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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대 농민들이 집 마당에서 볍씨소독을 하고 있다. 지금은 중년이 됐을, 대문턱에서 바라보는 아이의 모습이 정겹다.
 1970년대 농민들이 집 마당에서 볍씨소독을 하고 있다. 지금은 중년이 됐을, 대문턱에서 바라보는 아이의 모습이 정겹다.
ⓒ 예산군농촌지도사업60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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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능의 도깨비 방망이 역할을 해오던 긴급조치 9호도 '긴급'이 장기화되면서 차츰 그 약발이 떨어졌다. 달리 말하면 재야민주세력이나 학생ㆍ노동자들이 이를 별로 두려워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1970년대 중반기를 넘기면서 재야민주세력은 조직적 기반이 확대되었다.

민주구국선언서, 민주구국헌장, 3.1민주선언 등으로 이어지는 재야의 반유신 민주화운동의 결의 표명과 더불어 재야의 조직적 기반도 확대되었다. 이미 재야의 토대로 자리잡은 종교인들과 지식인들 외에 새로운 민주화운동 단체들이 결성되어 재야의 대오에 합류했다. 이후 이들이 조직적으로 재야 운동의 산하 단체의 역할을 담당했다. 이로써 70년대 재야 운동의 조직적 특성인 개인 중심의 연합체에 단체의 명칭이 병기되는 새로운 현상이 나타났다. 70년대 후반에 새롭게 조직된 이들 산하 단체들이 국민연합의  확대된 조직적 토대가 되었다. (주석 3)

이와 같은 현상은 정의구현사제단에도 큰 원군이 되었다. 계속되는 박정희 정부의 박해로 사제들이 구속되고, 천주교 내부에서는 여전히 상식과도 부합되지 않는 '정경분리'를 내세워 사제단을 사갈시하는 세력이 똬리를 틀고 있었다.

교회 내적인 제약과 사제들에 대한 탄압으로 사제단 활동이 위축되는 시기에는 마침 노동운동, 농민운동의 자생적 민중역량이 확대되어 나오는 과정이어서 사제단은 모든 고통을 주도하지는 못했지만 그것을 선도하거나 밑받침, 또는 연대하는 투쟁의 형태를 취해왔다. 또한 강력한 언론통제를 바탕으로 한 학생운동, 노동운동 등에 대한 가열한 탄압과 모략과 음해에 대해서는 그 윤리적ㆍ도덕적ㆍ민족적 정당성을 밑받침하는 역할을 수행해 왔다.

독재권력이 흔하게 쓰는 수법으로서, 저항하는 세력의 주장을 민중으로부터 차단하기 위해 민주세력에 대해 '용공좌경'의 굴레를 씌워 모략과 처단을 일삼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사제단은 이러한 모략과 정치보복, 그리고 그것이 가져올 민족자해의 분열 위험에 맞서 그때마다 강력히 대응해 왔다. (주석 4)

정의구현사제단은 안동교구 사제단과 10월 18일 안동시 문화관에서 '농민과 근로자ㆍ양심수를 위한 기도회'를 열었다. 전국 12개 교구에서 참석한 40여 명의 사제와 3백여 명의 신자들이 모인 기도회는 이춘우 신부의 〈누가 내 이웃인가?〉를 묻는 '강론'에 이어 이정모 신부의 〈노동자의 고통〉이란 제목의 국민에게 드리는 호소문, 류강하 신부의 함세웅 신부의 〈상고 이유서〉낭독, 정의구현사제단의 〈결의문〉이 '농민의 아픔을 외면할 수 없다'는 곽동철 신부에 의해 발표되었다. 

기도회 후 5명의 사제가 연행, 구속되자 참가자들은 여러 날 동안 철야 기도회를 갖고 다른 교구에서도 연대하여 구속 사제들의 석방을 위한 기도회를 열었다. 다음은 사제단이 채택한 〈결의문〉이다. 

농민의 아픔을 외면할 수 없다

 정의를 땅에 떨어뜨리는 자들아!
 바른 말하는 사람을 싫어하는 자들아!
 너희가 힘 없는 자를 마구 짓밟으며
 그들이 지은 곡식을 거둬 가는구나.
 너무도 세상이 악해져서 뜻 있는 사람이 
 입을 다무는 시대가 되었구나.(아모스 5.7~13)

우리는 농민들의 아픔을 외면할 수가 없다. 왜냐하면 농민의 아픔이 바로 주님의 상처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근로자들의 아픔을 외면할 수가 없다. 왜냐하면 근로자들의 아픔이 바로 주님의 상처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진리와 정의와 사랑을 위해 주님처럼 양심수의 길을 끝까지 걸어갈 것을 굳게 다짐하여 다음 사항을 결의한다.

1. 농협조합장 임명에 관한 임시조치법을 철폐하여 조합장 선거제를 실시하라.
2. 농협은 부당한 강제 출자를 즉각 중단하라.
3. 농협은 비료 부정 도입으로 인한 농민의 피해 40억 원을 변상하고 농민에게 사죄하라.
4. 농협은 대정부 의존적인 존립에서 벗어나 농민에게로 돌아오라.
5. 정부 수매 가격의 폭군적 결정으로 인한 농민의 생산비 적자액, 가마당 일만 원을 보상하라.  
6. 정부에서 권장한 통일계통의 쌀은 농민들이 원하는 전량을 수매하라.
7. 추곡 수매 대금은 전액 현금으로 지불하라.
8. 정부는 수매가 결정에 농민의 의사를 반영할 수 있는 명실상부한 곡가심의 위원회를 구성하라.
9. 저임금, 저곡가 정책으로 소수의 가진 자를 배불리는 반국민적 정책을 지양하라.
10. 노동조합을 더 이상 탄압하지 말고 근로자의 인권을 보장하라.
11. 민족과 국가의 양심인 양심수들을 즉각 석방하라. 
12. 언론자유를 보장하여 국민의 양심을 성숙되게 하라. 
13. 소수집단의 안보를 위해 국민의 양심을 질식시키는 유신헌법과 긴급조치를 철폐하라. (주석 5)


주석
3> 김대영, <반유신 재야운동>, <유신과 반유신>, 429쪽,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2005, 선인.
4> 함세웅, <멍에와 십자가>, 203쪽.
5> <암흑 속의 횃불(2)>, 346~347쪽.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 연구]는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태그:#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 #민주주의 , #민주화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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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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