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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수의 과격·폭력세력이 학교 건물을 점거하고 농성을 계속할 시 공권력을 투입하겠다. 학생들이 총장실 파괴 등 기물 파손 시 학생들에게 반드시 배상 책임을 묻도록 하며, 학외의 문제 행사가 학교 안에서 열리거나 문제 인사가 학교에 들어와 학생들을 선동하는 일이 없도록 하라."

1988년 12월 5일에 문교부 장관으로 부임한 정원식은 취임하자마자 사학분규 등 각종 학원문제에 강경 대응으로 일관했다. 정 장관은 4월 11일 서울 동부와 남부지역 18개 대학 보직교수와 학부모 간담회에서 '학원안정 4단계 방안'을 밝혔는데, 학내 점거농성 사태가 장기화 될 시 계고-임시휴업-전원유급-폐교의 단계적 조치를 취해 이를 교수와 학부모들에게 경고시킨 뒤 이에 따라 경기대와 한림대 등에 계고 조치를, 고려대와 서울교대에 임시휴업 조치를 내렸다. 동의대 사건은 이런 시대 배경 속에서 잉태됐다.

동의대 사건은 1989년 5월 3일 경찰이 동의대 중앙도서관에 잡혀 있던 경찰관 5명을 구출하기 위해 농성 중이던 학생들을 해산시키는 과정에서 화재가 발생, 경찰관과 전투경찰 등 7명이 사망한 사건이다.

그해 3월 11일 입시부정과 관련해 동의대학교 김찬호 교수가 양심선언을 하자, 총학생회 간부를 포함한 50여 명이 '입시부정행위 진상규명 특별위원회'를 구성하고 총장실을 점거, 농성을 시작했다.

그해 5월 1일 동의대 학생들은 전날 4월 30일의 노동자대회 원천봉쇄에 항의하고 파업을 지지하는 '노동절 기념 청년학도 궐기대회'를 개최한 후 교문으로부터 500m 떨어진 가야 3파출소에 기습적으로 화염병 10여 개를 투척했으며, 해당 파출소장은 주동자 정성원을 검거했다.

이에 시위 학생들은 쇠파이프 등으로 파출소장을 폭행한 후 도주했다. 동의대는 전국에서 손에 꼽힐 정도로 캠퍼스가 가파른 경사 부지에 형성돼있기 때문에 작정하고 방어하면 진입하기 굉장히 까다롭기로 악명 높았다.

동의대 학생 100여 명은 검거된 동료 학생을 구출하기 위해 재차 해당 파출소를 기습했으며 이 과정에서 50여 개의 화염병이 투척됐다. 대규모 기습 탓에 상황이 긴박해지자 파출소장 김창호 경위는 해산 경고 후 카빈총으로 3발의 공포탄을 발사했으며, 이후 흩어진 학생들이 재차 기습을 반복해 총 3회에 걸쳐 24발의 공포탄을 사용해 해산시켰다.

동의대 학생들은 경찰의 공포탄 사용을 비난하는 데모를 개최했고, 이후 300여 명이 교문 밖으로 진출해 화염병을 투척하는 등 본격적인 시위를 전개하자 경찰은 이에 대응해 학생 8명을 검거했다. 그러자 동의대 학생 40여 명은 교문 밖 300여m 지점에서 근무 중이던 심상오 등 전경 5명을 강제 납치해 학내 도서관에 감금했다.  
 
전경 5명을 납치해 도서관에 감금한 채 농성을 벌이던 동의대생을 해산하기 위해 무리하게 진압작전에 돌입했다가 최동문 경사 등 7명이 불에 타 숨지거나 추락사 하는 참사가 벌어졌다. 당시 상황을 보도한 경향신문 1면.
 전경 5명을 납치해 도서관에 감금한 채 농성을 벌이던 동의대생을 해산하기 위해 무리하게 진압작전에 돌입했다가 최동문 경사 등 7명이 불에 타 숨지거나 추락사 하는 참사가 벌어졌다. 당시 상황을 보도한 경향신문 1면.
ⓒ 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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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5월 3일 오전 5시10분경 경찰은 5개 중대를 동원, 전격적인 진압작전에 돌입했다. 도서관으로 진입하는 경찰에 맞서 학생들은 화염병을 던지며 저항했는데, 이 과정에서 도서관 7층에서 화재가 발생했다.

고층건물 농성장 진입에 필수적인 투신대비용 매트리스, 고가사다리 등은 물론 소화 장비조차 제대로 갖추지 못한 상황에서 경찰 20여 명이 이 불을 미처 피하지 못하고 순식간에 불길에 휩싸였다. 결국 최동문 경사, 박병환‧정영환‧조덕래 순경 등 4명의 현직 경찰과 모성태‧김명화‧서원석 상경 등 2명의 전투경찰이 불에 타 숨지거나 7층에서 추락사하고 10여 명이 중상을 입는 참사가 벌어졌다.

이 사건으로 동의대 학생 94명이 현장에서 연행돼 76명이 구속됐다. 이중 20명에게 '현주건조물방화치사상' 혐의가 적용됐는데, 총학생회장을 비롯해 4명에 대해서는 살인혐의가 추가 적용됐다. 이후 재판 과정에서 사법부는 이들의 고의적인 살인 혐의에 대해서는 무죄로 판단했으나, 화염병을 던지는 등 화재 당시 특정한 행위를 한 4명과, 사건 당시 동의대 학생운동을 주도했던 4명 등에게 '현주건조물방화치사상' 혐의를 적용, 무기징역 등 중형을 선고했다.

이밖에 다른 학생들에게도 징역형 혹은 집행유예 선고가 내려졌다. 그러나 가장 논란이 됐던 화재의 직접적인 원인과 관련해서는, 1심과 2심의 판단이 엇갈렸고, 결국 제대로 규명되지 못한 채 재판이 종결되고 말았다.

검찰은 학생들이 경찰의 진입을 막기 위해 도서관 복도에 시너와 석유를 뿌리고 화염병을 던졌기 때문이라고 주장했으나 학생들은 재판 과정에서 고문으로 인해 허위자백을 했다고 주장했다. 1심과 2심에서 화재 원인을 달리 판정했으며, 경찰과 검찰이 화인감정서 제출을 거부하는 바람에 화재 원인은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았다.
 
부산지방경찰청 앞 동백광장 내에 추모공간이 2009년에 마련되어 순직 경찰관의 흉상이 세워졌으며 2011년 국가 현충시설로 지정됐다.
 부산지방경찰청 앞 동백광장 내에 추모공간이 2009년에 마련되어 순직 경찰관의 흉상이 세워졌으며 2011년 국가 현충시설로 지정됐다.
ⓒ 우희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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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건은 학생운동 역사상 단일 사건으로 최다 구속자와 제적생 양산, 그리고 최대의 형량을 기록했다(당시 1989년 기준). 또한 학생운동에 대한 여론을 악화시키는 계기로 작용했고 이후로도 학생운동의 폭력성을 부각시킬 때 거론되기도 했다. 당시 노태우 정권은 이러한 여론에 힘입어 공안정국을 형성함으로써 학생운동이 위축됐다.

2002년 4월 '민주화운동 관련자 명예회복 및 보상심의위원회'는 동의대사건 당시 학생으로 이 사건에 관련됐던 46명을 사학비리에 항거한 '민주화운동가'로 인정하고, 이에 따라 보상을 하기로 결정했다. 민주화보상심의위는 "방화치사상 등 유죄가 선고됐지만 살인에 고의가 없었던 등의 사유를 참작할 때 발생 결과가 중대하다는 것만으로 민주화운동 관련성을 부인할 사유는 못 된다"며 결정의 이유를 밝혔다.

그러나 이같은 결정이 내려지자, 경찰 7명이 사망한 사건을 민주화운동으로 볼 수 있는지 여부에 대해 큰 논란이 일어났다. 이후 2010년에는 '동의대사건 등 희생자의 명예회복과 보상에 관한 법률'이 제정돼 당시 진압 경찰들에 대해서도 명예회복과 보상이 함께 이뤄졌다. 순직 경찰관에게는 1인당 최고 1억2700만 원을 보상했다. 부산지방경찰청 앞 동백광장 내의 추모공간이 동의대 사건 발생 20년 만인 2009년에 마련됐고, 순직 경찰관의 흉상이 세워졌으며 2011년 6월 국가 현충시설로 지정됐다. 

순직한 경찰관들은 1계급이 추서된 뒤 국립대전현충원 경찰묘역에 나란히 안장됐다. 2016년에는 이들 묘역에 추모제단과 표지석, 안내판을 설치해 추모공간을 조성했다. 또 2019년 5월에는 대전현충원 이달의 현충인물로 최동문 경위를 선정하기도 했다.
 
국립대전현충원 경찰묘역에 조성된 동의대 사건 순직경찰관 묘역.
 국립대전현충원 경찰묘역에 조성된 동의대 사건 순직경찰관 묘역.
ⓒ 우희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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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시민미디어마당 사회적협동조합 누리집에도 게재되었습니다.


대전에서 활동하는 시민미디어마당 협동조합입니다.
태그:#국립대전현충원, #동의대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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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년 간 신문사(언론계)에서 근무했음. 기자-차장-부장-편집부국장을 거쳐 논설위원으로 활동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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