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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이프타운에서는 유럽으로 향하는 비행기편을 검색했습니다. 의외로 가장 가격이 싼 항공편은 가장 거리가 먼 영국으로 향하는 편이었습니다. 큰 고민 없이 런던으로 향하는 비행기에 올랐습니다.

아프리카 여행을 조금 더 계속하고 싶은 마음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아프리카 내에서의 항공 이동은 가격이 비쌉니다. 케이프타운에서 나이로비로 가는 비행기보다, 더 먼 런던으로 가는 비행기를 오히려 싸게 구할 수 있었으니까요. 아마 수요의 문제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결국 아프리카 여행은 짧게 마치기로 했습니다.

가격이나 일정 문제와 함께, 런던으로 가는 비행기를 기꺼이 탑승했던 것에는 다른 이유도 있었습니다. 런던은 저의 첫 배낭여행지였거든요. 그곳으로 다시 돌아간다는 사실에 기분이 들떴습니다.
 
프랑크푸르트 공항에서 환승해 런던에 도착했다.
 프랑크푸르트 공항에서 환승해 런던에 도착했다.
ⓒ Widersta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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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써 7년 전입니다. 2016년 2월에 영국과 아일랜드를 여행했습니다. 가족 여행이나 수학 여행이 아니라, 혼자 배낭을 메고 떠난 여행은 처음이었죠. 아무런 주저 없이 여행지로 고른 곳이 영국이었습니다. 열흘 남짓의 여행이었지만, 제게는 한 순간 한 순간이 또렷이 기억에 남는 날들이었습니다.

프랑크푸르트 공항에서 비행기를 환승해 런던에 도착했습니다. 런던에는 여느 때와 같이 부슬비가 내렸습니다. 기차를 타고 시내로 나가야 했습니다. 철도 파업으로 인해 열차의 배차 간격이 길어질 수 있다는 안내문이 붙어 있었습니다.

런던에 돌아온 저를 맞아준 것은 비와 파업이었습니다. 그것이야말로 참 영국다운 일이었습니다. 30여 분을 기다린 끝에 기차를 타고 시내로 들어왔습니다.
 
비가 오는 런던
 비가 오는 런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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런던에서는 여유 있게 시간을 보냈습니다. 가보고 싶었던 곳은 이미 지난번 여행에 모두 다녀왔으니까요. 굳이 바쁘게 일정을 소화할 이유가 없었죠. 천천히 공원을 산책하거나, 카페에 앉아 커피를 마셨습니다.

많은 곳이 그대로였습니다. 저는 7년 전과 같은 숙소에 묵었습니다. 달라질 것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하이드 파크에는 여전히 사람들이 조깅을 합니다. 호수에는 배를 띄워두고 유람을 즐기고 있습니다. 개와 함께 산책을 나온 사람들이 많습니다.

버킹엄 궁전 앞 분수대에는 여전히 황금색의 동상이 빛납니다. 빅 벤은 15분마다 종을 울리고, 웨스트민스터 옆에는 템즈 강이 흐릅니다. 트라팔가 광장에는 높은 넬슨 제독 기념탑이 서 있습니다. 심지어 내셔널 갤러리는 7년 전과 같은 곳을 공사하고 있었습니다. 1800년대의 런던을 걸어도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이라, 상상해 봤습니다.
 
트라팔가 광장의 넬슨 기념탑
 트라팔가 광장의 넬슨 기념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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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또 많은 것이 달라져 있었던 것도 사실이었습니다. 7년 전, 조용한 저녁 무렵의 공항에서 홀로 입국 심사를 받던 긴장된 순간을 기억합니다. 하지만 2019년부터 한국인은 영국 입국 시 자동 출입국 심사가 가능해졌습니다. 이번에는 여권에 도장 하나 찍지 않고 영국에 입국했습니다.

빅 벤의 종은 울리고 있었지만, 그간 5년 여에 걸친 수리를 받았습니다. 그 사이에는 물론 종도 울리지 않았죠. 버킹엄 궁은 그대로 있었지만, 궁전의 주인은 바뀌었습니다. 제가 여행하던 때의 영국 총리는 데이비드 캐머런이었습니다. 그 사이 총리도 네 번이나 바뀌었습니다.

7년 전 영국은 아직 유럽연합의 일원이었습니다. 브렉시트라는 단어는 알려지기도 전이었죠. 코로나19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지난 7년 사이 영국은 브렉시트와 코로나19라는 연이은 혼란을 겪어야 했습니다.

치솟은 물가는 아마 그 결과물일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식당이나 카페 메뉴판 앞에서 실소를 내뱉은 경험이 여러 번이었습니다. 영국은 40년 만에 최고 수준의 인플레이션을 경험하고 있으니까요.
 
웨스트민스터 궁전
 웨스트민스터 궁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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런던에 도착하며, 문득 7년 전 여행의 한 장면이 떠올랐습니다. 벌써 해가 어둑하게 질 무렵, 타워 브릿지를 보기 위해 템즈강 인근으로 나갔습니다. 늘 사진으로만 보던 다리가 제 눈 앞에 서 있더군요.

늘 사진으로만 보던 것들이, 제 눈 앞에 실체로 존재하는 순간. 어떻게든 그 장면을 눈에 오래 담아두고 싶었습니다. 강변을 꽤 오래 서성거렸습니다. 저는 그 순간을, 그 뒤로도 제가 여행을 계속하게 된 이유가 된 순간 중 하나로 기억합니다.

사람이 많지 않은 겨울 밤이었습니다. 다리를 한참 바라보고 있자니, 제 옆에 어느 청년 두 명이 섰습니다. 미국인 같았습니다. 한참이나 함께 서 다리를 바라보았습니다. 꽤 오랜 침묵이 흐른 뒤, 그들 중 한 명이 탄식처럼 내뱉은 말을 기억합니다.

"It's London!"
 
타워 브릿지의 밤
 타워 브릿지의 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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잇츠 런던. 왜 그 말이 7년 뒤 문득 기억에 스쳤을까요.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런던을 산책하며 내내 그 말을 머릿속으로 떠올렸습니다. 아름다운 공원에서도, 주인이 바뀐 궁전 앞에서도, 식당의 가격표 앞에서도. 그래, 여기가 런던이지, 하면서 말이죠.

도시의 풍경은 아무 것도 변하지 않은 것 같았습니다. 오래된 건물은 벽돌 한 장 달라지지 않은 채, 여전히 그 자리에 서 있었습니다. 하지만 또 많은 것이 변해가는 곳이 런던이었습니다. 사람도, 정치도, 역사까지도, 7년의 시간을 함께 지내 온 도시였습니다.

그간 런던의 시민들이 지내온 시간은 썩 밝다고만은 할 수 없었습니다. 많은 고통을 감내해야 하는 시기였죠. 런던뿐 아니라 세계의 모든 사람들이 그랬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 무엇도 변할 것 같지 않았던 이 도시에서는, 지나온 시간이 오히려 눈에 띄게 돋보이는 것만 같습니다. 여기는 런던이니까요.
 
템즈 강의 야경
 템즈 강의 야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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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몇 년 뒤에 런던에 돌아오게 될지 모르겠습니다. 그때의 런던은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요. 그때에도 이 도시는 아무 것도 변하지 않은 것 같겠죠. 그러나 또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 사이 많은 것을 바꾸어낸 사람들이 이곳 런던에 살고 있다는 사실을요.

이 도시에 다시 돌아올 날을 그려 봅니다. 그때에도 늘 같은 비와 늘 같은 파업이 저를 맞아줄지 모르겠습니다. 다만 그때도 골목 한 바퀴를 돌고 나면, 지금처럼 유쾌하게 런던에 인사를 건넬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It's London! 여기가 런던이지, 하는 인사를요.

덧붙이는 글 | 본 기사는 개인 블로그, <기록되지 못한 이들을 위한 기억, 채널 비더슈탄트(CHwiderstand.com)>에 동시 게재됩니다.


태그:#세계일주, #세계여행, #영국, #런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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