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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회 교육위원회 소속 국민의힘 정경희 의원이 지난 12일 오전 광주 북구 전남대학교에서 열린 전남대·전북대·제주대 및 각 대학병원에 대한 국정감사에서 질의하고 있다.
 국회 교육위원회 소속 국민의힘 정경희 의원이 지난 12일 오전 광주 북구 전남대학교에서 열린 전남대·전북대·제주대 및 각 대학병원에 대한 국정감사에서 질의하고 있다.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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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국정감사가 끝났다. 행정부에 대한 입법부의 견제와 심사는 여전히 찾아볼 수 없었고 고성·삿대질로 가득찬 정쟁만 남았다. 그와중에도 성소수자 혐오발언은 그칠 줄 모르고 터져나왔다.

여성가족부 국정감사에선 해마다 '동성애 반대'를 아이템으로 들고나와 성소수자 혐오를 조장하고, 심지어는 혐오를 선동하는 국회의원이 등장한다. 올해는 정경희 국민의힘 의원(비례대표)이 그 역할을 맡은 모양이다.

정 의원은 지난 25일 여가부 국감에서 "문재인 정부의 여성가족부는 동성애를 집단 학습시켰다", "영국에서는 차별 금지 교육 때문에 청소년 동성애자가 두 배 가까이 증가했다"고 말했다. '성소수자 혐오발언'이라는 다른 의원들의 문제제기에 "흡연이 몸에 나쁘니까 담배를 피우지 말라고 하면 차별이냐"고 반문하기도 했다(관련 기사 : 성평등 교육으로 동성애자 증가? 또 가짜뉴스 주장한 국힘 http://omn.kr/21c2v ).

정경희 의원의 혐오발언을 접하고 드라마 한 편이 문득 떠올랐다. 2010년 SBS에서 방영한 <인생은 아름다워>다. 대한민국 공중파에선 찾아볼 수 없었던 남성 동성애자 캐릭터가 등장하는 드라마였다. 당시 "<인생은 아름다워>가 동성애를 옹호하고 조장한다"면서 방영을 중단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기도 했는데, 대표적인 구호로 등장한 문장이 "<인생은 아름다워> 보고 게이 된 내 아들, AIDS로 죽으면 SBS 책임져라!"였다. 드라마 한 편 시청으로 게이가 될 수 있다니 실소가 저절로 나올 수밖에 없는 말이지만, 구호를 내세운 사람들은 <조선일보>에 지면 광고까지 게시할 만큼 공격적이었다.

방영 이후 12년이 지난 지금 돌아보면 어떠한가. 드라마를 보지 않은 나는 정작 게이로 살고 있는데, '<인생은 아름다워>를 보고 게이가 됐다'는 고백과 함께 후회의 눈물을 흘리는 동성애자는 단 한 번도 만나보지 못했다. <인생은 아름다워>를 보고 게이 된 아들을 둔 부모가 SBS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다는 소식 또한 듣지 못했다. 미래를 예측한 걸까. 당시 성소수자 인권단체에서 대항마로 내세운 구호 한 줄엔 깊은 통찰이 담겼다. "<인생은 아름다워> 보고 게이 되면 <공부의 신> 보면 서울대 가냐?"

영국 평등청·통계청 조사 내용을 제대로 읽은 걸까
 
영국 통계청(Office for National Statistics) '성적 지향'(2020) 자료. 이미지 중 드래그한 부분이 2014년 대비 동성애자, 양성애자 비율 증가 관련 서술.
 영국 통계청(Office for National Statistics) "성적 지향"(2020) 자료. 이미지 중 드래그한 부분이 2014년 대비 동성애자, 양성애자 비율 증가 관련 서술.
ⓒ 영국 통계청 갈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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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경희 의원의 성소수자 혐오발언 역시 같은 수준이다. 때문에 촌철살인으로 반박을 대신하면서 넘어갈 수도 있다. 그러나 정 의원의 성소수자 혐오발언이 끼치는 사회적 해악을 고려하면 구체적 반박을 남길 필요가 있다. 특히 영국 통계를 근거로 "차별 금지 교육이 청소년 동성애자의 수를 증가시킨다"고 주장한 부분은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한다. 이후에도 해당 발언이 국회 안팎에서 성소수자에 대한 차별과 혐오를 선동하는 잘못된 근거로 악용될 소지가 크기 때문이다. 

정 의원이 발언의 근거로 삼은 자료는 영국 통계청이 실시한 연례인구조사(APS)의 결과다. 그의 말처럼 청소년(16세~24세) 동성애자(Gay or Lesbian)의 경우 2014년 1.5%에서 2020년 2.7%로, 청소년 양성애자(Bisexual)의 경우 2014년 1.3%에서 2020년 5.3%로 각각 증가한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해당 결과를 정리한 자료에선 차별 금지 교육의 실시와 청소년 동성애자 및 양성애자 수 증가의 연관성에 대한 내용은 찾아볼 수 없다. 

영국 정부 "효과적 성소수자 정책수립 위해선 당사자에게 얘기 들어야"
 
2018년 7월 평등청이 발간한 '국가 성소수자 조사 요약 보고서(National LGBT Survey Summary Report)' 표지.
 2018년 7월 평등청이 발간한 "국가 성소수자 조사 요약 보고서(National LGBT Survey Summary Report)" 표지.
ⓒ 영국 평등청 공개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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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목해야 할 지점은 다른 곳에 있다. 영국 정부 평등청(Government Equality Office)의 조사 결과에 따르면, 청소년 성소수자의 67%는 "다른 사람들의 부정적인 반응이 두려워 자신의 젠더 정체성을 공개하는 것을 피했다"고 응답했다.

바꿔 말하자면 성소수자에 대한 사회적 수용도가 높을수록 자신의 젠더 정체성을 공개하는 일이 수월해지고, 그에 따라 숨기거나 밝히지 않았던 자신의 정체성을 공개하는 성소수자가 많아진다는 뜻이다. 단순히 통계만 두고 봤을 때는 성소수자 인구 수가 증가한 것처럼 보일 수 있지만, 맥락을 살펴보면 차별과 혐오 때문에 '커밍아웃'을 하지 못했던 성소수자 시민이 달라진 제도와 사회적 분위기에 따라 '커밍아웃'을 하게 된 것이라는 해석이 훨씬 타당하다.

영국 정부의 해석이라고 다르지 않다. 2018년 7월 평등청이 발간한 '국가 성소수자 조사 요약 보고서(National LGBT Survey Summary Report)'를 살펴보면 서문에 "성소수자 권리 증진을 위한 국가적 노력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성소수자 시민이 일상을 영위하는 과정에서 상당한 장벽에 직면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면서 "효과적인 정책 수립을 위해서는 확실한 증거 기반이 필요한 바, 정책의 영향을 받는 당사자에게 직접 이야기를 들어야 한다"고 명시했다.

단순히 성소수자 인구수가 늘어나는지 줄어드는지를 확인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성소수자에 대한 사회적 수용도는 물론 권리 보장의 수준을 높이기 위해 실시하는 조사라는 점을 분명히 밝힌 것이다.

2010년 평등법 제정하고 2013년부터 동성결혼 인정한 영국 

정경희 의원은 학교에서 차별 금지를 주된 내용으로 하는 교육을 금지하고, 나아가서는 차별금지법의 제정을 저지하기 위해 영국 정부의 통계를 인용해 질의에 나선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정 의원이 인용한 통계는 차별과 괴롭힘의 대상이 되는 성소수자 청소년을 보호하기 위한 교육과 제도가 필요한 이유, 성소수자에 대한 사회적 수용도를 높이기 위해 차별금지법 제정이 필요한 이유를 확실히 보여주고 있다.

이처럼 통계에 대해 구구절절 말하지 않더라도 '성소수자의 비율은 줄어야 하고, 끝내는 0이 돼 없어져야 하는 것'이라는 성소수자 혐오 인식이 다분한 전제를 기반으로 한 질의가 행정부에 대한 견제도, 시민의 삶을 위한 변화를 이끌어내는 일도 아니라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의 '한눈에 보는 사회 2019(Society at a Glance 2019)' 보고서에 따르면 2001년부터 2014년까지 영국의 '동성애 수용도'는 10점 만점에 5.2점을 기록한 반면, 같은 기간 한국의 '동성애 수용도'는 2.8점에 그쳤다. OECD 회원국 평균 점수가 5.1점이라는 점을 고려했을 때 부끄러운 수치다.

영국 의회는 2010년 10월 평등법(Equality Act)을 제정했고, 2013년 잉글랜드와 웨일스를 시작으로 이듬해 스코틀랜드 그리고 2020년 북아일랜드까지 전역에서 동성결혼을 법적으로 인정했다. 대한민국 국회는 무엇을 했나. '건강가정'을 고집하는 낡은 구시대적 법률 하나조차 고치지 못했고, 차별 금지라는 헌법 정신을 구체화하는 현대적인 법률 하나조차 만들지 못했다. 
 
영국 정부 평등청이 2010년 평등법 제정에 맞춰 발간한 '권리에 대한 요약 가이드' 문서 표지.
 영국 정부 평등청이 2010년 평등법 제정에 맞춰 발간한 "권리에 대한 요약 가이드" 문서 표지.
ⓒ 영국 평등청 공개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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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善)의 방관이 악(惡)을 꽃피운다."

정경희 의원의 블로그 프로필에 적힌 문장이 울림을 준다. 정 의원의 성소수자 혐오발언에 권인숙 국회 여가위원장을 비롯한 몇몇 의원들이 문제를 제기한 것은 그나마 다행스러운 일이라고 본다. 그 과정에서 성소수자 차별 금지에 대한 원칙적인 입장을 밝힌 점도 나름 긍정적으로 평가한다.

그러나 어떠한 '선'이라 할지라도 계속 방관으로 일관한다면 '선'이라 부를 수 없을 것이다. 차별과 혐오라는 '악'이 국회에서 꽃을 피우기 전에 '눈치게임'이라는 이름의 방관을 멈춰주기를 바란다. 다가오는 정기국회에서는 반드시 포괄적 차별금지법을 제정하고, 내년 국감부터는 '동성애 반대' 타령을 더 이상 듣지 않을 수 있기를 간절히 희망한다.

태그:#정경희, #혐오발언, #성소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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