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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리야 사건이 일어나다

1927년 10월 일본인 가리야(刈屋益槌, 53세)에 의해 영남산무리 자락의 상북면 등억리의 숯장수 김경도(34세)가 발에 차여 죽은 축살(蹴殺) 사건이 일어났다. 이 사건으로 언양은 반일의 기운이 높았다. 가리야는 언양면에 가장 먼저 들어온 일본인이었다. 그는 1876년생으로서 야마구치(山口)현 출신이다.

1911년 7월, 35세의 가리야는 5살 아래의 부인을 대동하고 언양면 동부리에 들어와 잡화상(雜貨商)과 숙박업(宿泊業)을 차렸다. 1916년에는 야마구치 출신의, 같은 성을 가진 인물이 그의 집에 1년간 살았다. 직업은 농업인데, 정착에 성공하지 못하고 돌아갔다. 1923년에 가리야의 어머니가 합류하였다. 가리야의 언양 정착 의지는 확고하였다. 그렇지만 그의 언양 생활은 비극으로 끝나고 말았다. 그의 잡화상과 숙박업 경영은 그리 성공적이지 못하였다. 1912년 그의 토지재산은 대지 137평에 불과했는데, 1927년까지 밭(田) 1필지 787평을 마련했을 뿐이다.

1927년 10월 비극적 사건이 벌어졌다. 축살(蹴殺) 사건의 발단은 1927년 10월 17일 오후 3시 언양면의 장터 동부리 180번지(현 언양새마을금고), 숯장수 김경도는 가리야가 운영하는 가게 앞에서 숯을 팔고 난 뒤 가리야의 부인과 말 다툼이 벌어졌다.

"담배를 피고자 하니, 성냥을 좀 주시오."
"돈을 내지 않으면 줄 수 없어요. 돈을 내고 성냥을 사시오."
"돈이 없오. 담뱃불을 붙이겠으니 성냥 한 개만 주오."


결국 가리야의 처가 일본말로 욕을 하고, 두 사람이 말다툼을 벌어졌다. 이에 방 안에 있던 가리야가 뛰어나와 김씨를 난타하며, 게다 신은 발로 국부를 걷어차서 졸도하게 하였다. 이것을 본 정인섭의 아버지 정택하가 다개리 의생(醫生) 이종호를 청해 침을 놓고 겨우 살려 놓았다.

김경도는 걸음을 제대로 걷지 못해, 같이 온 숯꾼 장수 등에 업혀 등억으로 갔다. 김경도는 일본인 의사에게 치료를 받고자 했으나, 의사는 치료를 제대로 해주지 않았다. 김씨는 차도가 없었다. 가리야는 사람을 보내 치료비와 생활비를 주겠으니 고소하지 말라고 사정을 하였다. 그런데 병의 차도가 없어 사건 발생 5일 뒤인 10월 22일 김씨의 형은 언양주재소(駐在所)에 고소를 제기했다. 그런데 갑자기 김씨가 22일 오후 3시경 사망했다.

울산사회단체 간담회에서는 사건의 진상을 조사하였다. 언양청년회와 상남・하북 시대청년회에서는 22일 오후 8시 언양청년회관에서 연합회의를 열고 진상규명과 가해자 비행 성토, 피해자 유족 구조 등을 결의하고 실행위원으로 성헌장, 신영업, 유철순, 박인하를 선정하였다. 우발적인 사건이었지만 언양 주민들은 이 사건을 일본인과 조선인 사이의 문제로 인식하였다. 사망 후 의사의 잘못된 진단이나 가리야의 처벌 과정, 일본어 신문 <부산일보>의 차별적 보도 등은 민족 차별로 이어져 지역 주민의 분노를 자아내기에 충분했다.

부검 결과 김씨가 차여서 죽었다는 결론이 나왔고, 사건 발생 6일 뒤인 10월 23일 오후 6시 가리야는 울산경찰서로 잡혀갔다. 김씨 시체는 해부 후 매장되었다. 가리야는 재판정에서 싸웠지만 찼던 기억은 없다고 살인혐의를 부인하였지만, 징역 5년을 구형받았고 판결에 굴복한 가리야는 대구형무소에 복역 중인 가운데 항소하였다. 가리야를 상대로 유족들은 부산지방법원 민사부에 위자료 및 손해료로 부인 박말순에게는 3780원을, 장녀에게 4160원을 총 8540원을 청구하였다. 가리야가 그의 아내와 모친을 데리고 언양을 떠나는 건 1935년 10월이었다.

하지만, 살인사건의 규탄과 조선인 차별에 대한 항의로 이 사건은 전국적으로 알려졌다. 당시 "악독한 왜노, 우리 동포를 차서 죽였다"라는 분노가 하늘을 찌를 정도였다. 언양청년회는 임시총회를 열고 사건의 진상을 조사·공표할 것 등을 논의했다. 주민들은 사건 진상 선전지 4000장을 뿌렸지만, 시민대회는 일제에 의해 금지당해 열리지 못했다. 언양지역에 일본인의 횡포는 지역민들의 항일의식을 형성하고 이에 대한 계몽운동으로 일본 상품 불매 운동이 일어났다.

언양소년단 제1차 만세문 사건

이동개(아명, 이야개)는 언양소년단에 1925년 4월에 입회하여 1928년 8월까지 언양소년단의 간부로서 사무를 처리하고 소년들의 지도를 맡았다. 1925년 3월경부터 소년단 간부로 활동하면서 이동개는 매월 1회씩 단원을 언양청년회관에 집합시켜 기회 있을 때마다 독립의식을 고취하고 실천하도록 했다.

일본제품 불매운동과 관련하여 이동개는 1928년 7월 언양청년회관 임시총회에서 20여 명의 언양소년단 회원에게 강연을 하였다. 뿔테 안경을 쓴 다소 가냘픈 몸이었지만, 목소리는 카랑카랑하였다. 이동개는 소년단원들에게 독립사상을 선전할 것과 일본상품 불매운동을 권장하였다. 이 현장에 오영수의 동생 오호근도 있었다.

"조선이 일본과 강제 병합함에 따라 조선인은 일본으로부터 속박을 받게 되었다. 이는 우리 선조들이 지식이 없고 지혜가 없었기 때문이다. 아직도 우리 조선은 일본에 빼앗겨 독립하지 못하고 있으니, 우리 소년단원은 단결하여 조선 독립을 위해 노력하여야 한다. 일본인이 조선인을 압박하고 정부 또한 차별대우를 하고 있다. 우리 조선인들이 일본인에게 고통을 주는 방법을 강구하여야 한다. 독립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우리들 조선 소년은 중한 책임이 있다. 작은 일에서부터 시작하여야 한다. 먼저 독립사상을 선전하여야 한다. 다음으로 일본인 상점을 이용도 하지 말고 일본상품 불매운동도 하여야 한다. 사지도 사용하지도 말아야 한다. 작은 실천에서부터 독립은 시작됨을 명심하여야 한다."

1928년 10월 20일 언양불교소년소녀회는 창립 5주년 기념 가극대회를 언양청년동맹 회관에서 열렸다. 이틀간 방청 관객이 1천여 명에 달할 정도로 대성황이었다. 1928년 12월 8일 6학년 언양소년단원 김동하(金東河, 17세)는 그동안 학교에서 배운 붓글씨로 크게 글을 적었다. 종이는 장(長) 2척(尺)[60cm]에, 폭(幅)은 1척(尺) 6촌(寸)[50cm] 정도였다. 먹을 가는 손에 힘이 들어갔다. 점점 벼루에 먹은 진하게 되어갔다. 듬뿍 먹을 묻혀서 정성을 다해 글을 적었다.

"조선소년들아! 일본인을 타도하여 조선을 회복하자! 조선독립만세!"

글과 함께 태극기를 그려 선전 문서를 작성했다. 12월 11일 울산경찰서 언양경찰관 주재소 앞의 게시판에 김동하는 과감하게 부착했다. 그는 학교 미술 시간에 만국기를 그리라고 하면, 가운데에 태극기를 넣는 학생이었다. 조선 독립의 마음이 그의 마음에 활활 타고 있었다.

제1차 '언양만세문사건'이었다. 일제 입장에서는 '언양소년회불온문서' 사건이었다. 일제 경찰은 언양소년회 지도자 이동계(이동개), 언양농민조합간부 오문영, 언양청년동맹집행위원장 신주극과 신영업을 검속하여 조사하였다. 경찰은 이들이 일반소년들에게 조선독립사상과 사회주의 불온사상을 선동 혹은 교사한 것이 아닌가 의심하였다.

울산경찰서는 순사를 파견하여 언양공립보통학교에 임시사무소를 설치하고 소년단 가입 학생들에 대해 수업을 전폐하고 일일이 조사를 하였다. 교실은 형사 취조실이 되어 살기등등한 장소가 되었다. 또 소년단 관계자의 자택을 수색하였지만 물적 증거는 없었다. 언양소년단의 이동개, 김동하가 12월 12일 언양 만세문 사건으로 구속되었다. 언양지역 소년단체들의 활동은 위축되었다.

1929년 3월 20일 부산지방법원에서 재판이 열렸다. 치와타[千綿] 검사는 "피고들은 비록 나이는 어리다고 할지라도 그 의식은 장래의 무엇을 목적하는 확실한 신념을 세워있는 것으로 넉넉히 인증할 수 있다. 따라서 그들의 소년운동은 오늘의 일본 국체와는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바이므로 엄정한 처분을 하지 않을 수 없다. 하여 보안법 제7조를 적용해 징역 각 1년을 구형한다"라고 하였다. 하지만 변호인인 김일용(金一龍) 변호사는 장시간 열렬한 변호를 한 뒤에 무죄를 주장하였다.

3월 28일 부산지방법원 1심에서 히다리 사키[左左木] 재판장은 징역 8개월 형을 선고하였다. 판결 결과에 대해 김동하는 받아들였다. 이동개는 항소[控訴]하였다. 대구복심법원에서 5월 14일 공판이 열렸다. 이동개는 변호사 김용섭의 변호로 항소를 하였으나 패소하였다. 검사는 1년을 구형하였고, 5월 21일 판사는 징역 8개월을 선고하였다.

김동하는 20세 미만의 어리고 연약한 몸으로 춥고 더운 시절의 가진 고통을 당하고 1929년 11월에 가출옥하여 무사히 고향으로 돌아왔다. 한달 뒤 1929년 12월 15일 그날은 비가 쏟아지는 겨울이었다. 언양소년동맹집행위원(경남소년동맹집행위원) 이동개(20세)가 부산형무소에서 오전 10시 건강한 몸으로 출옥하여 언양에 도착하자 언양청년회 및 소년회 100여 명의 동지들이 비가 쏟아지는 것에 아랑곳없이 소년회가를 높이 부르며 소년회관까지 진행하는 출옥 환영행사가 있었다.

언양소년회의 만세문사건은 소년운동이 단순히 계몽을 통한 민족의식 고취라는 실력양성의 단계에 머문 것이 아니라 항일민족해방 활동으로 나타났다. 이것은 다른 지역의 소년운동과 다른 특별한 일이라 하겠다. 이는 당시 언양소년회을 지도하였던 언양청년회의 활동가들의 영향 때문이기도 하지만, 주체적 존재로 성장한 소년의 민족적 결단으로 볼 수 있다. 이동개는 언양소년운동 1세대에서 언양청년운동 2세대로 거듭나는 인물이 되었다.

* 이병길 : 경남 안의 출생으로, 부산・울산・양산 삼산지역의 역사 문화에 대한 연구를 하고 있다. 저서 <영남알프스, 역사 문화의 길을 걷다>, <통도사, 무풍한송 길을 걷다>. 오마이뉴스에 <의열단원 박재혁과 그의 친구들>을 연재하였다.

덧붙이는 글 | <울산저널>에도 게재합니다.


태그:#언양소년회, #언양소년운동사, #울산소년운동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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