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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파스트에 도착하고 다음날 아침, 일찍 거리에 나섰습니다. 단지 산책을 하러 나섰을 뿐인데, 거리의 분위기가 어째 들떠 있었습니다. 거리 곳곳에 무지개 깃발이 걸려 있습니다. 성소수자를 상징하는 '프라이드 깃발(Pride Flag)'입니다.

트랜스젠더를 상징하는 프라이드 깃발도 곳곳에 있습니다. 원래 유럽의 도시에서 프라이드 깃발을 보는 것은 어렵지 않은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벨파스트에서는 어쩐지 그 수가 한참 많다고 느꼈습니다.

아침을 먹으며 혹시나 하는 마음에 검색을 해 봤습니다. 맞더군요. 벨파스트 프라이드 퍼레이드가 이루어지는 날이었습니다. 식당의 직원들이 분주해 뒤를 돌아봤습니다. 큰 테이블 위에 무지개 깃발을 깔고 있었습니다. 일정을 급히 변경해, 오전 중에 일정을 소화하고 오후에는 프라이드 퍼레이드에 합류하기로 결정했습니다.
 
퍼레이드 당일 아침의 거리
 퍼레이드 당일 아침의 거리
ⓒ Widersta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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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에서는 여러 번 퀴어문화축제와 퀴어퍼레이드에 참여했었습니다. 하지만 당연히 외국의 프라이드 퍼레이드에 참여해 본 적은 없었습니다. 굳이 일정을 맞춰 가지 않는 이상, 우연히 외국의 퍼레이드와 마주치기는 쉽지 않은 일이니까요. 그런데 그런 우연이 일어났으니, 참석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서울에서는 주로 광장에서 부스를 차리고 행사를 진행하죠. 광장 행사가 마무리되면 서울 도심을 한 바퀴 행진하고 광장으로 돌아오는 퍼레이드가 진행됩니다. 하지만 벨파스트의 퍼레이드는 조금 달랐습니다.

퍼레이드가 시작된다는 퀸스 스퀘어에 조금 일찍 도착했습니다. 하지만 부스 같은 것은 없었습니다. 사람도 그리 많지 않았습니다. 생각해보니 서울과 벨파스트는 그 규모가 비교도 되지 않는 도시였습니다. 서울의 인구는 1천만에 달하지만, 벨파스트의 인구는 30만에 불과하니까요. 그 차이를 잊었다고 생각하며 애써 실망감을 감춰 보려 했습니다.
 
퀸스 스퀘어에 모인 사람들
 퀸스 스퀘어에 모인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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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행진이 시작되자 달랐습니다. 이곳에서는 광장에서의 행사보다는 퍼레이드가 더 중심이 되는 모양이었습니다. 퍼레이드가 시작되자 어디서 왔는지 모를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합니다. 행진의 규모도 서울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컸습니다. 서울에서는 차량 10여 대를 이용해 퍼레이드를 진행하지만, 이곳에서는 수십 대 이상의 차량이 동원되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물론 참여하는 단체도 다양했습니다. 인권 단체가 참여하는 것은 한국과 같았습니다. 하지만 벨파스트에서는 여러 대기업도 차량을 동원해 행진에 참여했습니다. 이케아, 테스코, 세인즈버리를 비롯해 익숙한 이름들이 여럿 보였습니다.
 
벨파스트 시의회 차량
 벨파스트 시의회 차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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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공서도 행진에 공식적으로 참가하고 있었습니다. 시의회나 소방청, 경찰청, 우체국과 시립 도서관까지 행진에 함께했습니다. 행진 대열을 경호하는 경찰차에도 무지개색 장식이 붙어 있었습니다.

행진 대열을 따라 걸으며, 서울을 생각했습니다. 올해 서울 퀴어퍼레이드는 서울광장에서 열리지 못했습니다. 서울시가 서울광장의 사용을 불허했기 때문입니다. 결국 서울 퀴어퍼레이드는 을지로로 자리를 옮겨 치러져야 했습니다. 같은 날 서울광장에서는 기독교 단체의 행사가 진행되었습니다.

시 당국에서 퀴어퍼레이드를 막는 서울과, 시 당국이 퀴어퍼레이드에 직접 참여하는 벨파스트. 두 도시 사이의 거리는 어쩐지 아주 먼 것만 같습니다.
 
프라이드 퍼레이드에 함께한 소방차
 프라이드 퍼레이드에 함께한 소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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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파스트의 행진이 서울의 행진과 다른 점은 또 하나 있었습니다. 서울을 비롯한 한국의 퀴어문화축제에는 언제나 '맞불 집회'가 열리죠. 늘 퀴어문화축제의 반대편에는 성소수자를 혐오하는 세력이 있습니다.

하지만 벨파스트의 행진에서는 물론 혐오세력을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영국의 '평등법(Equality Act)'에서는 성적 지향에 대한 차별을 분명하게 금지하고 있으니까요. 영국 뿐 아니라 유럽의 대부분 국가가 그렇습니다.

한국에는 혐오세력의 집회가 퀴어퍼레이드를 더 신나게 만들어 준다는 자조적인 농담도 있습니다. 하지만 혐오와 차별의 목소리가, 성소수자로서의 자긍심을 위해 행진에 참여하는 시민들에게는 상처가 될 것도 분명합니다.

2018년 인천퀴어문화축제에서는 혐오세력이 퀴어퍼레이드에 난입해 참가자에게 폭력을 휘두르는 사태도 발생했습니다. 올해 대구 퀴어문화축제에서는 아예 대구시 측에서 공권력을 동원해 행사를 막아세우려 했죠. 대구시의 공무원과 경찰이 충돌하는 사태까지 벌어졌습니다.
 
벨파스트 시청 앞을 지나는 퍼레이드
 벨파스트 시청 앞을 지나는 퍼레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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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파스트의 프라이드 퍼레이드는 어느새 벨파스트 대성당 앞을 지나고 있었습니다. 성당에서는 결혼식이 진행되는 모양이었습니다. 막 결혼식을 마치고 나온 신랑과 신부는 지나가는 퍼레이드 대열에 손을 흔들어 인사를 건넵니다. 군중은 축하한다는 말로 화답합니다.

이 도시의 시민 모두가, 퍼레이드에 함께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폭력과 혐오에 맞서야 하는 한국의 퀴어문화축제와, 평화로운 벨파스트의 행진. 다시 또 두 도시 사이의 거리감을 생각하게 하는 순간이었습니다.
 
결혼식 앞을 지나는 프라이드 퍼레이드
 결혼식 앞을 지나는 프라이드 퍼레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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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벨파스트에도 성소수자를 향한 혐오와 차별의 목소리는 있을 것입니다. 북아일랜드는 사실 아주 진보적인 곳이라 할 수도 없습니다. 북아일랜드는 영국에서 가장 늦게 동성결혼을 법제화한 곳이니까요. 2005년에 시민 결합이 허용되었고, 2020년에야 동성결혼이 법제화되었습니다.

이 행진을 부정적으로 보는 사람들도 남아 있겠죠. 행진이 시작되기 몇 시간 전, 거리의 화단 하나하나까지 유심히 확인하는 경찰의 모습도 저는 보았습니다. 혹시 모를 테러의 위협을 차단하기 위해서였을 것입니다.

모두에게 성소수자가 환영받을 리는 없습니다. 하지만 이곳에서는, 최소한 그것을 드러내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퍼레이드의 건너편에 북을 치며 혐오의 목소리를 내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저는 그것이 아주 큰 차이라고 생각합니다.
 
벨파스트 시청에 걸린 프라이드 깃발
 벨파스트 시청에 걸린 프라이드 깃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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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아일랜드는 오랜 기간 갈등의 땅이었습니다. 가톨릭과 성공회가, 아일랜드와 영국이, 민족주의와 연합주의가 갈등하는 전쟁터였습니다. 상처와 갈등, 분쟁과 배제의 역사를 가진 도시였습니다.

그러나 그 분쟁의 역사를 지나온 지금, 벨파스트의 시민들이 낸 결론이 이 퍼레이드와 함께하고 있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서로 다른 사람에 대한 관용과 이해만이, 세상을 앞으로 나가게 할 수 있다는 것이, 그들이 낸 결론이 아니었을까요.

벨파스트 시청에는 언제나 영국 국기가 걸립니다. 하지만 오늘은 시청 위, 무지갯빛 프라이드 깃발이 걸려 있습니다. 시청 위에 걸린 성소수자의 깃발이, 이 도시에 살고 있는 소수자에게 줄 수 있는 위로와 힘을 생각합니다. 모두에게 줄 수 있는 위로가, 이 도시가 만들어낸 오늘의 모습이었습니다.

덧붙이는 글 | 본 기사는 개인 블로그, <기록되지 못한 이들을 위한 기억, 채널 비더슈탄트(CHwiderstand.com)>에 동시 게재됩니다.


태그:#세계일주, #세계여행, #영국, #벨파스트, #퀴어퍼레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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