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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표지 <한양도성 따라 걷는 서울기행>
 책 표지 <한양도성 따라 걷는 서울기행>
ⓒ 아임스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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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장충동에서 학교를 다녔다. 옥수동에서 버스 타고 등교하다 보면 왼쪽으로 성곽들이 보였다. 성곽이 어디로 이어졌는지 그런 생각까지는 하지 못했지만 성곽을 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포근해졌다.

성곽을 보면 조선시대가 떠올랐다. 조선시대 한양은 숭례문 안쪽이란 책을 읽으면서 서울 시민 대부분은 조선시대 기준으론 성문 밖 백성이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서 씁쓸했다. 신간인 <한양도성 따라 걷는 서울기행>을 읽으면서 성곽길을 다시 생각해 보게 되었다. 책의 저자인 최철호씨는 성곽길 역사문화연구소 소장으로 알려져 있다. 

낙산은 원래 낙타산? 

책을 읽으면서 숙정문을 찾아가 보고 싶은 생각이 났다.
 
숙정문은 한양도성 성문 중 좌우 양쪽으로 성벽이 연결된 유일한 문이다. 한양도성 안 다른 성문들과는 달리 천정에 그림도 없이 화강암 홍예로 되어 있다. 사대문 중 숙정문은 대문 역할을 못하고 항상 굳게 닫혀 있었다.  험준한 산악 지역에 소나무까지 심어 실질적인 성문 기능을 하지 못했다. (본문 37쪽)

백악산에서 낙타산으로 내려가는 길 북쪽의 대문인 숙정문은 한 번도 본적이 없었다. 덩그라니 성곽은 없이 문만 남아있는 숭례문을 보았던 나는 험준한 산 속에 양옆에 성곽과 함께 있는 숙정문의 모습이 궁금해졌다.

그런데 이런 험준한 산속에 있는 숙정문을 열고 평지에 있는 숭례문을 닫는 시기가 있었다고 한다. 바로 가뭄이 들때 숙정문은 열고 숭례문의 문을 닫았다고 한다. 가뭄에 백성들의 고통이 심했을텐데 평지의 숭례문을 닫으면 더 백성들의 힘들지 않았을까? 그 이유는 책 속에서 찾을 수 있다. 
 
숙정문은 음양오행 중 물을 상징하며 가뭄이 들 때 열었다. 숙정문이 열리면 불을 상징하는 숭례문이 닫혔다. 기우제를 위해 열고 비가 많이 오면 기청제를 위해 닫았던 성문이다. (본문 37쪽)

이 책에 나오는 흥미로운 내용 중 하나는 지명에 관한 것이다. 낙산이라고 알려졌지만 이 산의 이름은 낙타산에서 왔다고 한다.
 
우리는 낙타산보다 낙산이라는 이름에 익숙한데 낙타산은 즐거울 낙(樂)의 낙산이 아니라, 낙타를 닮아 낙타산이다. 그렇다면 우리나라에 낙타가 있었단 말인가? 1000여 년 전 고려에 낙타를 타고 온 사람들이 있었다. 거란인들이었다. 예성강 국제무역항에도 낙타에 짐을 싣고 나타났다. 개성의 만부교가 바로 '낙타교'다. 태조 왕건이 거란이 보낸 낙타 50필을 만부교에서 굶겨 죽인 이 사건은 역사의 미스터리로 기록되어 있다. (본문 43쪽)

조선의 왕 성종 역시 비싼 흑마포 60필로 낙타를 구입하려고 했다는 이야기가 책에 나온다. 그만큼 지금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낙타가 친근했던 모양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낙산이 낙타산에서 왔을리 없기 때문이다. 이처럼 서울의 숨은 지명은 새로운 역사를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된다. 탑골공원의 이야기도 흥미로웠다.
 
환구단에서 대한제국을 선포한 고종황제는 최조의 근대식 공원을 만들고 싶었다. 허물어진 원각사 터에 팔각정을 지어 공원으로 꾸미고, 우리나라 최조의 서양음악 공연을 열었다. 또한 1910년 창설한 대한제국 군악대의 음악회도 열었다. 매주 탑골공원에서 양약대의 관현악 음악이 흘러나왔다. (본문 165쪽)

낙원동의 낙원상가에 전국 최대 규모의 악기종합상가가 만들어진 계기가 탑골공원 안에 군악대와 양악대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서울의 지금 모습이 과거에서 비롯된 것을 많이 찾을 수 있다. 서울에 숨겨진 흥미로운 이야기를 더 알고 싶다면 이 책을 한손에 들고 한양도성 따라 걷기를 해보길 권하고 싶다.

덧붙이는 글 | 개인 블로그에도 올릴 예정입니다.


한양도성 따라 걷는 서울기행

최철호 (지은이), 아임스토리(2022)


태그:#성곽길, #한양도성 따라 걷는 서울기행, #최철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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