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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연재에서는 우리 사회의 사각지대들에 대해 살펴보고자 합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사각지대는 특정한 분야나 인구집단일 수도 있고, 작은 크기의 현상일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다수에게는 소수가 사각지대이겠지만, 소수에게는 다수가 사각지대일 수 있을 것입니다. 첫 번째 기사는 마지막 경우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1991년의 일입니다. 저는 대학 1학년 과정을 마치고 휴학한 뒤 1월에 입대했습니다. 신병훈련소에서 훈련을 받고 자대 배치를 받았는데, 거의 한달 만에 혹한기 훈련을 받으러 갔습니다. 그런데 이 일련의 과정에서 깨달은 것이 있습니다. 대부분이 2-3년 범위의 또래들로 구성된 부대 전체에서 대학생이 저를 포함해서 그리 많지 않다는 사실이었습니다. 10여명의 동기들 중에서도 3-4명밖에 되지 않았고, 선임과 후임들도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저는 어렸을 때 고등학교에 들어가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고, 고등학교를 졸업하면 대학에 진학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경로라고 생각했으며, 늘 어울려 지내던 친구들도 모두 같은 시기에 대학에 입학했기 때문에 대부분의 또래가 대학에 갈 거라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고등학교 3학년 때 같은 반 학생이 60명 정도였던 것 같은데, 그 중에서 실제로 4년제 대학에 갈 수 있는 친구가 많지 않다는 사실을 간과했고, 성적이 낮은 친구들의 진로에 대해 생각해보지 않았던 것입니다.
 
사각지대: 보이지 않는 다수도 사각지대입니다.
 사각지대: 보이지 않는 다수도 사각지대입니다.
ⓒ 권지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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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기사를 구상하면서 자료를 찾아보았습니다. 제 또래인 1971년생들은 출생 당시 인구가 104만 명 정도였습니다. 지금은 94만 명 정도가 생존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대한민국의 최대 또래집단입니다. 1971년생의 고등학교 진학률은 75% 정도였습니다. 대략 75만명 정도가 고등학교에 입학한 것입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에 진학한 또래들은 그 중에서 33% 정도인 25만여 명이었습니다. 그러니까 1990년 우리나라 나이로 스무 살이 되었을 때 대학에 입학한 1971년생은 전체의 25%에 불과했습니다. 물론 재수, 삼수, 다수생을 포함하고, 고교 졸업 후 직장에 다니다가 뒤늦게 대학에 진학한 또래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래도 그 수가 '제 나이'에 입학한 수보다 많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지난해 24-64세 인구의 최종학력 통계에서 대학 졸업자가 50% 정도에 불과한 것을 보면 이 예측이 틀리지는 않을 듯합니다.

최근 고등학교 졸업생들의 대학진학률은 70% 정도를 오르락내리락하고 있습니다. 지난 20여 년간 70-80% 사이를 왔다갔다하고 있죠. 머리로는 50대 이상 기성세대의 대학진학률이 높지 않다는 사실을 알고 있지만, 실제 생활에서 마주치는 기성세대들이 대부분 대졸 학력을 갖고 있으면 '나머지 다수'도 그럴 거라는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여기까지 하고, 다음 화제로 가 보겠습니다.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라는 드라마가 장안의 화제입니다. 잘 알려지지 않은 채널에서 방송된 터라 처음에는 시청률이 높지 않다가 구전효과가 발화하면서 10% 이상의 시청률을 보이고 있습니다. 독자들이 이 드라마를 보고 계시다면, 주변 사람들도 거의 모두 이 드라마를 보고 있을 거라는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이 드라마를 보게 된 것도 주변 사람의 추천 때문일 수 있고, 만나는 사람마다 이 드라마 이야기를 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얼마 전 방영이 끝난 '우리들의 블루스'나 '나의 해방일지' 등도 비슷할 것입니다.

자. 그런데... 정말 그럴까요? 이 드라마들을 본 방송으로 보는 사람과 재방송이나 VOD, 동영상 플랫폼의 요약 영상 등을 찾아보는 사람을 다 포함하더라도 인구의 절반에는 미치지 못할 것이고, 일상적으로 드라마를 보는 사람들도 다 찾아보지는 않을 것입니다. 이는 대중모임에 가서 이 드라마들의 이야기를 꺼냈을 때 사람들이 보이는 반응을 보면 눈치 챌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라는 드라마 얘기를 수없이 들었지만 관심을 갖지 않을 것이고, 어떤 사람들은 정말 볼 시간이 없었을 것이고, 어떤 사람들은 보고 싶지 않아서 보지 않았을 것입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한두 번 보고나서 거부 반응을 보였을 수도 있습니다. 이 드라마에 대해 다양한 담론들이 구성되고 있음을 봐도 그 다양성을 가늠해 볼 수 있겠습니다.

이런 상황을 '중고등학교 어느 시기'에 배웠던 프란시스 베이컨의 '네 가지 우상' 개념에 적용해 볼 수도 있겠습니다. 이런 경우는 아마 동굴의 우상이나 시장의 우상, 극장의 우상과 관련되어 있을 듯합니다. 자. 그런데, 여러분 중에서 위에서 언급한 네 가지 우상 개념을 기억하는 분이 있습니까? 이 개념을 중고등학교 시기에 배웠으리라고 전제하는 저의 생각도 우상 중의 하나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 두 가지 이야기에서 제가 하고 싶은 말은 우리가 실제로는 소수에 속해 있으면서 다수가 우리 자신의 관점이나 생각, 경험을 공유하거나 공감할 것이라는 착각을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정치 영역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자신이 지지하는 정당이나 후보자를 다른 사람들도 '당연히' 지지할 거라고 기대합니다. 왜냐하면 주변의 친한 사람들은 대부분 그 사람을 지지하니까요. 그래서 상대 정당이나 후보자를 지지하는 사람들의 입장을 이해하기가 어렵습니다. 따지고 보면, 선거에서 승리하는 거의 모든 정당과 후보자는 늘 소수를 대변합니다. 전체 유권자 중에서 50% 이상을 득표하는 정당이나 후보자는 없으니까요.

이렇게 정리해 놓고 다음 화제로 넘어가겠습니다. 요즘은 잠잠해 졌지만 '대학의 위기'가 한동안 화두였습니다. 조만간 대학입학 자원이 대학 정원보다 적은 시기가 올 거라고 예측하면서 머지않은 시기에 남쪽에 있는 작은 지방대학부터 문을 닫게 될 거라고 경고를 합니다. 실제로도 다수의 대학이 미달 사태를 겪으며 위기를 경험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사회 전체를 보면, 이 상황이 '위험'한 상태라고만 보는 게 맞을지 의문입니다. 첫 번째 화제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우리나라 나이로 52세가 된 1971년생의 절반 이상(아마도 50만명?)이 아직 대학에 가보지 않았습니다. 58년 개띠로 유명한 1958년생 베이비부머들의 대학진학률은 훨씬 더 낮습니다. 우리 사회에서 첫 번째 장기근속 직장에서 은퇴하는 55세부터 소득이 있는 근로활동을 원하는 73세까지의 인구 규모는 1500만 명은 될 것이고, 이 중에서 1000만 명은 아직 대학에 가보지 않았을 것입니다. 물론 은퇴 이후 생활을 위해 꼭 대학에 갈 필요는 없지만, 자녀들을 대학까지 졸업시킨 후 자신의 새로운 인생을 위해 대학을 선택하는 기성세대도 적지는 않으리라 생각됩니다.

서구 사회와 비교해 봐도 젊은 세대의 대학진학률은 우리가 더 높지만, 중노년 세대의 대학진학률은 서구 국가들이 더 높습니다. 그러니 이 세대에게 대학의 문을 더 활짝 열어두고, 더욱 다양하고 활력 있는 교육 프로그램들을 준비해 두면 어떨까 합니다. 현재 우리나라의 기대수명은 80세 정도니까 60세에 대학에 입학하면 졸업하고도 10년 이상 활동할 수 있을 것입니다. 다만 대학교육의 목적은 변화되거나 다양화될 수 있겠지요.

두 번째 화제인 드라마 이야기와 우상 개념은 어떨까요? 우리는 사회 구성원들을 구분하는 여러 기준에 의해 나눌 때, 늘 소수집단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내가 하는 생각과 그 바탕이 되는 관점도 소수에 불과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다른 사람들도 나와 같은 생각을 할 거라고 기대해서는 안 되겠죠?

그럼에도 드라마는 다른 사람의 생각을 엿볼 수 있는 '스몰 토크' 잡담의 소재가 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통해 화두를 던지고, 생각할 기회를 주고, 공감하는 이들을 모아 담론을 구성해 갈 수 있겠지요. 그렇게 우리 주변에서부터 작은 파문을 일으킬 수 있는 돌 던지기를 계속 하는 것은 좋은 시도라고 생각됩니다. 내게 떠오르는 생각을 던지고, 다른 사람의 말을 귀담아 듣고, 대화를 주고받으면서 다시 내 생각을 정돈하면, 최소한 나 자신이 가진 생각의 키는 한 웅큼이라도 더 자랄 수 있겠죠. 정치, 종교와 같이 민감한 화두를 직접 던지기 보다는 이렇게 가벼운 화제로 시작해서 조금씩 더 키워가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 될 것입니다.
 
난맥상에서도 생각들의 연결을 통해 합의를 이루어 가는 길
 난맥상에서도 생각들의 연결을 통해 합의를 이루어 가는 길
ⓒ 권지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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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구 복지국가의 역사는 끝없는 투쟁과 '사회적 합의(Consensus)'의 역사라고 봐도 될 것입니다. 물론 그 합의가 만장일치로 이루어지는 것은 불가능할 것입니다. 그러나 다수가 동의하고, 소수도 인정하는 정도의 합의는 가능할 수 있을 것입니다. 아마도 가장 기본적인 합의의 결과물은 '헌법'일 것이며, 헌법을 준수하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상당한 발전을 이루어갈 수 있겠습니다. 지금 우리가 직면한 문제는 헌법을 준수하지 않는 집단들이 있다는 사실이겠지요.

현재 정부는 소수의 대기업 집단과 부자들을 위해 세금을 깎아주고, 다수의 국민들을 위한 지원을 줄이겠다고 합니다. 소수를 걱정해 주는 것은 갸륵한 일이지만, 부유한 소수를 배려하고, 허리띠를 졸라매야 할 다수를 각자도생의 길로 내모는 것이 바람직한 방향일까요?

사회복지 연구는 거의 모두 가난한 사람이나 사회적 약자들, 그리고 그들을 돕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합니다. 그리고 그들은 대부분 순순히 연구에 참여해 줍니다. 그러나 부자들의 실제 삶을 연구하는 것은 매우 어렵습니다. 그들에 대한 연구는 대부분 피상적인 수준에서 이루어지며, 그들의 이야기를 탐색한 저자들의 책은 '한국의 부자들', '한국의 젊은 부자들', '자수성가한 부자 100명'과 같이 성공 스토리로만 가득 차 있습니다. 연구자의 입장에서는 그들이 사각지대인 셈입니다. 

태그:#은밀한 맥락을 찾아서, #사각지대, #사회적 합의, #다수에 대한 배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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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복지 현상의 은밀한 맥락과 패턴을 탐구하는 질적 연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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