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했던가. 내 생각은 조금 다르다. 사람은 죽어서 '미(美)'를 남긴다. 때론 그것이 이름보다 강력하다. 인류에게는 '꾸미기'의 DNA가 있다.

고구려인들은 벽꾸(벽화 꾸미기)를, 조선 여인들은 노꾸(노리개 꾸미기)를, 예카테리나 1세는 호박으로 방꾸(방 꾸미기)를 했다. 우리는 가만히 놔둬도 이미 제 역할을 하는 것에 굳이 한 송이의 꽃을 더 얹는다. 진선미(眞善美). 그 중에서 가장 원초적인 것은 뭐니뭐니해도 '미(美)'인 셈이다.

'다꾸' 하던 시절도 있었지
 
다이어리 꾸미기
 다이어리 꾸미기
ⓒ 정누리

관련사진보기

 
그러니 내가 땀 흘려 다이어리를 꾸미는 것도 본능적인 행위다. 우리는 이것을 '다꾸(다이어리 꾸미기)'라고 부른다. 내가 다꾸를 시작한 것은 약 4년 전이었다.

처음엔 단순한 일기였다. 오늘은 뭐 먹었다. 저녁에는 뭘 했다. 활자로 기록하면 그만이었다. 그러나 세상에는 좀 더 쨍한 기억들이 있다. 송곳으로 뇌를 찌른 듯 깊게 박힌 영화의 한 장면이라던가, 남에게 자랑하고픈 하루 루틴이라던가, 몇 십년이 지나도 잊어버리지 않을 것 같은 명언 한 구절이라던가.

기억의 조각에도 크기가 있다. 시간이 지나도 잘게 부서지지 않을 거대한 파편이다. 내겐 그것이 영화 <기생충>이었다. 내가 제일 사랑하는 감독, 봉준호의 작품이었다. 가족들과 3번을 연속으로 용산에서 봤다. 평소라면 잘 가져오지 않는 포스터 한 장도 챙겼다. 그러나 고민이 생겼다. 분명 이대로 놔두면 잃어버릴 것이 뻔하다.

파일에 넣어놓는 것은 내 취향이 아니다. 또다른 방법이 없을까. 일기장에 붙여보자. 콜라주 기법처럼. 송강호도 오리고, 최우식도 오리고, 인물의 얼굴에 수상해 보이는 검은색 직사각형도 붙이고. 하다 보니 내가 감독이 된 기분이 든다. 영화를 내가 느낀 대로 다시 편집한다. 편곡하는 음악가처럼. 그리고 옆에 짧은 감상문을 썼다. 이것이 나의 첫 다이어리 꾸미기였다.

혼자 보기 아까워 SNS에 일기를 몇 장 올렸더니, 친구들이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텍스트보다 강렬한 것이 그림이었다. 점점 유명해지더니 좋아요가 200개를 넘는다. 스티커 협찬도 받았다. '독도 스티커'로 일기를 꾸며줄 수 있냐는 제의도 들어왔다.

흥미로웠다. 나의 사적인 영역이 공적인 활동으로 번질 수 있다는 것이. 다이어리 꾸미기 이웃도 많이 생겼다. 다들 본인의 전문 분야가 있다. 키치, 빈티지, 감성, 캐릭터, 씰스티커 등등. '읽는' 일기도 재밌지만, '보는' 일기는 더 재밌다.

폰꾸 하는 시대가 왔다

안타깝게도 다이어리 꾸미기는 1년 후 잠정 중단했다. 생각보다 짐이 많아졌기 때문이다. 테이프만 50개, 스티커도 쇼핑백 서 너 개, 속지도 정리가 안 돼서 같은 것을 또 살 정도였다. 방이 감당할 수 없이 지저분해졌다. 난 누구나 온다는 '다태기(다이어리 권태기)'를 맞이했다. 재료를 모두 처분했다.

다채롭던 일상이 휘발되고 있을 즈음, 휴대폰이 먹통이 됐다. 너무 오래 써서 배터리가 부풀은 아이폰이었다. 버티고 버티다 전화가 안 들릴 지경이 됐다. 휴대폰을 바꿔야겠다. 사실 감흥은 없어진 지 오래다. 어릴 땐 휴대폰을 구경하러 가는 것이 설렜다. 그땐 개성 있는 디자인이 참 많았다. 고아라폰, 가로본능, 롤리팝. 오렌지폰은 아직도 기억에 강하게 남는다. 세련된 검은색 전면 후면 폴더 사이에 낀 주황색 띠의 슬라이드 폰.

그러나 지금은 아니다. 죄다 해시브라운처럼 생긴 스마트폰. 외관은 거기서 거기고, 능력만 어필하기 바쁘다. 오색찬란하던 어린 시절을 뒤로 하고 앵무새처럼 스펙 자랑하는 어른들을 보는 듯하다.

시큰둥한 표정으로 대리점을 간다. 어라, 특이하게 생긴 폰이 있다. 접었다 피는 영롱한 보라색 스마트폰. 옆에서 휴대폰 모형을 만지던 아저씨 한 분이 "아유. 왜 핀 걸 다시 또 접어. 귀찮게"라며 투덜거린다. 맞다. 시대역행적인 디자인이다. 재밌게도 거꾸로 돌아간 그곳이 내가 원하던 시대다. "이걸로 주세요" 난 큰맘 먹고 접었다 펴는 신상 휴대폰으로 바꿨다.
 
휴대폰 꾸미기
 휴대폰 꾸미기
ⓒ 정누리

관련사진보기


오랜만에 스티커를 사서 휴대폰 겉면을 꾸민다. 알록달록한 음표와 리본 모양이다. 곰돌이 모양의 키링도 두어개 단다. 스마트폰이야말로 항상 손에서 떨어지지 않는 물건이다. 볼 때마다 기분이 좋아질 듯하다. 흡족해진다.

다른 사람들의 '폰꾸(폰 꾸미기)' 결과물도 찾아본다. 똑같은 공장에서 만들어진 제품에 나만의 컬러가 입혀진다. 생각해보면 폰꾸가 처음은 아니다. 어릴 적 폴더폰의 키패드를 뜯은 적이 있었다. 그 위에 셀로판지 포스트잇을 붙이고, 다시 키패드를 조립했다. 거금의 휴대폰을 분해해버린 초등학생이라니. 지금 생각해보면 참으로 과감했다. 영롱한 무지개빛 LED판은 지금도 내 머릿 속에 남아있다.

그 밖에도 무려 12가지 색깔이었던 모토로라, 기분에 따라 케이스 색깔을 바꾸는 애니콜 컬러재킷, 휴대폰에 걸 수 있던 귀여운 액세서리들. 우리는 원래부터 꾸미기의 민족이었다.
 
2018년이었나? 휴대폰 키패드 튜닝했을 때.
 2018년이었나? 휴대폰 키패드 튜닝했을 때.
ⓒ 나우튜닝

관련사진보기

 
찢고, 오리고, 붙이고. '꾸민다'는 것은 굳이 하지 않아도 될 일을 하는 것이다. AI, 자동화 기계, 키오스크 입장에서는 불필요한 행위다. 그러나 그들은 일지는 쓸 지언정 일기를 쓰진 못 할 것이다. 그 속엔 흔적을 남기고픈 사람의 본능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꾸미는 것은 가장 사람다운 행위다. 하지 않아도 될 일을 하는 것. 찬장에 잠들어있던 다이어리를 꺼내본다. 다시 펴는 데까지 4년이 걸렸다. 다시 한 번 일기를 꾸며보려고 한다. 당신은 어떤 것을 꾸밀 것인가. 주저말고 무엇이던 집어보자. 그것은 곧 삶을 꾸미는 일이므로.
 
심플하게 휴대폰 케이스랑 키링을 끼워넣을 때도 있다.
 심플하게 휴대폰 케이스랑 키링을 끼워넣을 때도 있다.
ⓒ 정누리

관련사진보기


태그:#다꾸, #다이어리꾸미기, #폰꾸, #폰꾸미기, #Z플립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반갑습니다. 정누리입니다. snflsnfl835@naver.com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