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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인물이 조·중·일 삼국의 '국책사업'으로 제거의 대상이 된 적은 일찍이 없었다. 김옥균이 처음이다. 조선에서는 반역의 수괴로, 일본에서는 조·중과의 외교분쟁의 요인으로, 청국에서는 친일반청주의자로 각각 낙인하고 있었다.  

일본의 방조없이 김옥균이 청국으로 떠날 수 있었겠는가. 결코 그럴 수는 없었을 것이다. 일본 정부는 이미 1885년에 김옥균을 청국으로 보내 그곳에서 죽게 함으로써 일본에 대한 비난 여론을 면하고 청국에 모든 책임을 전가시키려는 계획을 비밀리에 준비하기도 했다. 그런데 당시 여론이 좋지 않자 이를 보류할 수밖에 없었다.

1889년에도 서울주재 일본공사가 김옥균을 외국으로 보내야 한다는 의견을 제시했었다. 이처럼 일본으로서는 그가 매우 거추장스러운 존재였다. 일본은 김옥균을 더 이상 동반자로 생각하지 않았다. 일본의 고민은 김옥균이 상하이행을 결심하자 자연스럽게 해결되었다. 이를 증명하듯이 일본 정부 차원에서 그의 청국행을 막았다는 기록은 전혀 찾아볼 수 없다. (주석 4)

청국의 입장에서도 김옥균이 일본에 오래 있음으로 해서 앞으로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기 때문에 자의든 타의든 김옥균을 없애버리는 것이 유익하다고 판단했다. 그렇게 해서 청국은 크게 힘들이지 않고 조선에 대한 청국의 영향력을 강화하겠다는 심산이었다. 다만 국제적인 여론을 고려하여 직접 암살에 가담할 수 없었기 때문에 암살 주체는 조선 정부에 맡기고 자신들은 조연만 맡겠다는 것이었다. (주석 5)

김옥균은 주위에서 청국행의 위험성을 들어 말리는 사람들에게 예의 '호랑이굴'론을 피력하면서 강행한다. "청국에 가서 이홍장과 이경방을 만나 동양의 정세를 논의하면 반드시 적년(積年)의 궁망(窮望)을 달성할 수 있을것" (주석 6)이란 인식이었다. 

1894년 3월 11일 김옥균은 중국인 우포진(吳葆仁)과 일본인 와다 엔지로(和田延次郞) 및 조선인 홍종우(洪鍾宇)와 함께 도쿄 신바시발 오사카행 열차를 탔다.

그로서는 수년 전 동경주재 청국공사로 근무한 바 있는 이경방의 초청으로 상하이를 거쳐 무호(蕪湖, 이경방의 실가)로 가기 위한 첫 출발이었다.

우포진은 그의 중국어 통역 겸 안내였고, 와다(和田)는 김옥균이 오가사와라도 유배시절부터 그를 아버지처럼 따라다니던 일본인 종복이었다. (주석 7)

그러면 김옥균 암살범인 홍종우는 누구이고, 왜 청국행의 동행자가 되었는가. 

개화사상가 김옥균은 일본이 미국과 영국을 모델로 근대화를 이룬데 비해 프랑스식의 모델로 조선을 근대화시키고자 하였다. 무슨 악연이랄까, 그를 암살한 홍종우는 조선 최초의 프랑스 유학생 출신이다. 38세의 늦은 나이에 프랑스로 유학한 것은 자유민권 사상에 심취해서였다고 한다.

파리에 머무는 동안 <춘향전>, <심청전> 등 한국의 고전을 불어로 번역하고 사상가 볼테르를 연구했다. 유학 기간 중 한복을 입고 다녔다. 프랑스 체류를 마친 그는 1893년 여름 일본으로 돌아왔다. 그 무렵 일본에는 민씨척족 중 가장 강경파인 민영소의 밀명으로 이일직 등이 무역상을 가장하고 김옥균의 암살을 모의하고 있었다. 

생계가 어려웠던 홍종우는 이일직과 연계되었다. 고종의 밀지를 받아 김옥균과 박영효의 암살을 준비 중이던 이들은 홍종우를 참여시켰다. 

홍종우는 자신이 개화파 홍영식의 집안이며, 프랑스에서 유학을 마치고 귀국중이라고 개화엘리트를 자처하며 김옥균과 접근하였다. 

홍종우는 자신이 홍영식과 같은 집안이며, 그와 매우 친했다고 말하면서 김옥균, 박영효 등에게 자연스럽게 접근했다. 실제 두 사람은 모두 남양 홍씨 남양군파로 어느 정도 친척 관계가 있었다. 홍종우는 어머니의 원수를 갚지 못하고, 늙은 아버지를 외딴 섬에 은닉시키고 망명했다면서 김옥균의 감정에 호소했다. 프랑스에서의 경험을 설명하고, 조선의 현실을 통탄하며 개화 정책만이 살 길임을 역설하기도 했다. 그는 자신의 계획을 여덟 개 조항으로 펼쳐 보였다.

즉 일본 군함을 얻어오면 조선은 외세에 맞설 수 있고, 또 조선 내부에서 응하여 서로 도와 파죽지세로 "1. 장안에 들어가 2. 어머니의 원수를 갚고 3. 권세가와 귀족을 모두 멸하고 4. 개화로 몸을 보호하고 5. 부귀를 누리며 6. 이름을 후세에 전하고 7. 기강을 세우고 8. 갑신년의 분함을 통렬히 설욕한다는 목적을 달성할 수 있다"고 말했다. 이 여덟 개 조항은 대장부 한평생을 바칠 쾌자로써 바다를 건널 때 명심했다면서 만약 뜻을 이루지 못하면 귀국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보여 김옥균의 마음을 끌었다. (주석 8)


주석
4> 조재곤, <그래서 나는 김옥균을 쏘았다>, 105쪽, 푸른역사, 2005.
5> 안승일, 앞의 책, 225쪽.
6> <동경조일신문>, 1894년 6월 19일자.
7> 김영작, 앞의 책, 270쪽.
8> 조재곤, 앞의 책, 96~97쪽.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인물열전 - 혁명가인가 풍운아인가, 김옥균 평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태그:#김옥균, #김옥균평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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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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