 만 박사는 브랜드 교수가 생애 내내 외우던 시를 되짚는다. "순순히 어두운 밤을 받아들이지 마오. 노인들이여, 저무는 하루에 소리치고 저항해요. 분노하고, 분노해요. 사라져가는 빛에 대해." 지금도 어디선가 살아있다는 생존신호가 여러 행성에서 들린다.
 
보름달.
 보름달.
ⓒ john ko /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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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도 차면 기운다. 처음엔 어려웠던 개인적인 삶이 이제는 너무나도 익숙하다. 혼영, 혼밥, 혼술. 그 무엇 하나 어렵지 않다. 하지만 지나치게 자연스러워진 나머지, 왠지 외롭고 허전한 마음이 든다.

주변인들을 돌아보고, 명절다운 명절이 무엇이었는지를 되짚어본다. 어디 하나 부족한 것 없이 차오른 보름달은 추석이 지나면 다시 손톱 모양의 그믐달로 기울 것이다. 평소 남부러울 것 없이 유랑하는 삶을 살았다면, 이번 명절만큼은 중력이 끌어당기는 대로 끌려다녀보는 것은 어떨까.

태그:#추석, #독거노인, #1인가구, #1인가구명절, #1인가구추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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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갑습니다. 정누리입니다. snflsnfl835@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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