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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접살림으로 180리터짜리 소형 냉장고부터 시작한 나의 냉장고 편력은 800리터에 육박하는 지금의 초대형 냉장고에 이르렀다. 어쩌면 우리는 그동안 저 냉장고의 끝없는 속을 채우기 위해 그렇게 다사다난하게 살아온지도 모른다. 빙하기 생물들의 화석처럼 차갑고 단단하게 먹거리들이 박힌 냉장고 문을 열면 마치 포만한 공룡의 뱃속을 들여다보는 것 같다" - 냉장고, 그 욕망의 대합실. 김정희(수필가)          

대학생 인턴기자로 있던 시절, 동기들과 냉장고 특집 기사를 기획한 적이 있다. 위 수필은 당시 우리가 썼던 기사의 서두에서 인용한 문구다. 어떤 주제를 놓고 기획기사를 쓸지 여러 아이템이 나오던 중 우연히 '냉장고'라는 단어에 꽂힌 계기가 있었다.

당시 철학자 강신주씨의 강의를 듣던 때였다. 자본주의적 욕망이 얼마나 인간의 삶을 타율적으로 만드는지, 독립적인 인간으로서의 삶이란 어떤 것인지를 논하는 강의로 기억한다. 그 강의에서 그는 더 많이 벌고 더 많이 쓰는 자본주의적 욕망의 부산물로서 냉장고를 예로 들었다. 많은 이들이 노예처럼 벌어서 낭비하듯 음식물을 소비하고, 그 욕망의 부산물들을 냉장고 냉동실에 숨겨놓는다는 것이었다. 당연히 그 부산물이란 몇 번 쓰지도 못하고 상해버린 소스와 안에 뭐가 들었는지도 알 수 없는 검은 봉지들일 테고.

그 말에 꽂힌 우리는 바로 사전 취재에 돌입했다. 실제로 취재 결과 한국은 대형 냉장고를 전 세계에서 제일 많이 구입하는 나라였다. 대부분의 가정이 그 용량도 부족하다 느꼈는지 김치 냉장고를 또 두고 있었다.      

[관련기사]
대형 냉장고가 좋아 샀더니 음식물 쓰레기만 늘었네 http://bit.ly/WfZDD4

당시 인터뷰를 위해 만난 주부들의 반응은 대체적으로 비슷했다. 냉장고가 커지는 것이 편리하기도 하지만 한편으론 버리는 음식도 늘어난 것 같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다양한 사이즈의 냉장고 모델이 많지 않아 선택권이 적다는 얘기들도 꽤 많았다.

실제로 조사해보니 그 무렵 대기업에서 출시한 중소형 냉장고 모델은 거의 없었다. 생산량도 현격히 적었다. 소비자 입장에선 대용량 냉장고를 사지 않으면 불편을 겪어야 할 수준이었다.

사전 취재한 내용과 주부들의 인터뷰를 종합해 기획기사 세 꼭지를 엮어냈다. 생활에 밀접한 소재인 탓인지 반향이 꽤 있었고, 한동안 포털사이트 메인에 실리기도 했다. (우리 때문은 아니겠지만) 그 이후에 다른 매체에서 냉장고 관련 후속 보도를 여럿 내보내기도 했다. 

가전제품 영업전략, 직접 겪어보니
 
단문형 냉장고. 총 용량 333리터. 작아 보이지만 이 정도면 충분히 둘이서 쓴다.
 단문형 냉장고. 총 용량 333리터. 작아 보이지만 이 정도면 충분히 둘이서 쓴다.
ⓒ 박종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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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그때만 해도 작은 냉장고를 장만하는 데 드는 불편과 압박은 수치와 통계에만 존재하는 것이었다. 이 문제를 실제로 체감한 건 결혼을 앞둔 시점이었다.

신혼 살림을 알아보기 위해 찾아간 백화점에서 자꾸 대형 사이즈의 가전을 권유받았다. 직원은 아이가 생기면, 또는 더 큰 평수로 이사 가면 반드시 큰 가전이 필요하다며 숨 막힐 정도로 영업을 했다.

그리고 회유책으로 큰 폭의 할인을 제시했다. 작은 가전을 사서 할인 없이 1000만 원을 지출하는 것보다 2000만 원짜리 대형 가전 패키지를 묶어 구매하면, 1300만 원까지 할인이 가능하다는 식이었다. 가전의 기능과 사양을 생각하면 300만 원의 추가 비용은 굉장히 경제적이라고도 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21평짜리 집에 72인치 벽걸이 TV와 양문형 냉장고는 부담스러웠다. 예산은 정해져 있었고 이걸 다 들여놓을 공간도 없었다. 오프라인에서 소형 가전을 구하는 건 무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인터넷으로 발품을 팔아 가전제품을 마련했다.   

당연한 얘기지만 냉장고의 역할은 보관에 있다. 하지만 어떤 냉장고도 식자재를 불멸의 존재로 만들어주진 않는다. 결국 모든 식자재는 시간이 갈수록 시들고 상한다. 아무리 획기적인 보관법이 나와도 그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결국 가장 좋은 건 막 생산된 식자재를 그날 당일 요리해 먹는 것이다. 그러려면 매일 장을 보는 게 제일 건강한 습관이다. 그 습관만 들여도 냉동실 속 정체불명의 검은 봉지가 쌓여가는 걸 막을 수 있다.

문제는 우리가 실천을 하지 못하는 여건에 있다는 것이다. 특히 맞벌이 부부에게는 현실적으로 힘든 일이기도 하다. 기진맥진 퇴근한 몸으로 매일 장을 보는 일은 그 자체로 상당한 공력이 들어가는 일이다. 그걸 집에 가져와 요리까지 해야 한다면? 생각만 해도 우울하다.

나 같은 경우 자영업자이므로 마트가 문을 닫는 시간이 정확히 내 퇴근시간과 겹친다. 아내가 나 대신 장을 봐줄 때가 간혹 있긴 하지만, 그건 일시적인 도움일 뿐 가사분담 원칙에 맞지 않는다(재택근무 중이라지만 아내도 나만큼 시간이 없는 건 마찬가지다). 그 덕에 쿠팡이나 마켓컬리에서 장을 볼 때가 늘었다. 시중에 있는 마트에 비해 약간 비싸지만 적게 먹을 수 있게 쪼개 놓은 상품들이 많아 낭비되는 식자재를 최소화할 수 있다.

물론 죄책감은 좀 든다. 가장 좋은 건 내가 일찍 퇴근하고 마트에 직접 찾아가 싱싱한 제품을 골라서 철야 노동하는 이들이 한 분이라도 덜 존재하는 세상이 되는 것일 테니까. 안타깝게도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남들보다 늦게 퇴근하는 나의 일상은 그보다 더 늦은 시간까지 일하는 이들의 수고를 빌려 지탱되고 있다. 

냉장고 깔끔하게 유지하는 법

사실 가장 필요한 건 냉장고 속을 들여다보는 시각을 뒤집는 일이다. 나 역시 냉장고가 비어 있으면 강박적으로 채워야 한다고 생각했었다. 생각이 슬슬 바뀌기 시작한 건 집들이를 하루 앞두고 식재료로 가득 찬 냉장고를 보고 나서였다.

순간 속이 더부룩한 느낌이 들었다. 아무리 먹어도 줄지 않는 음식을 보는 기분이었다. 저 많은 걸 다 먹어도 문제고, 버려도 문제라는 걸 깨달은 것이다. 그 일이 있은 뒤에는 냉장고의 식재료가 다 소진될 때까지 장을 보지 않는다(아마 아이가 있는 집은 사정이 많이 다르겠지만).

요즘엔 냉장고가 텅텅 비면 묘한 쾌감을 느낀다. 낭비되는 것 없이 장을 제대로 봤다는 생각이 들어서다. 냉장고를 정반대의 시각으로 바라보게 된 것이다. 낑낑 소리를 내며 과부하에 시달리던 음식물 쓰레기 처리기도 덕분에 평화를 찾았다.

냉장고를 깔끔하게 유지하는 데에는 딱 세 가지만 기억하면 된다. 식재료가 다 떨어질 때까지는 새로 뭔가를 구입하지 말 것. 냉장고란 채우는 게 아니라 비워야 하는 가전이라는 것, 만든 요리를 다 먹기 전에는 새로운 뭔가를 만들지 말 것. 이것만 알고 있어도 냉장고 속 식자재를 더 효율적으로 관리할 수 있다.

장을 본 날짜와 금액, 식자재의 종류를 기록해 놓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이러면 중복으로 요리를 할 필요가 없어 더 효율적으로 냉장고를 관리할 수 있다. 보름에 한 번씩 냉장고 청소를 하는 것도 식자재 재고관리에 도움이 된다.

습관만 들면 어렵지 않다. 이렇든 저렇든 다 각자의 방법이 있을 것이다. 냉장고가 욕망의 구렁텅이로 전락하는 일은 일단 막아보자. 많이 벌어서 많이 써 봐야 나만 고달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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