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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 산 식물 하나가 내내 속을 썩였다.

집에 들여오자마자 이내 이파리가 썩어 '나 죽네' 비명을 지른다. 무엇이 문제인지 분갈이를 다시 해 보고, 물도 줘보고, 물을 안 줘도 보고, 별의 별 방법을 다 써봤지만 이 녀석은 계속 신음했다. 두 달째 이 문제로 씨름을 하다가 결국 손을 들었다. 

'그래, 운명에 맡기자. 네 생사는 내가 어떻게 할 수가 없다.'

그로부터 또 한 달, 어느 날 아침 나는 발견하고야 말았다. 이 녀석이 드디어 이파리 떨구는 것을 멈췄다! 그러고는 말았다. 이파리가 떨어지지 않는 것뿐, 더 자라지도 죽지도 않고 그저 숨쉬고만 있는 듯 조용했다. 마치 모든 세상이 멈춘 것처럼.

이 녀석의 동기들이 있다. 함께 우리집에 들어와서 어떻게든 적응해 나가려는 친구들 말이다. 어떤 친구는 들여오기가 무섭게 무럭무럭 잘 자라는가 하면, 어떤 아이는 이 녀석처럼 비실비실 힘이 없다. 그 비실비실한 아이 역시 온갖 방법을 다 써보다가 결국 물에서 키우게 됐다. 한 움큼 무성했던 이파리들이 1/3로 줄어들 동안 이 아이도 나름 용을 썼는지 그래도 잘 살아 보겠다고 이제는 새 이파리를 보이기까지 한다. 

오늘 아침에 반가운 비 소식이 있었다. 피곤한 몸을 뒤척이며 달콤한 아침잠의 유혹을 벗어나기가 힘들었다. 하지만 귓가 언저리에 떨어지는 빗방울 소리가 내게 소리쳤다.

'어서 비를 맞혀 줘야지! 뭐 하는 거야, 일어나!'

나는 서둘러 일어나 그 녀석을 허리춤에 끼고 밖으로 나가 비를 맞게 해줬다. 다시 집으로 들어와 여느 때와 같이 다른 동기들을 하나하나 살핀다. 밤새 안녕하셨는지. 그러다 그 비실이를 발견했다. 언제나처럼 똑같은 모양새였다. 그 녀석을 빤히 바라보다 문득 깨달았다. 

'아! 그래, 뿌리였어!'

수중 생활하는 비실이의 거무튀튀한 뿌리 사이에서 새하얀 뿌리가 한 가닥씩 나오기 시작한 것은 얼마 되지 않았다. 그리고 나서부터는 이 비실이의 창백한 낯빛은 온화함을 띄게 됐다. 그렇다! 바로 뿌리를 내리고 있는 중이었다!

일전에 밖에 내놓은 저 녀석을 분갈이 할 때 줄곧 의아해 했던 것이 있다. 속을 들여다 보니 뿌리는 엄청나게 무성한데 전혀 뻗어나가고 있지 않았던 것이다. 게다가 모두 저 비실이의 원래 뿌리처럼 거무튀튀한 모양이었다. 뿌리들이 모두 늙어 있었던 것이다. 둘 다 죽어버린 뿌리들을 껴안고 죽을 고비를 넘기면서 새 뿌리를 내리려고 준비하는 중이었던 것이다. 거기에 온 힘을 다 쏟아 다른 것들에 신경을 쓸 힘이 없었던 것이다.

식물들도 뿌리를 내려야 산다. 뿌리를 내리는 데까지는 시간이 걸린다. 새로운 환경이 믿을 만 한지, 내가 어떻게 해야 잘 살아갈 수 있을지, 어떻게 변해야 살아남을 수 있는지 이것저것 따지고 지켜보고 고민할 시간 말이다.

그동안에 평생 애써 키워온 이파리들을 다 떨궈내야 할 수도 있고, 내 밑천으로 여겼던 뿌리마저 다 썩어버릴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생명은 대단한 것이어서 결국 살아남는다. 팔다리가 잘리고 꿈틀거리는 몸뚱아리로 뒤뚱뒤뚱 기어가면서라도 이 우주에서 살아남아 그  존재의 의미를 찾는다. 

시골로 내려온 지 어언 4년, 나는 아직도 갈 길을 헤매고 있다. 도시에서 살 때처럼 죽을 것 같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활력있게 내 인생을 개척하고자 하는 에너지도 좀처럼 생기지 않았다. 뭔가 정체돼 있는 게 두둑히 쌓여있는 먼지처럼 요지부동이었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왔다. 나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지, 무엇을 하고 싶은 것인지, 그 대답은 항상 발 언저리에 머물기만 하고 주저앉아 아무것도 하지 않는 나를 나무랄 뿐이었다. 내가 한심했다.
       
나는 뿌리내리는 중입니다.
▲ 비 맞는 화분 나는 뿌리내리는 중입니다.
ⓒ 이수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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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를 맞고 있는 저 녀석을 바라보며 생각한다. 우리 모두 시간이 필요했던 것이라고. 너도 나도 이곳에 뿌리 내릴 시간이 필요했던 것이라고. 그러니 자책하지 말고 힘을 내라고.

보송보송한 뿌리가 하나 둘씩 자라고 나면 우리도 단단한 이 땅 위에서 힘차게 새 이파리를 내 놓을 날이 올 것이라고. 그러니 안심하고 오늘 하루도 흠뻑 이 따뜻한 비를 맞으며 천천히 숨 쉬라고. 다가올 밝은 내일을 위하여. 

태그:#화초, #식물, #뿌리,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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