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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창민간인학살
 거창민간인학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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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전시라는 극한적인 상황에서도 이승만 정권에 의해 자행되는 민간인 학살과 권력형 부정부패에 몸을 사리지 않고 폭로하고 정부를 질타했다. 제주도에서 훈련을 받다가 영양부족과 추위로 두 다리를 못쓰게 된 2명이 찾아와 사정을 호소하면서 진상규명에 나서게 되었다. 

나는 이 의혹사건을 철저히 고발하여 이승만씨로부터 미움을 받은 반면에 국민의 여론은 나에게 절대적인 지지를 보내주어서 국회의원으로서 긍지를 갖게 되었으며, 몸은 쓰러지더라도 국가와 민족을 위하여 끝까지 싸워야겠다고 결심하였다. 

또한 내가 이 사건을 고발하려 국회에 나갈 때마다 나에게 무슨 위험이 뒤따를 것이라는 생각에서 가족에게 유서까지 써놓았다. (주석 6) 

국민방위군사건과 비슷한 시기인 1951년 2월 11일 경남 거창군 신원면에서 국군에 의해 민간인 600여 명이 집단 학살되었다. 육군 제11사단 3대대 병력은 공비토벌의 명분으로 현지에 출동하여 주민 1천여 명을 신원초등학교로 소집, 경찰 및 지방유지 가족을 골라낸 뒤 산골짜기로 끌고 가 집단학살한 뒤 휘발유를 뿌려 시신을 불태웠다. 이같은 만행은 인근 대현리·덕산리 일대에서도 자행되었다.

현지 주둔군은 이 학살사건을 은폐하려고 피해 현지와 외부와의 왕래를 차단하고 생존주민들에게 실상을 발설하는 자는 공비로 간주, 총살하겠다고 위협했다. 그러나 사건 후 약 한 달이 지난 3월 21일 제11사단 자체가 진상보고서를 육군과 국방부에 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사단장 최덕신의 이름으로 된 보고서는 "사살주민의 대부분이 양민이어서 군에 대한 신뢰가 땅에 떨어지고, 이밖에도 부녀자 강간, 물품 강요, 재산약탈 등으로 주민들이 분노하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국민방위군 사건으로 궁지에 몰려 있던 신성모 국방장관은 "외국의 원조로 전쟁을 수행하고 있는 마당에 이같은 군의 비행이 외국에 알려지면 전쟁수행에 지장을 초래하고 군의 사기를 해친다"고 사건을 묵살할 것을 지시하는 한편, 3월 중순 현장을 답사한 후 "희생자수는 187명이며 모두 통비분자였다"고 허위날조했다.

신성모의 허위발표에도 불구하고 서민호·엄상섭 의원 등이 조사한 진상을 발표하고, 국회는 장면 총리, 신성모 국방, 조병옥 내무, 김준연 법무 등에게 합동조사단을 구성, 현지조사키로 결의했다. 서민호·신중목·이충환 의원이 국회의 조사위원이 되었다.

국회와 합동조사단은 51년 4월 7일 신원면으로 들어가려 했으나 조사활동을 방해하기 위해 공비로 가장한 군인들의 공격을 받고 성과 없이 철수했다. 이후 다시 진상조사가 실시되고 헌병사령부는 제9연대장 오익경, 제3대대장 한동석 동 대대 정보장교 이종대 등을 구속, 군법회의에 회부했다.

51년 7월 27일 대구에서 열린 중앙고등군법회의에 이어 12월 26일 선고공판에서 김종원 징역 3년, 오익경 무기징역, 한동석 징역 10년, 이종대에게 무죄를 선고하여 거창사건의 책임추궁은 일단락되었다. 그러나 이들은 1년 만에 모두 석방되고 오익경·한동석은 현역으로, 김종원은 경찰 고위간부로 재기용되어 많은 의혹을 남겼다. (주석 7)

서민호는 이 두 사건의 진상을 파헤치는 데 앞장섰다. 많은 의원들이 몸을 사리고 침묵할 때 그는 위험을 무릅쓰고 할 일을 하고자 했다. 

국민방위군사건으로 정부의 내게 향한 감정은 악화될 대로 되었는데 또 이런 거창한 사건을 끌고 나와 소란을 피우는 서민호라는 인간을 눈 안의 가시처럼 증오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그래서 주위의 친지들은 심상치 않은 이 정권의 위협에서 나를 끌어내려고 많은 우의를 보였지만, 부정을 보면 끝까지 대결하겠다는 내 무서운 고집을 꺾지 못했다. 나는 단독으로라도 싸울 결심을 했다. 마침내 국회조사단의 구성을 제안하였고, 이 제안을 놓고 논란(論難)을 거듭한 끝에 1951년 4월 1일 드디어 조사단이 구성되었다.(…)

그러나 이 조사단이 구성되자 또 하나의 큰 문제에 봉착하게 되었다. 내가 조사단의 일원으로 거창으로 떠나려할 때 엄상섭, 서범석 의원 등은 현지에 가면 무서운 결과가 초래될 뿐이니 앞일을 위하여 자중하는 것이 좋겠다는 의견을 말해왔고, 만약 내가 현지에 나타나기만 하면 어떤 수단으로든지 암살시키라는 지령이 내려졌다는 엄청난 정보도 입수하였다. 그리고 조사단원은 꼭 신성모 국방장관 차에 동승해야만 신변이 안전할 것이라고 했다. (주석 8)


주석
6> <이 정권과의 투쟁(25)>.
7> 김삼웅, 앞의 책, 65~66쪽.
8> <이 정권과의 투쟁(27)>.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인물열전 - 월파 서민호 평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태그:#서민호, #월파_서민호평전, #월파서민호평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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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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