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런던에서 기차를 타고 네 시간을 넘게 달렸습니다. 오후가 되어 도착한 곳은 스코틀랜드의 수도, 에든버러입니다.

영국은 잉글랜드, 웨일스, 스코틀랜드, 그리고 북아일랜드로 구성된 연합 왕국입니다. 영어로도 연합 왕국(United Kingdom), 줄여서 UK라고 부르죠. 영국을 구성하는 네 지역은 모두 정치적, 역사적으로 다른 경험을 가지고 있습니다. 특히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의 경우에는 그 대조가 더욱 분명합니다.
 
에든버러 로얄 마일
 에든버러 로얄 마일
ⓒ Widersta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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웨일스의 경우, 이미 13세기부터 잉글랜드의 침략을 주기적으로 받았습니다. 16세기가 되면 잉글랜드 왕국에 완전히 병합되죠. 북아일랜드의 경우도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이미 12세기부터 명목상으로나마 잉글랜드의 아일랜드 지배가 시작되었죠.

하지만 스코틀랜드의 경우 그 궤적이 달랐습니다. 스코틀랜드와 잉글랜드는 오랜 기간 전쟁을 거듭해 왔습니다. 하지만 스코틀랜드 왕국은 잉글랜드 왕국과는 별개로 존재하는 독립된 왕국이었죠. 17세기 초엽까지 그랬습니다.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가 통합된 과정도 예상과는 조금 다릅니다. 1603년 영국의 왕 엘리자베스 1세가 후사 없이 사망한 것이 계기였죠. 당시 엘리자베스 1세의 가장 가까운 친족은 스코틀랜드의 왕인 제임스 6세였습니다. 당시 유럽에는 왕가 사이의 통혼이 자주 이루어졌으니까요.

덕분에 스코틀랜드의 왕 제임스 6세는 잉글랜드의 왕을 겸하게 되었습니다. 잉글랜드 왕국과 스코틀랜드 왕국이 같은 왕을 모시는, 동군연합이 된 것입니다.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의 연합은 그렇게 처음 시작되었습니다.

웨일스는 16세기에 이미 잉글랜드 왕국에 완전히 병합된 상태였습니다. 아일랜드는 잉글랜드 왕이 아일랜드 왕을 겸하는 형태를 갖추긴 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잉글랜드의 식민 지배였음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었죠.

하지만 스코틀랜드의 경우는 달랐습니다. 한 왕가의 후사가 단절되며 만들어진 연합이었으니까요. 무엇보다 스코틀랜드계의 왕이 잉글랜드에 와 국왕을 겸하는 상황이었습니다. 과장해서 말하자면, 스코틀랜드의 잉글랜드 통합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지요.
 
에든버러 시내와 에든버러 성의 모습
 에든버러 시내와 에든버러 성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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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유럽 대륙과 가까운 평야 지대에 위치한 잉글랜드의 농업 생산력은 압도적이었습니다. 반면 스코틀랜드는 주로 산악 지형으로 이루어져 있었고, 지방 세력의 힘도 강한 편이었죠. 제임스 6세는 잉글랜드의 왕이 되자 런던으로 내려가 머물렀습니다. 왕가의 후계가 이어지면서 런던에 거주하는 국왕과 스코틀랜드의 동질성도 옅어져만 갔습니다.

1638년, 스코틀랜드와 잉글랜드 사이에는 내전이 벌어지기도 했죠. 그 사이 잉글랜드에서는 청교도 혁명이 벌어졌고, 스코틀랜드도 정치적 혼란에 휘말렸습니다. 결국 1707년, 연합법이 통과되며 스코틀랜드와 잉글랜드는 완전히 통합된 하나의 국가를 이루게 됩니다. 그렇게 탄생한 것이 '그레이트 브리튼 연합 왕국'이었습니다.
 
에든버러 시내
 에든버러 시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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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합 왕국이 성립한 뒤에도 스코틀랜드의 자치와 독립을 위한 목소리는 항상 존재했습니다. 그러나 스코틀랜드의 강력한 자치권이 제도적으로 보장된 것은 그리 오래된 일은 아닙니다.

1707년 연합법과 함께 스코틀랜드 의회는 사라졌습니다. 스코틀랜드 의회가 다시 만들어진 것은 300여 년이 지난 1999년의 일이었죠. 1997년 스코틀랜드 의회의 건설에 대한 주민투표가 진행되었고, 스코틀랜드 주민 74%의 동의를 받아 의회가 재건된 것입니다. 그리고 이 의회에서 스코틀랜드 자치정부를 구성하게 되었죠.

스코틀랜드 자치정부는 스코틀랜드 안에서 광범위한 권한을 가지고 있습니다. 보건과 교육, 사법, 교통, 환경, 경찰, 농업, 주거 문제를 관할하죠. 지방정부의 세수 보장을 위해 소득세와 부동산 거래세, 토지세 등을 자치정부에서 징수합니다. 중앙정부는 외교, 국방, 이민, 통화 정책 등 거시적인 문제만을 책임지고 있습니다.
 
스코틀랜드 자치의회
 스코틀랜드 자치의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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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코틀랜드 자치의회의 의사당은 영국 국왕이 머물곤 하는 홀리루드 궁전 맞은편에 있습니다. 의사당 내부는 특별한 일이 있지 않으면 방문객을 위해 개방되어 있습니다. 간단한 보안 검색만 통과하면 모두들 의사당 내부에 들어가볼 수 있죠.

의사당 내부는 의회라기보다는 지역의 커뮤니티 시설에 가까운 모습이었습니다. 작은 카페에서 시간을 보내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방문객을 위한 작은 전시실도 있었습니다. 회의실은 누구에게나 공개되어 있었습니다. 회의가 진행될 때에도, 휴대폰 사용을 통제하는 것 말고는 특별한 제재 없이 모두들 자유롭게 회의를 방청할 수 있는 듯 보였습니다.

경직되고 삼엄한 의회의 모습을 생각했던 제 예상과는 완전히 다른 모습이었습니다. 어쩌면 지방의회가 누릴 수 있는 특권이겠지요. 지역의 시민들과 가까이에서 호흡할 수 있는 것. 지역 주민들을 얼마든지 의사당 안으로 초청할 수 있는 것. 특별한 절차나 까다로운 검문도 필요 없이, 누구든지 자유롭게 지역의 정치 현장을 참관할 수 있는 것.
 
스코틀랜드 자치의회 본회의장
 스코틀랜드 자치의회 본회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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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이들 기억하다시피, 스코틀랜드는 2014년 연합왕국에서 탈퇴할 것인지를 묻는 주민투표를 치렀습니다. 55%의 주민들이 연합 왕국에 잔류하는 길을 택했고, 결국 연합 왕국의 해체는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벌써 9년 전의 일입니다. 하지만 지역 주민들이 삼삼오오 모여든 스코틀랜드 자치의회의 의사당 안에서, 저는 왠지 그 9년 전의 투표를 떠올렸습니다.

만약 그때 스코틀랜드가 독립을 결정했다면 어땠을까요. 이곳은 아마 스코틀랜드라는 국가의 국회가 되어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지금처럼, 사람들이 이 의사당 안을 자유롭게 오가며 스코틀랜드의 정치 현장을 마주할 수 있었을까요?
 
스코틀랜드 자치의회 내부
 스코틀랜드 자치의회 내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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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코틀랜드는 잉글랜드와 다른 역사를 걸어왔습니다. 물론 국경을 접한 인접국으로서 오랜 교류가 있었지만, 그것이 꼭 긍정적인 교류만은 아니었으니까요. 사실 과거 스코틀랜드는 영어와는 완전히 다른, '스코틀랜드 게일어'라는 언어를 사용했었죠. 현재 스코틀랜드에서 사용하는 영어 역시, '스코트어'라는 별도의 언어로 구분하기도 합니다. 그만큼 많은 차이를 가진 땅이었습니다.

그러니 스코틀랜드와 잉글랜드라는 두 국가의 연합은, 어쩌면 그저 브리튼 섬이라는 영토를 매개로 만들어진 이질적인 조합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 연합 왕국은 수백 년을 존속해 왔고, 지금까지도 스코틀랜드의 시민들은 연합 왕국을 이어가는 길을 택했습니다.

스코틀랜드 자치의회 안에서, 저는 이 연합 왕국이 존속되는 힘을 알 것 같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이 연합 왕국이 만들어낸 묘한 균형이 있다고 느꼈기 때문입니다. 스코틀랜드라는 국가의 국회가 아니라, 스코틀랜드라는 지방의 자치의회이기 때문에 할 수 있는 일들이 분명히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에든버러의 언덕길
 에든버러의 언덕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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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치의회이기 때문에 할 수 있는, 지역의 주민과 밀착된 정치. 자유롭게 의사당을 오가며 함께 호흡할 수 있는 정치. 국회가 아니라 자치권을 가진 지방정부이기 때문에 할 수 있는 더 많은 역할이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스코틀랜드의 시민들은 그 효용을 분명히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게다가 연합 왕국의 중앙정부는 당당하게 투표로 독립의 가부를 물었습니다. 그리고 투표를 통과한 연합 왕국은, 더 떳떳한 정당성을 가지고 존속할 수 있었습니다. 그것 역시 이 연합 왕국이 존속할 수 있는 이유일 것이라 생각합니다.

자치의 힘과 중앙정부의 정통성. 연합 왕국은 이 두 날개를 가지고 날고 있습니다. 그리고 어느 한 날개가 꺾이지 않는 한, 연합 왕국의 미래도 그리 손쉽게 분열을 맞지는 않을 것입니다.

덧붙이는 글 | 본 기사는 개인 블로그, <기록되지 못한 이들을 위한 기억, 채널 비더슈탄트(CHwiderstand.com)>에 동시 게재됩니다.


태그:#세계일주, #세계여행, #영국, #스코틀랜드, #에든버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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